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것을 뒤흔들었던 중세 서유럽의 흑사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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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것을 뒤흔들었던 중세 서유럽의 흑사병 이야기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2.02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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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서유럽의 흑사병: 사상 최악의 감염병과 인간의 일상 | 이상동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SKKUP) | 376쪽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여러 팬데믹(세계적 유행병)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흑사병에 관한 이야기다. 특히 그 영향력이 가장 파괴적이었다고 알려진 중세 서유럽의 사례(1347/8~1351년)에 주목했다. 

저자는 흑사병 창궐이 초래한 중세의 팬데믹과 21세기의 코로나19 팬데믹은 다르면서도 닮아 있다고 언급한다. 시대 맥락 차이로 구체적 내용이야 다르지만, 팬데믹이 인간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 개인과 권력집단이 이에 대응하는 양상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발원지로서 아시아인(중국인)을 향한 적대감은 독극물 음모론으로 유대인을 흑사병 창궐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중세인들의 심리와 다르지 않으며, 채찍질 고행자들의 종교적 신실함과 진실성 여부와는 별개로 교회의 권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해버렸던 중세 교회당국의 처사는 세상을 더 대립적이고 비관용적으로 내모는 작금의 정권 행태와 겹친다. 중세의 흑사병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현대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재성찰하고,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전망해보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책은 크게 종교·심성적 측면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흑사병을 분석한 제1부와 의학사적 관점에서 흑사병을 살펴본 제2부로 구성된다. 저자는 역사시대로 접어든 이후 발생한 첫 번째 팬데믹인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 관한 논의를 시작으로, 채찍질 고행과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고 인구 급감에 따라 노동시장과 환경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등 흑사병이 뒤바꿔놓은 세상의 풍경과 인간의 일상을 폭넓게 들여다본다. 

중세를 지탱하던 교회 권위의 하강과 세속 기득권의 균열 그리고 반복되던 전쟁과 기근 못지않게, 흑사병의 창궐 또한 중세를 파국으로 몰고 간 사태였음을 직시해볼 수 있다. 아울러 흑사병 발생의 원인과 그 예방법 및 치료법을 둘러싼 중세 의학체계의 반응들을 되짚어봄으로써 역병에 대처하는 중세인들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 그리고 엄연한 시대적 한계까지 환기해내고 있다. 

중세 후반기는 긴 전쟁과 반복되는 기근 그리고 흑사병이 야기한 비극들로 시대 이행의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저자는 흑사병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몇몇 파국의 장면들과 인구 급감으로 토대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했던 중세 사회·경제적 환경 변화의 양상들을 폭넓게 되짚어보고 있다.

저자는 서유럽사회에서 흑사병 창궐과 함께 자행된 유대인 학살, 구체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 주목해본다. 특히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음모론의 실체는 무엇이며, 또 이러한 소문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분석한다. 아울러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 계층(급)에 따라 어떤 차이를 드러냈으며, 그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단적 위기가 닥쳐오면 개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도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진다. 평상시라면 그렇지 않았을 광적인 상황들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가 바로 그랬다. 다수의 죽음으로 사회 전체가 공포로 내몰렸고, 사람들은 이에 광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곤 했다. 특히 스스로 채찍질하는 고행이 유행해 세상에 널리 퍼졌다.

1348년 잉글랜드에서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당시 전체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감소했다. 인구의 급감은 노동인구의 감소를 의미하기에 사회·경제적 파장 또한 대단했다. 전과 비교해 노동력의 희소성이 증가하고, 노동자의 선택권과 협상력이 커졌다. 임금 인상은 불가피했고, 노동자의 이탈은 거스를 수 없는 사회현상이 되었다. 사회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자산 손실을 촉발하는 것이었고, 하층민에 대한 인신 구속력이 침해됨으로써 통치적 권위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통제가 필요했다. ‘조례’와 ‘법령’을 제정하는 등 여러 방안을 통해 임금 상승을 억제하고, 노동자 이탈을 저지하며, 노동을 강제하고자 했다. 

흑사병이 당대 의학계에 미친 영향도 컸다. 무엇보다 역병의 원인과 확산에 대한 인식론상의 확대가 눈에 띈다. 흑사병 창궐 이전의 전통적인 의학전통에서는 역병을 ‘미아즈마-체액(체질)론’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1348년 역병은 미아즈마-체액(체질)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희생자가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해명하기 위해 이른바 ‘독 이론’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독 이론을 근거로 흑사병의 예방과 치료에서도 새로운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예방법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6요소’에 토대를 두고 있었지만, 여기에 더해 독 이론을 따르는 약물법이 강조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흑사병은 독성물질이 병인이었기에 이것의 인체 내 활동을 차단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의사들은 이른바 만병통치약으로 유명했던 ‘테리악(theriak)’을 비롯해 하제와 강장제 역할을 하는 여러 약물들을 활용, 독을 제압하거나 체외로 배출시키려 했다. 즉, 이때부터 흑사병 치료에 전통적인 외과술에 더해, 테리악을 포함한 배출형 약물이나 중화제(해독제) 그리고 땀내기 요법과 같은 약물 치료법이 두루 활용되기 시작했다.

흑사병에 대한 의학계의 대응과 인식론의 확장은 세속당국의 의사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의 발생과 확산과 관련해 당대 의사들은 부패했거나 독성 있는 공기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곤 했는데, 이는 부패와 악취의 온상을 제거해 역병을 예방하려는 일종의 공공위생 관련 규제들의 제정과 강제로 이어졌다. 이러한 대처들이 단기적으로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가는 의문이지만, 장기적으로 점차 그 효력을 발휘해나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이 과정에서 왕권이나 도시당국도 행정·통치상의 효율성을 확보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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