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한 삶과 살 수 없는 삶 … 주디스 버틀러와 프레데릭 보름스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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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한 삶과 살 수 없는 삶 … 주디스 버틀러와 프레데릭 보름스의 대화
  • 조현준 경희대·영문학
  • 승인 2023.12.09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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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에세이]

주디스 버틀러는 2023년 10월 19일 <런던 리뷰>에 실린 ’애도의 나침반‘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모든 사람의 죽음에 대한 평등한 애도를 촉구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대규모 폭격과 살상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상대주의나 동등성 논쟁 없이 이스라엘과 가자에서 죽어간 사람들 모두를 조건 없이 애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던진다. 『비폭력의 힘』에서 불가능하지만 필요한 이상으로 ‘평등주의 상상계’를 주장한 것처럼, 지금보다 확장된 애도의 가능성이 평등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평등한 애도의 나침반은 생명의 동등한 애도 가능성을 인정하고, 생명의 상실에 똑같이 분노하며, 죽지 않고 더 살 자격과 삶이 동등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평등의 이상을 말한다. 버틀러는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주의보다는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자유를 지지한다. 비폭력, 평등, 정의 속에서 모든 주민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염원한다. 이런 희망은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고집스레 주장할 필요가 있고, 그런 주장을 위해 시인과 몽상가, 길들여지지 않는 바보, 또한 조직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023년 출간된 <살만한 삶과 살 수 없는 삶>도 급진적 민주주의 맥락의 평등과 자유의 추구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버틀러가 프레데릭 보름스(Frédéric Worms)와 나눈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버틀러는 나와 타자의 동등한 상호 얽힘과 상호의존의 세계에 대한 윤리적 생명 연대 및 정치적 결속을 강조한다. ‘나’라는 주체는 유아 때만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타인에게 의존하므로 '돌봄'은 모성적 주제가 아닌, 모든 사람의 살만한 삶에 필요한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다. 살만한 삶의 상호주관적 조건은 내가 신세를 입고 산 타인의 삶에 대한 의무를 뜻한다. 내 삶은 특정한 계약 없이도 타인의 삶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상가는 2015년부터 공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살기 좋은 삶의 조건을 보장한다는 목적에서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꿀 가능성과 정치적 행동의 새로운 규범에 대해 논의했다. 보름스는 비판적 생명주의 관점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재조명하면서, 생명의 상호의존을 인정하는 인류애가 여러 생명의 평등을 향한 투쟁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 목표는 자유라고 주장한다. 버틀러도 살만한 삶의 조건으로서 자유의 필요성에 동의하며, 모든 생명에 평등한 가치가 있고 그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가치도 평등한 급진적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이 둘은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이 급진적 평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살만한 삶과 살 수 없는 삶의 기준점은 무엇일까? 보름스는 2018년 파리 북부의 난민 캠프를 보면서, 이들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만 살고 있다는 이중성을 말한다. 버틀러가 『비폭력의 힘』에서 삶이 아직 소멸하지 않았기에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사람들이 삶을 요구하고 주장한다고 말했는데 이 부분을 강조한 것이다. 보름스는 살만하다(livable)는 것과 살 수 있다(viable)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는데, 살 수 있다는 것은 순전히 생물학적 의미지만, 살만하다는 것은 생물학적 수준으로 수렴되지 않는 삶의 핵심적 부분이라 말한다. 살만하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 너머의 심리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것이다. 살 수는 있지만 살만하지 않은 사례로는 파괴된 영혼(시몬느 베이유), 사회적 죽음(올란도 패터슨)이 있고, 살만하지 않다는 것은 개인적, 관계적, 혹은 공동체와 관련될 수 있다. 

버틀러는 살만한 삶과 살 수 없는 삶을 구분해야 한다는 보름스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개념적 구분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구분이 어떤 실천과 판단 속에 있는지, 또 이것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식별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버틀러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샤를로트 델보(Charlotte Delbo)를 들어, 살 수 없다는 것이 죽음과 관계를 맺긴 해도 죽음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둘 간에도 차이가 있다. 보름스에게는 돌봄 관계가 살만하지 못한 삶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지만, 버틀러는 지원의 네트워크를 더 강조한다. 보름스는 취약성을 비판하는 입장인 반면, 버틀러는 취약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를 중시한다. 하지만 버틀러와 보름스는 우리가 모두 연대하여 죽음의 힘에 맞서야 한다는 데 있어서는 한마음이다. 나 자신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살만한 삶의 조건을 확립하기 위해서 세계와 생명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상호의존의 생명 연대를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의 살 권리와, 모든 죽음의 애도 받을 권리가 평등하다는 점에서 둘의 급진적 민주주의는 통한다. 

30대에 이미 퀴어 이론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정신분석학과 권력이론의 접합을 시도한 버틀러는 ‘윤리학적 전회’ 이후 여성이나 젠더 소수자만이 아닌, 모든 인간과 모든 소수자의 평등과 자유의 문제를 윤리학과 정치학의 접점으로 삼았다. 이제 60대의 이 철학자는 각종 저널에 기고와 인터뷰를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반 젠더 국가에서 강연하면서 이론과 실천의 네트워크와 연대를 통해 더 나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자신만을 우선시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며 서로 간의 의존과 애착을 인정한다면 더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모두의 삶이 살만하고 모두의 죽음이 애도되는 평등한 세계를 향한 문화번역과 상호연대의 방식으로 메아리치고 있다. 

 

조현준 경희대·영문학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저서로 <개인의 탄생>,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허물기」 읽기>,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역사>, 역서로 <젠더 트러블>, <젠더 허물기>, <쉽게 읽는 주디스 버틀러> 등 다수의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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