연결의 시대에 국가란 무엇인가? 네트워크 국제정치를 위한 단상
상태바
연결의 시대에 국가란 무엇인가? 네트워크 국제정치를 위한 단상
  • 민병원 이화여대·국제정치학
  • 승인 2023.12.11 14: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저자에게 듣는다_ 『네트워크 국제정치: 국가의 변환과 거버넌스』 (민병원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336쪽, 2023.11)


 

1997년 말의 외환위기와 그로 인한 사회적 충격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직장에서 거리로 내몰리고 정부에 대한 국제기구의 간섭과 외국 자본가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줄 역량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되묻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에도 유사한 의문이 이어졌다. 혼란스러운 경제 상황과 사회적 공황 상태 속에서 미국인들조차 자신들이 믿어왔던 국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음을 감지했다. 어디 이뿐일까?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내전과 기아, 자연재해와 경제위기로 인해 난민이 발생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일 반복되고 있다. 질서를 유지해야 할 국가는 보이지 않고 사람들은 우왕좌왕 헤매다 국경을 넘는다. 이런 시대에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냉전이 종식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그런데 세상은 아마도 더 혼란스러워졌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겉으로 보기에 세계가 점차 복잡해지고 무한 연결되면서 더 이상 효과적으로 유지하거나 통치하기가 어려워진 이유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세계화’라고 불리는 시공간의 압축과 그로 인해 국경을 넘나드는 인간과 자본, 상품과 서비스의 교류는 좁은 영토 안에 국한되어 있던 국가의 권한과 기능을 대폭 좁혀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진단은 분명 상당한 정도로 타당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더 제기해야 한다. 그동안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국가에 부여해 온 정당성과 대표성을 계속 허용해야 할까? 일부에서는 그렇다고 본다. 국민을 위기로 내몰거나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이제 ‘주권’이라는 최고의 권리를 더 이상 인정받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러한 ‘실패한 국가’에 대하여 ‘인도주의적 개입’이니 ‘보호의 책임’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군사적 개입을 마다하지 않는다. 유럽연합처럼 새로운 정치 단위체를 지향하는 곳에서는 전통적인 국가의 주권을 기능별로 분산시키면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전통적인 국가는 사라지는 것일까? 17세기 근대 유럽에서 출발한 국제정치체제의 핵심적인 행위 주체로서 ‘국가’는 왜 이런 지경에 빠진 것일까? 이 책에서는 전통적인 국가의 모습이 흔들리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국가가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어떻게 스스로의 구조와 역할을 바꾸어 나가고 있는지를 짚어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가는 아직 죽지 않았을뿐더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을 재구성해 가고 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의 국가는 과거의 국가와 다른 모습을 지향하면서 여전히 정치적 ‘주체’로서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국가의 ‘변환’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네트워크’라고 본다. 국가라는 행위 주체는 새롭게 부상하는 요구와 기대에 맞추어 다양한 방식으로 내부 구성 요소들을 연결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국가들 사이의 연결망이 수준별 · 기능별로 촘촘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국가들 간의 관계’를 지칭해 온 국제정치질서가 이제는 ‘국가와 다양한 비국가 행위자들 간의 관계’로 재편성되고 있다.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더 이상 국가라는 ‘당구공’ 사이의 역학관계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에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국제정치질서가 근대의 유럽에서 비롯되었고, 영토 기반의 주권과 불개입 원칙을 전면에 내세운 국가 행위자를 상호 인정하는 관행에 뿌리를 두어 왔음을 고려할 때 이러한 ‘네트워크’적 속성을 다시금 강조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다.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그리고 내전이나 자연재해, 감염병의 확산 등 국가가 자국 영토 내의 국민을 충분하게 보살필 수 없게 된 상황의 이면에는 근대 주권의 보루였던 국경과 영토성이 무너지는 상황, 즉 세계화의 추세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와 국제정치는 연결성과 상호의존이 심화되면서 안으로부터의 혼란뿐 아니라 밖으로부터의 도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으로 당구공처럼 비유되어 온 국가의 속성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 그로 인해 국제정치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국가와 국제정치가 당구공의 이미지가 아니라 복잡한 그물망처럼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네트워크의 국제정치는 바로 이러한 구조적 변화에 주목한다. 