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근대 주체, 그 탄생과 죽음에 대한 지성사적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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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근대 주체, 그 탄생과 죽음에 대한 지성사적 탐색”
  • 하상복 국립목포대학교·정치철학
  • 승인 2023.12.03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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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야누스로 그려진 근대: 근대와 주체의 지성사』 (하상복 지음, 서강대학교출판부, 460쪽, 2023.10)

 

서구의 역사적 시기 구분에서 ‘근대’는 중세 이후 혹은 근세 이후에 도래한 시대로 이해되곤 한다. 근대는 무엇보다 역사적 시간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근대pre-modern, 근대modern, 탈근대post-modern, 또는 전통tradition과 근대라는 관계적 개념을 사용할 때가 있는 바, 그럼 여기서도 근대는 시간 개념에 속할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근대는 근대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규정해주는 중심 개념으로 나타난다. 전근대는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은 근대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근대는 전근대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목적론적 개념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근대라는 말 속에는, 마땅히 지녀야 할 근대적인 것들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라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과 근대라는 이분법적 개념에서도 우리는 그와 유사한 의미론적 상황을 만난다. 하나의 독립적 개념으로서 전통은 자신의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화적 실체로 정립되지만, 그것이 근대와 만날 때에는 대단히 부정적인 개념의 세계로 들어온다. 근대의 대비어로서 전통은 과거에 속한 것들을 희구하는 태도로서 퇴행적인 정신의 동의어로 사용되곤 한다.

