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어떻게 미식의 나라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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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어떻게 미식의 나라가 되었나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2.0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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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프랑스 음식은 어떻게 세계 최고가 되었나? | 마리아 테벤 지음 |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580쪽

 

미식의 원조이자 정수로 알려진 프랑스 요리. 그런데 정작 그 맛이 명성에 부합하는지를 두고는 이견도 있다. 프랑스 요리는 어떻게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을까? 이 책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이야기한 음식을 꼼꼼하게 살핌으로써 그 답에 접근한다.

돼지고기를 날것으로 먹던 야만적인 프랑크족, 그리스도교가 식생활에 미친 영향, 빵을 둘러싼 무수한 제도와 규정, 요리책의 등장과 궁정 요리라는 모범, 혁명 이후 부르주아 요리의 유행을 비롯해 식민지의 테루아르 문제, 오늘날 프랑스와 해외 영토의 식문화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서 다루는 스펙트럼은 다채롭다.

역사적 기록 외에 문학작품과 영화라는 허구적 장르에서 음식이 재현되는 양상도 조명하는데, 소설 『보바리 부인』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영화 〈엘리제궁의 요리사〉 등에서 당대의 식생활 관습을 드러내는 다양한 묘사는 그동안의 연구에서 간과된 층을 탐색하게 해준다.

광범위한 역사적 자료를 탐색하며 저자는 프랑스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사부아르페르savoir-faire’를 택했다. 이 책의 원제인 사부아르페르는 프랑스어로 수완이나 기량을 나타내는데, 음식문화와 관련해서는 훌륭한 먹거리를 키우고 요리하고 감상하는 노하우와, 그것을 프랑스적인 것으로 홍보하는 노하우로 나타난다. 천혜의 자연이 조성한 테루아르에서 난 양질의 음식을 뛰어난 솜씨로 요리해 최고의 가스트로노미를 즐긴다는 믿음, 식생활을 실제 현실 너머 상상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신화와 상징에 의존해 프랑스의 고유한 것으로 만든 자신감이 바로 이 한 단어에 녹아 있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식도락이나 미식 문화를 함축하는 가스트로노미라는 용어가 사전에 등재되기 훨씬 이전에 이와 관련된 개념과 태도를 발명했다. 고대의 문헌자료를 보면 프랑스인의 조상인 골족과 프랑크족이 일찍이 로마제국 시기부터 잘 먹는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훗날 프랑스인이 요리 혁신과 좋은 음식에 대한 천부적 기호를 지녔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이게 되었다. 

음식문화의 역사에서 르네상스와 중세는 상류층을 위한 세련미를 지향하고 가스트로노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기존의 음식 선택이 의학적 원칙을 따랐던 데 비해, 이 시기부터 쾌락과 개인적 취향을 우선하는 식생활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이웃 나라들에 비해 이른 시기부터 제빵용 밀가루를 얻기 위한 밀 재배가 지배적으로 이루어졌고, 빵을 집에서 굽기보다 시장에서 사 먹는 일이 보편화됨에 따라 전문 직종의 구조와 규율로 통제되는 제빵사 훈련 체계가 확립되었으며, 관련 직업도 세분화해 발전했다. 한편 샴페인과 치즈의 발명 등 혁신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7세기에 들어 인쇄되기 시작한 수많은 요리책은 프랑스 요리의 진미와 기교를 정의하는 규칙과 기술을 기록해 정립하며 궁정풍의 기품 있는 요리 모델을 뒷받침했고, 고급 요리를 프랑스어가 장악하게 되었다. 

혁명과 두 명의 황제가 등장하는 정치적 격동에 이어 공화국이 수립된 19세기에 프랑스 요리는 전설적인 셰프 마리앙투안 카렘, 『미식 예찬』으로 유명한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 『미식가 연감』을 쓴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의 활약과 함께 가스트로노미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이후 문학과 신화 등으로 이루어진 허구의 영역에서는 프랑스 땅의 풍요로움에 대한 찬사가 서사를 지배했다. 프랑스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속된 테루아르의 땅이라는 자부심은, 식민지를 확장해가던 19세기와 그 전후 프랑스 음식과 식민지 음식의 분리를 유지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과 독일의 점령을 거치면서 프랑스는 식량 문제와 배급을 겪었고, 1940년대부터 농업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면서 소농들이 대규모 농장에 통합되며 농촌 체계가 재편되었다. 이를 가스트로노미의 선두라는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인지한 프랑스는 프랑스 음식의 프랑스다움을 공식화하고자 했으며, 농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현대 자본주의의 침입으로부터 프랑스 농업을 지켜내고자 했다. 20세기 초에는 테루아르의 구분을 기반으로 프랑스 각지의 와인과 치즈 등 고급 식품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원산지명칭통제(AOC) 제도가 마련되었다.

2010년 ‘프랑스의 미식’은 유네스코의 인류문화유산 목록에 올랐고, 현대 프랑스 요리는 여전히 세계 최고로 꼽힌다. 동시에 프랑스 식생활은 패스트푸드와 냉동식품은 물론 베이글, 도넛, 케밥 등 외래 음식을 포함하는데, 세계화된 식품 산업과 이민자들이 들여오는 요리 전통은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된 프랑스 요리의 이미지를 파괴하는 위협이 되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할랄 음식에 대한 찬반은 프랑스 내에서 정치적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드러났듯이 프랑스 음식은 단일체가 아니라, 겹겹이 쌓인 층이다. 오트 퀴진과 부르주아 요리, 전문 셰프의 음식과 할머니의 가정식, 온갖 물자가 모여드는 수도 파리의 식탁과 지역의 특색이 드러나는 시골 식탁이 수많은 층을 이루고 있다. 음식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아도 현대화된 식품 산업과 농업 전통 양쪽이 공존한다.

오랜 역사 내내 프랑스 음식은 프랑스의 경계 바깥에서 들어온 농산물과 요리를 아우르며 프랑스의 것이 되도록 만들어왔으며,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를 통해 프랑스의 음식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그리고 이야기는 지금도 재생되고 있다. 변화에 직면한 현대 프랑스 역시 새로움과 융합을 포용하면서도 자국의 역사와 지역 테루아르의 가치를 유지하고 보존할 길을 찾아가며 계속 이야기를 수정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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