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어떻게 반역을 넘어 폭력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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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어떻게 반역을 넘어 폭력이 되는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2.09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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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과 폭력 | 티펜 사모요 지음 | 류재화 옮김 | 책세상 | 352쪽

 

발터 벤야민은 “번역가는 가장 희귀하고, 어디 비할 데 없는 작가들이기 때문에 문학을 책임 짓는 자들에 번역가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모리스 블랑쇼는 “우리 사회가 번역 및 번역가에게 진 빚이 크면서도, 번역이 무엇인지,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언어 현상과 그 도착적, 파괴적 기제들의 형태에 대해 정작 일반 독자들은 잘 알지 못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읽는 출판물의 대부분은 번역물임에도, 우리 사회는 번역 또는 번역가에 소홀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번역’이라는 행위가 조금 더 간편해질수록 ‘번역’에 담긴 창조성과 폭력성 모두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번역’이라는 행위는 창조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반드시 폭력을 수반한다. 출발어를 도착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의미가 훼손되거나 심지어 언어 그 자체가 소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번역이란 무엇일까? 서로 다른 두 언어를 옮기는 행위의 양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비교문학과 교수이자 번역학자인 저자 티펜 사모요는 이 책에서 최근의 번역 담론을 소개하고, 기존의 관념을 뒤흔드는 색다른 담론을 제시한다.

복수성 및 개방성의 요인이자, 타자에 대한 윤리적 관계의 요인으로 번역을 보는 긍정적 담론이 일반화되면서 번역은 전쟁 또는 갈등의 반대어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로 번역이 지닌 상당한 사유의 힘의 중요 부분이 박탈된 감이 없지 않다. 모든 사고 대상은 차이와 반대에 아무리 완강히 매달리더라도 변증법을 통하면 거의 용해되지 않는 것이 없다. 따라서 번역 언어를 ‘민주적 합의’가 된 어휘 속에 놓는다는 게 역설 없이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놓는’ 것은 모든 갈등을 축소하고 약화하고, 나아가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갈등에는 번역이 이미 들어와 있다. 전반적 정치 담론의 변화를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번역의 전환 윤리는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 간의 차이를 줄인 대가이다. 다소 허위와 기만이 섞여 있는 상호 간의 공감을 대가로 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역설과 난제들을 일부 해체하고 싶어 한다.

오로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하며 생기게 마련인 상실 때문에 부정성을 말하는 건 아니다. 관계의 공간이기도 한 번역은 갈등의 장소이기도 한데, 여러 복수성 형태를 띰으로써 갈등을 어느 정도 해결하기도 한다. 이른바 “길항적 번역”은 길들여진 반목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고통이든 반목이든 번역은 단순한 종합을 인정하지 않고 변증법을 뒤집기까지 하므로 이 잠재성은 이론적으로도 말해 볼 수 있다. 정치적 차원에서 말해본다면, 그 잠재성은 차이를 줄여나가고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것은 실질적이다. 많은 번역가들은 이른바 타자(다른 언어, 다른 저자, 다른 글)와 길항하고 반목하는 대결구도 장면을 익히 알고 있다. 서로 다툴 수밖에 없는 관계성 속에서 흔히 자신의 고유 언어가 약화되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그렇게 무능력하고, 불완전하게, 한마디로 거의 불량상태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오늘날은 번역이 갈 수 있는 여러 길이 안내되어 있으며, 이 길은 복잡하고 산만하다. 그러나 얼마나 역동적인가. 그런데 이 복잡한 길을 통해 결국 동의의 담론에 이르렀고, 관련한 담론의 긴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어디서는 계속 번역이 갈등을 즐긴다. 번역을 두고 하는 논쟁도 있지만, 번역 자체가 곧 논쟁인 것이다. 이런 성찰적 측면을 떠올려보거나 번역의 사유 속에 들어 있는 부정적 힘을 분석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단순히 긍정 담론을 부정 담론으로 뒤집는 문제가 아니다. 번역의 실제 속에서 어떤 모순이 생기는지, 언어의 지배성과 취약성으로 어떤 힘이 생기는지 보자는 것이다. 또한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관계가 어떻게 공동체로 만들어지는지, 또 그들 관계가 어떻게 재형성되는지 보면서 갈등의 차원을 좀 더 체계화 해보자는 것이다.

번역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론가들이 이미 강조한 것처럼 번역의 실제가 핵심이다. 번역을 실제로 해야만 번역이 갖는 저항성을 느낄 수 있고 번역 안에 상존하는 갈등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시적 이성 또는 비이성은 번역적 이성 또는 비이성이 될 수 있다. 시인들을 힘들게 번역하다 보면, 컴퓨터 보조 번역 같은 투명성이 없다. 이 투명성은 곧 폭력성일 수도 있다. 시 번역에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를 통해 더 언어를 작업하는, 그야말로 언어 대 언어의 드잡이가 있을 뿐이다. 

언어에 폭력성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언어는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우선 분리되어 있다. 의미의 복수성은 하나의 풍부한 자산이기 이전에 갈등의 샘물이다. 번역은 죽은 자들을, 죽은 모든 것을 송환하기 위해 바로 이런 폭력과 함께하는 일이다. “재들과 맞서 번역한다.” 파괴의 폭력성에 맞서, 불가피한 소멸에 맞서 번역한다는 의미다. 모든 만남에 내재되어 있는 갈등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며, 번역은 이런 세계의 폭력성을, 그리고 공생하는 삶의 폭력성을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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