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방송, 관영방송, 자영(資營)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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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방송, 관영방송, 자영(資營)방송
  •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 승인 2023.12.04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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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

‘한국방송(KBS)’이 확 달라졌다. 사장 후보가 추천되자, 추천 과정의 절차적 흠결을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더니 일어난 일이다. 방송의 편성은 시청자와의 약속으로 방송국이 일방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놓은 방법과 절차를 따라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신임 사장은 임명과 동시에 몇 프로그램을 없애고 진행자들을 바꿨다. 무엇보다 40여 년 전의 ‘땡전 뉴스’ ―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해설하면, “아홉시를 알립니다 ‘땡’, 뉴스를 시작합니다 ‘전두환...’”을 축약한 것이다 ― 를 재상연함으로써 ‘관영방송’으로서 ‘한국방송’의 지나간 모습을 복원했다. 이것은 국회의 인정 없이 임명된 방송통신위원장의 “공영방송이 각종 특혜를 당연시하면서도 노영방송이라는 이중성으로 정치적 편향성과 가짜뉴스 확산은 물론 국론을 분열시켜왔다. 공영방송의 근본적인 구조 개혁을 선도하겠다”는 취임 선전포고에서 이미 예정한 일이다.

그렇지만 ‘노영방송’, 즉 언론노동자들(또는 노조)이 경영하는 방송이라는 낙인이 사실과 부합하는지부터가 따져볼 일이다. 언론노동자들이 정해진 규칙과 관례에 따라 방송 컨텐츠를 제작하고 송출하는 것을 두고, 공영과 사영(私營)을 막론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므로, ‘노영’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조’가 방송을 경영한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내가 알기로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에는 ‘정파적 입장’이 상이한 복수의 노조가 있으며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들도 많이 있는데 이런 노동자들(또는 노조)이 단일 대오로 방송을 ‘경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 편향성과 가짜뉴스 확산’에 관해서라면, (지난주 사퇴한) 방송통신위원장이 홍보수석일 때 만든 ‘종합편성 방송’의 사례에서 보듯, ‘자영방송’의 폐해가 훨씬 더 광범하고 심대하다. 그럼에도 그가,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가짜뉴스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선고하는 그의 임명자가 자영방송의 ‘무책임한 가짜뉴스 확산과 특정 진영의 정파적 이해 대변’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지목하는 편향성과 가짜뉴스가 그들의 정파적 이익을 손상하고 그들의 입맛에 불편한 방송을 싸잡아 트집 잡는 수사라고 할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 편향성은 누구나 가질 수 있고, 가짜뉴스 확산의 가능성은 공중매체 종사자들 누구나 안고 있으며, 통일된 ‘국론’ 같은 것은 애당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수사야말로 ‘가짜뉴스’이다.

그런데 ‘노영방송이 정치적 편향성과 가짜뉴스 확산은 물론 국론을 분열시켰다’는 수사는 거짓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자극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 수사는 노동자는 정치적 편향성을 가진 열등한 존재이며, 가짜뉴스를 확산하는 사악한 인간이며, 국론을 분열하는 위험한 세력이라는 연상을 동반한다. 위임받은 공적 권력을 집행하는 방송통신위원장이 이런 ‘오명(汚名)’의 수사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것은, 단순히 그와 그의 임명자가 세상일에 무지한 것을 넘어 노동자를 적대의 표적으로 삼고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다.

노동자를 악마화하는 것은 파시즘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다. 파시스트 체제는 노조나 소수자 집단에게 사적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사회적 불안과 갈등의 주동자라는 ‘오명’을 씌움으로써, 이들에 대한 여타의 사회성원들의 피해의식과 불만과 분노를 자극하고 혐오와 적대를 유발한다. 이것은 노조나 소수자 집단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억압하는 것에 더하여 다른 사회 집단들에게 획일적 동조를 압박하고 통제를 강화하는 효과를 수반한다. 그러고 보면, 파시즘은 역사 속에 묻힌 과거가 아니라, 트럼프나 푸틴에서 목격하듯, 세계 곳곳에서 형태와 강약을 달리하며 출몰하여 사회적 차별과 갈등, 자유와 권리의 억압, 심지어 전쟁도 불사하는, 그렇지만 심각한 비용과 여러 상흔을 남기면서 결국에는 퇴출되는 현재이다. 순진한 사람이나 민주주의가 곡절 없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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