우선 ‘네트워크’가 지닌 구조적 속성을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논의는 철학과 공학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적이 있는데, ‘브래스 패러독스’와 ‘뉴컴의 문제’라는 테제는 연결망이 많아지면서 나타나는 반직관적 현상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테제를 통해 우리는 네트워크 연결이 강화될수록 우리의 상식과 직관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이런 현상은 사회과학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는데, 합리적 개인들의 선택이 더 이상 사회적 합리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죄수들의 딜레마’ 게임모델이 바로 그것이다. 네트워크 사회 속에서는 우리가 관찰하기 쉽지 않은 피드백 효과, 자기조직화, 외부효과, 예측 불가능성이 작동하면서 상식적 판단을 뛰어넘는 결과가 초래되곤 한다. 오늘날 고도로 연결된 세계화 시대의 국제정치에서도 이런 반직관적 네트워크 현상이 반복되면서 합리적 판단만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책에서는 국제정치의 네트워크화 현상을 역사적 맥락과 지역적 차원에서 살펴본다. 역사적으로는 과거 대영제국과 팍스 아메리카나의 지배체제가 인식공동체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사례로 영국의 채텀하우스와 미국의 외교협회가 작동해 온 방식을 소개한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네트워크 국가’로 규정할 수 있는 국가의 변환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살펴본다. 국가의 영토 주권은 점차 쇠퇴하는 듯 보이지만 다층거버넌스, 이합질서, 메타거버넌스와 같은 구조적 변환을 통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국가의 ‘변환’ 과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경우가 바로 유럽연합인데, 이 책에서는 유럽연합의 구조적 분화와 연결이 일어나는 방식을 ‘개방형 정책조정’ 사례를 통해 자세하게 논의한다. 개방형 정책조정은 30여 개에 달하는 회원국 사이의 정책적 이견을 조정하기 위해 유럽연합이 도입한 연성 문제해결 제도이다. 이러한 제도는 전통적인 주권적 방식에 대비하여 유연성을 강화함으로써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에 공조가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네트워크 국가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로 밥 제솝의 ‘메타거버넌스’ 개념을 꼽을 수 있다. 전통적인 국가의 역할이 정당성과 권위에 기반을 둔 하향식 통치였다면,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점자 다양한 영역에서 각각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행위자들을 포괄하는 거버넌스 메커니즘은 한층 더 유연한 관리모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하향식 모델이나 수평적 거버넌스 모델은 상향식 시장 모델과도 대비될 수 있다. 제솝에 따르면 오늘날의 네트워크 국가에서는 이러한 여러 유형의 문제해결 메커니즘들이 동시에 활용되고 있으며, 이슈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 적절한 관리 모형들이 선택적으로 적용된다. 이러한 모습은 네트워크 형태의 관리 모델을 채택하고 있는 유럽연합에서 자주 관찰되는데, 예를 들어 외교나 안보문제는 전통적인 중앙집중형 · 하향식 모델로 해결하는 반면, 복지나 보건 등 일상적 이슈는 지방자치나 시장 모델을 통해 관리한다. 이와 같은 유연성을 고려할 때 유럽연합의 국가적 속성은 네트워크 거버넌스 또는 메타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연합의 사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듯 연결이 심화되고 복잡해지는 오늘날 세계 속에서 국가는 자신의 구조와 기능을 바꾸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환의 시대에 세계의 다른 지역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 동아시아의 국가와 국제정치를 들여다보면 유럽연합에 비해 이러한 변환의 속도가 매우 느리다고 해야겠다. 무역이나 인적 교류 등 하위정치 부문의 연결은 증가해 왔지만, 동아시아의 갈등과 분쟁 구도를 고려할 때 국가는 여전히 전통적 귄위와 중앙집중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가의 변환과 국제정치질서의 네트워크화 추세가 동아시아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별도로 동아시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네트워크 거버넌스를 어떻게 도모해야 할 것인지를 논의한다. 무엇보다 앞으로의 동아시아 정치는 국제정치질서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단순한 모델로는 더 이상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국가의 변환 또는 네트워크 국가의 등장이 초래할 영향을 전통적인 국가론과 국제정치이론에 관련한 논의를 따로 전개한다. 최근 학계는 네트워크 분석 등 방법론적 혁신에 주목하고 있지만, 이 책은 오늘날 국가의 속성 변화와 국제정치질서의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을 위한 존재론적 의미를 부각하는 데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민병원 이화여대·국제정치학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머숀센터(Mershon Center) 펠로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복잡계 이론을 바탕으로 국제정치 현상을 탐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저서로는 『복잡계로 풀어내는 국제정치』, 공동 집필 및 편집 저서로는 『복잡계 워크샵』, 『탈냉전 이후 국제관계와 북한의 변화』, 『집단지성의 정치경제』, 『동아시아의 보편성과 특수성』), 『장소와 의미』, 『사이버 안보의 국제정치학적 지평』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