한편, 탈근대라는 개념은 근대에 대한 부정이거나 초월적 개념으로 성립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용어 역시 접두사 ‘탈’post이 붙은 파생어라는 점에서, 자립적이라기보다는 근대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근대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개념으로서 탈근대에는 여전히 근대적인 것들이 투사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탈근대 논쟁에는 근대의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폐기해야 하는가가 중심 이슈가 되곤 하는 것이다. 역사적 시간의 차원에서 우리는 근대 이후를 현대라고 호명할 수 있지만, 근대라는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를 부를 실체적 개념을 아직까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근대는 단순히 역사를 가를 때 필요한 시간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특정한 가치와 이념을 내포하고 있는 목적론적 개념이며 또한 당위론적 개념이다. 개념의 실천적 세계에서 근대는 오히려 뒤의 의미를 강하게 끌어안으면서 운동해온 것으로 보인다. 역사 속에서 과거의 어떤 세계와도 다른, 독자적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잉태되어 태어나 성장하고 근대의 목적론과 당위론의 위상을 한층 더 강화해나가면서 일반 개념으로 스스로를 정립했다. 근대는 모두가 따라야할 보편적 유토피아가 되었다. 그 이상향에 도달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우열과 위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근대가 도달해야 할 규범적 거울이자 탈근대를 규정짓는 비판적 준거로서 근대는 처음부터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당위와 목적의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17-18세기 유럽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에서 태어난 특수한 개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그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을까? 자기 앞의 시간과 자기 뒤의 시간을 규정하고 나아가 지배하는 독자적 실체로서 근대의 힘과 원리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본질적으로 근대는 완벽함과 완전함을 향한 ‘창조’의 시대였다. 그 창조란 본래 신의 권한에 속하는 것인바, 근대는 절대자적 창조에 도전하고, 시도하고, 도달하려 했다. 그러한 절대자적 의지와 열정으로 이룩된 세계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그 점에서 가히 이상향이라 불릴만했다. 위대한 보편의 세계, 놀랄만한 인공의 세계로서 근대는 과거의 어떤 시대에서도 그에 필적할 만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자기만의 완전함으로 자립했다. 그러므로 근대는 다른 시대의 파생어일 필요가 없는 시공간이었다. 우리는 근대의 그 위대한 창조주를 ‘주체’subject로 부른다. 주체는 절대적 진리의 관념을 보우하고 있음을, 그 관념을 현실 속에 완벽하게 구현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절대자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주체가 이룩해낸 세상은 영원히 낙원으로 남아 있지는 못했다. 에덴의 주인공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비극처럼 근대의 이상적 세계에는 이기적 욕망과 극단적 대결과 파국적 미래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근대를 창조한 주체는 역사와 지성의 법정으로 소환되어야 했다. 심판대 위에서는 주체의 본질과 속성, 탄생과 성장, 빛과 어두움, 미래적 희망과 절망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와 같은 문제 지평 위에서 이 책은 ‘주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서구 근대의 양가성 또는 모순성의 기원과 현상을 추적하려 한다. 이 책의 제목이 『야누스로 그려진 근대』이고 부제가「근대와 주체의 지성사」인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철학자 만하임Karl Mannheim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근대 세계의 창조자로서 주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세계에 대한 기존 관념이나 해석을 불식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사고방식”의 등장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의식철학”으로 명명했다. 그 의식철학의 본질은 의식이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 속에 세계 인식과 형성의 원리를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하임은 그 의식을 주체로 명명한다. 이때의 주체는 세계를 통일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힘이고, 세계에 대한 수동적 감지를 넘어 그것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역량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계와 그 세계를 만나는 주체로서 인간의 관계가 과거와 근본적으로 단절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양 고대 인식론에서 인식 대상으로서 세계는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실체였다. 인간이 세계 안에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직관 또는 이성으로 알아가는 것이 인식론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중세 인식론에서 세계는 신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대상이었고, 인간은 계시를 통해 또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적 능력으로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는 존재였다. 근대는 그러한 인식론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단절하는데, 말하자면 “이제부터 세계는 오로지 주체와 관계한 ‘세계’로서 존재하는 가운데 바로 이 주체의 의식 작용은 세계상을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구성 요인으로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은 근대적 창조의 동력인 그 주체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성장했으며 또 어떻게 변질되어 나갔는가를 역사와 정치 그리고 지식의 무대 위에서 추적한다. 르네상스에서 종교개혁과 자연과학혁명을 지나 근대철학의 긴 시간을 거치면서 태어난 주체는 세계를 자기 내부의 지적 형식으로 인식하려한다. 그리고 그 주체는 정치경제적 근대성이라는 내적 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혁명적 과정, 즉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실천한다. 여기서 근대적 주체는 자연적 제약과 전통적 질서의 구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궁극적 힘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세상의 진리를 알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개조하고 개조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신뢰한 근대적 주체는 계몽, 진리, 선, 이상, 유토피아라는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외부로 투사하면서 전대미문의 새로운 세계인 근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서구의 시공간에서 상상되고 실천되고 완결된 근대 주체의 진리 의지는 그 곳을 넘어 확장되는데, 이른바 비서구 세계 또한 서구 근대의 진리 형식에 맞추어 개조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오리엔탈리즘에는 그러한 정치인식론이 응축되었고, 제국주의는 그 이념의 정치적 발현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의 귀결은 문명적 파국이었다.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과 식민지와 홀로코스트가 그것을 증명한다. 진리 발견이라는 이름 아래 주체가 세계를 자신의 진리로 재구성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정신성을 서구의 비판적 지성들이 폭력의 근원으로 보며 비판적 해석을 시도한 근본적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도적 사상가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odore Adorno의 비판이론과,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과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인류학에서 태동한 프랑스 구조주의 사상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의 사유에 의해 서구 주체는 해방이 아니라 지배의 주체로 재해석되었다. 내부로부터 스스로를 파괴할 모순적 원리를 지닌 존재임을 드러낸 근대적 주체를 그들은 해체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그렇게 근대 주체는 비판되었고 부정되지만, 후설Edmund Husserl에서 정초된 현상학의 지향성과 생활세계 개념은 대안적 주체로서 상호주체inter-subject를 통해 근대의 철학적·정치학적 난국을 돌파할 근거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근대 주체에 대한 상호주체적 해석을 기반으로 의사소통하는 주체라는 새로운 주체 개념을 정립하는 작업으로 그 해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주체의 상상으로 근대 주체의 인식론적·철학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여전히 타자와의 구분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서구 근대성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은 주체의 존재론적 근원으로서 타자라는 반성적 사유를 견인해내고 있다.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의 타자 철학이 그 선구적 시도라 할 것이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의 비극적 출발을 알린 9․11 테러 이후 서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역설적으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사유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던져주고 있다. 

 

하상복 국립목포대학교·정치철학

서강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브뤼셀 자유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파리9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목포대학교에서 문화, 커뮤니케이션, 상징 등을 가르치고 있다. 새로운 관점에서의 근대성 사유, 특히 언어, 문화, 의례와 같은 영역에서 근대성이 어떻게 현상되는지를 다양한 사례 속에서 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권력의 탄생>(2019), <죽은 자의 정치학>(2014),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읽기>(2016)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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