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직물이 원제국 등장이라는 위기를 어떤 기회로 승화시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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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직물이 원제국 등장이라는 위기를 어떤 기회로 승화시켰는가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12.02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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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신간 『새로운 직물의 탄생-원제국을 겪은 한반도인의 선택』 발간
- 내부 기술과 외부 자극을 조합, 새로운 직물을 개발하며 발전해 나간 한국 중세 직물의 역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는 원제국, 아랍, 인도 등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새로운 직물을 끊임없이 개발해 냈던 고려 후기∼조선 초 한국인들의 직물 생산과 수출의 역사를 검토한 신간 『새로운 직물의 탄생-원제국을 겪은 한반도인의 선택』(이강한 저)을 펴냈다. 

‘직물’에 초점을 맞춰 한반도의 독자적인 직물 생산, 외부 환경으로 인한 변화, 그리고 고려-조선과 원-명 간의 교역을 고찰한 이 책은 13~15세기 한국 직물의 생산과 수출의 역사는 물론, 당시 한반도의 대외 교류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 내부 기술과 외부의 자극을 조합해 새로운 직물을 개발하며 발전해 나간 한국 중세 직물의 생산과 수출의 역사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고려와 원제국이 공존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한반도 직조업계는 외부 직물의 유입, 그로 인한 국내 직조 환경의 교란, 기존 수출품의 위상 변동 등 녹록지 않은 환경에 직면해 있었다. 이 책은 한반도의 직물이 당시 어떠한 도전에 직면했고, 그런 도전을 고려와 조선인들이 어떤 기회로 발전시켜 나갔는지를 다양한 문헌 기록과 사료를 통해 짚어 본 경제사적 검토이다. 저자인 이강한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시대사 전공)는 고려시대사를 중심으로 원-명/고려-조선이라는 왕조교체기에 양국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 발전해 갔는지에 주목해 온 소장학자다. 

이 책은 2016년 저자가 쓴 『고려의 자기, 원제국과 만나다』에 이은 고려 후기 한중 교류사 후속작이라 할 수 있다. 전작이 ‘도자기’를 주제로 문헌에 담긴 고려 후기 한중 교역의 정황을 다뤘다면, 이번 신간에서는 ‘직물’에 초점을 맞춰 한반도의 독자적인 직물 생산, 외부 환경으로 인한 변화, 그리고 고려-조선과 원-명 간의 교역을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저자는 외부의 자극을 개발과 발전의 동기로 승화시켜 경쟁력과 상품성 높은 직물을 만들어 낸 한국 중세 직물사의 역사를 새롭게 복원하고 있다.


□ 한국과 중국, 유럽 등의 풍부한 사료 활용과 철저한 교차 검토로 한국 중세사 연구의 범위를 확장하고 문헌 연구의 모범 제시

한국 고중세사 연구자들의 큰 애로사항 중 하나는 사료의 부족이다. 고려시대 관련 자료로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가 있지만 당시에 만들어진 사료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나 정리된 전(前) 왕조의 역사이기에 한계가 있다. 또한 이 사료만으로 고려 전체 시기를 조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책은 이러한 사료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려의 역사는 물론 그 주변국과의 관계까지 살펴보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고려와 조선의 사서는 물론이고 동시대를 기록한 중국의 사서와 일본, 미국, 유럽 등의 연구서를 교차 비교함으로써 이미 탁월한 직조기술과 자수문화를 갖추고 있던 고려인들이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게 만들었던 외부의 자극과 변화하던 환경을 밝혔으며, 그에 대응하여 ‘혁신’에 가까운 개발과 발전으로 생존을 모색해 나간 한국 중세 직물사의 실상도 재구성했다.

 

□ 원제국을 경험한 고려인들이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받아 탄생시킨 직문저포와 교직물

이 책 제목에서 ‘탄생’했다고 말하는 새로운 직물은 크게 두 가지이다. 원제국의 출현을 본 고려인들이 제국의 직물로부터 자극과 영감을 받아 탄생시켰던 고려만의 특수 직금(織金)인 ‘직문저포(織紋苧布)’, 그리고 제국의 몰락 와중에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한반도인이 새로이 구축했던 여러 교직물(交織物)이 그것이다.* 직문저포는 13∼15세기 고려에서 만들어진 특수한 직물로, 원제국에서 유행하던 직금(織金) 기술을 적용한 모시(苧布)를 가리킨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뛰어난 직조 기술과 아름다운 자수 문화, 모시 등의 우수한 인피직물 생산 역량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우측 사진은 수덕사 근역성보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직물의 일부를 근접 촬영한 것이다. 이 직물은 고려 충혜왕 대인 1340년경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에 들어있던 불복장 유물 중 하나이다. 주홍색으로 물들인 모시실을 날실과 씨실로 직조한 바탕직물 위에 금박을 얇게 펴 붙인 금사(金絲)로 문양을 짠 ‘직금 모시’이다. 

당시 직금을 만들 때 바탕직물로 비단을 쓴 경우가 가장 많긴 했지만 이렇듯 모시를 쓰기도 했으며, 견사에 모시나 죽(대나무) 섬유를 날실과 씨실로 엮어 짠 특수 교직을 만들어 그 위에 금사나 은사로 장식한 ‘직금 교직’을 만들기도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제국 직금 기술을 고려산 직물이나 견-저 교직물에 적용함으로써 중국인들의 눈에 ‘친숙’하면서도 ‘이채’로운, 차별성과 특수성(상품성)을 극대화한 외국산 특이상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 고려 후기~조선 초 직물에 드러난 한국인의 ‘혁신’ DNA와 대외 수출의 성공을 위한 노력의 역사

중세 한반도는 탁월한 직조 기술, 아름다운 자수문화, 그리고 모시와 마포 등 여러 우수 인피직물의 생산 역량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전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이런 전통은 10세기 이래 고려 사회에서 더욱 번성하였고,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 가기도 했다. 수많은 견직물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고려의 자수문화에 영감을 주었고, 중국 상인들과의 거래 과정에서 한반도의 인피직물이 해외로 다량 수출되었다. 그런데 원제국과 함께 이른바 제국산 ‘직금’이 도래하면서 큰 변혁을 가져왔다. 

여러 경로로 한반도에 대거 유입된 중국산·서역산 직금의 황홀한 자태에 반한 고려인들은 그를 다량 수입해 소비함은 물론, 자체 생산에도 돌입하였다. 다만 여러 금속사를 제작하기 위한 금·은의 확보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바탕직물로서의 양질의 견사 확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한반도산 후발 직금으로 제국의 선진 직금 견직물을 상대하기란 현실적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이에 고려는 기존의 직금과 금사자수 기법을 계속 사용하면서 바탕직물로 견직물 대신 고려만의 새로운 우수 인피직물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또한 직물을 다양하게 교직하여 새로운 직물도 만들었다. 이러한 창출에는 원제국시대 중국뿐 아니라 아랍, 인도, 중국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 거점국에서의 방문 등이 자극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직물의 끊임없는 개발로 점철된 13~15세기 한국 직물의 역사는 제국을 겪은 한반도 선택의 역사, 그리고 내부의 전통과 외부의 영향을 고루 활용한 혁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직물 중 일부는 단명하기도 하고, 일부는 변화한 모습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전통과 외부의 영감을 적극 활용한 당시 직조인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국 중세 직물사의 중요한 유산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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