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을 욕망하는 인간의 발걸음이 변경을 국경지대로, 그리고 국경으로 바꾸었다
상태바
인삼을 욕망하는 인간의 발걸음이 변경을 국경지대로, 그리고 국경으로 바꾸었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2.09 23: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인삼과 국경: 청-조선의 영토 인식과 경계 형성 | 김선민 지음 | 최대명 옮김 | 사계절 | 316쪽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이전 시기 청제국의 영토와 거의 동일하다. 전근대 왕조의 경계 인식과 근대 국민 국가의 국경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청에서 중국으로 고스란히 이어진 국경의 역사는 매우 독특한 연구 주제이다. 현대 ‘중국’은 과거 ‘중화’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두 개념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중국은 한족과 56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만주인·한인·몽골인·위구르인·티베트인의 연합을 강조했던 청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 과정에서 청제국은 역대 중화 왕조의 하나로서 현대 중국의 중화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청이 요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전, 명과 여진, 그리고 조선은 모호하고 서로 섞일 수 있는 변경을 공유했다. 만주가 바로 그곳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만주는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인 동시에 청제국을 건국한 만주인의 고향이다. 이 책은 17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청과 조선의 관계 속에서 영토 인식와 경계 형성을 탐구하며, 오늘날 중국이 강조하는 ‘중화 제국으로서의 청’과는 다른 제국의 특징을 드러낸다.

청과 조선의 경계는 여러 집단이 다양한 형태로 교류하는 변경frontier에서 청이 출입을 통제하는 국경지대borderland를 거쳐 근대적 의미의 국경border으로 쉼 없이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청제국의 일방적인 동아시아 질서 구축 과정, 혹은 조선의 반청이나 실학 운동의 결과가 아니었다. 청은 조선과의 국경 문제를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거나 자애를 내보이는 기회로 삼았고, 조선은 변경의 혼란을 이용하여 평화와 안전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이 지역의 대표 산물인 인삼과 이를 욕망한 인간의 끝없는 발걸음이 한반도와 중원 양쪽의 변경이었던 만주를 역사의 중심부로 끌어올렸다. 저자는 1637년 병자호란의 결과로 구성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에서 출발하여, 사대와 조공의 틀 바깥에서 청과 조선이 밀접하게 접촉하고 첨예하게 갈등하며 만들어낸 변경의 역동성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원제 Ginseng and Borderland)은 청제국의 변경 지배 체제를 청-조선 경계의 역사를 통해 정교하게 조망하여, 전근대 조선을 중국의 반식민지 상태로 여기고 있던 미국 연구자들에게 ‘한국사를 통한 중국사로의 접근’이라는 새로운 해석의 길을 제시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저자인 김선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양국 국경의 역사를 17세기 초에 일어난 변경에서 국경지대로의 전환, 1712년 장백산 조사와 백두산정계비 설치를 통한 경계 설정과 이후 연행로에서 이루어진 국경 무역의 전개, 마지막으로 19세기 후반 청과 조선이 새로운 정치 상황에 직면하면서 광역의 국경지대가 근대 국경선으로 대체되는 과정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청제국은 청-조선 경계를 이용하여 제국 내에서 만주의 특별한 지위를 보호하는 동시에 이 지역 천연자원(동북의 세 보배라고 불린 인삼, 진주, 초피)의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과의 ‘특별한 관계’였다. 저자는 청은 이전의 중화 왕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오히려 티베트·몽골·신강과의 관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조선과 관계를 맺었음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강력한 청제국과 비대칭적 외교 관계 속에서 영토와 주권을 지키려 했던 조선의 노력을 탐구함으로써 청제국의 형성과 발전에서 조선의 역할을 재조명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한 양국이 경계에 대해서는 동일한 결론을 내리도록 이끈 요인이 바로 인삼이었다고 설명한다.

만주와 압록강, 두만강 유역이 여러 민족과 정체성이 공존하던 광역의 변경에서 청과 조선 사이의 면으로 된 국경지대로 변화하고, 다시 그 국경지대에서 근대 국가의 선명한 국경선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종래의 국민국가·민족주의 관점의 역사 해석과는 다른, 보다 더 통합적이고 입체적인 청제국과 조선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중국의 역사공정 시도에 대한 반박 연구로 그치지 않고, 한국 내 만연한 역사 해석과는 다른 각도에서 조선 중기 이후의 사회 변화를 인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제 조선의 기록은 영미권 역사가들에게 청제국 역사 연구의 필수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청조의 한문 및 만문 기록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당대의 실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만문 기록과 조선의 기록을 교차 편집하여 영미권 역사가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당대를 풍성하게 재구성했다.

서술의 핵심 소재로 ‘인삼’을 꺼내들었다는 사실 자체로 이 책은 독특하다. 인삼은 전근대 한반도 국가를 상징하는 핵심 조공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조의 등장 이후 조선은 더 이상 인삼의 주요 생산지인 만주로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황제국인 청이 조선의 인삼 조공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인삼이 조선이 아니라 청(만주)의 상징으로 바뀐 상황은 비상한 흥미를 유발한다. 

1장 「변경에서 국경지대로」는 청­조선 관계의 초기 역사를 다룬다. 2장인 「국경지대의 형성」에서는 만주를 성역화하고 그곳의 자연 자원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장백산을 만주인의 발상지로 가공한 강희 연간의 노력을 확인한다. 3장 「국경지대의 관리」에서는 청 조정의 인삼 전매제가 18세기 동북 변경 및 국경지대의 봉금 정책에 미친 영향을 다룬다. 4장 「사람과 재화의 이동」에서는 양국의 국경지대가 ‘공한지’라는 애초의 목적과 다르게 사람과 재화를 끌어당기게 되고, 청과 조선이 경제 교류하는 장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을 검토한다. 끝으로 5장 「국경지대에서 국경으로」는 19세기 청­조선 경계에 발생한 변화들을 추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