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연한 이념의 고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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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연한 이념의 고향을 찾아서
  •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23.11.26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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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설정식 ­ 분노의 문학』 (김욱동 지음, 삼인, 400쪽, 2023.11)

 

내가 오원(梧園) 설정식(薛貞植, 1912~1953)에 관한 단행본 저서를 쓰기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활약한 문인들에 관한 일련의 저서를 집필하면서였다. 나는 그동안 일제 강점기에 외국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영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을 써 왔다. 가령 정인섭(鄭寅燮), 이양하(李敭河), 최재서(崔載瑞)에 관해서는 각각 단행본으로 출간하였고, 내가 우스갯소리로 ‘한국 문단의 3김씨’로 부르는 김환태(金煥泰)·김동석(金東錫)·김기림(金起林)에 관해서는 세 사람을 한데 묶어 『비평의 변증법』(이숲출판, 2022)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영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에 유달리 깊은 관심을 기울인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첫째, 나의 전공도 그들처럼 영문학이다. 그들 중에서도 정인섭은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직접 배운 은사였다. 나머지 분들은 안타깝게도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오직 글로써만 만날 수 있었다. 

둘째, 그들은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자칫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외국문학을 전공하였다. 법률을 전공하여 변호사가 되거나 상과를 전공하여 기업가가 될 수 있을 터인데도 그들은 하나같이 ‘실속이 없다’고 할 문학을 전공하였다. 일제강점기는 접어두고라도 21세기도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자녀가 커서 외국문학 연구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부모가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이 이렇게 외국문학을 전공한 것은 일찍이 물질세계 못지않게 정신세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은 하나같이 좁게는 영문학, 더 넓게는 외국문학을 전공하면서 한 순간도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잃지 않았다. 잃기는커녕 오히려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국문학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외국문학 연구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국문학 연구를 위한 발판으로서의 의미가 컸던 것이다. 

 

                        193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기념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설정식.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서 나는 마흔한 살에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파란만장하다면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설정식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하나하나 따라가기보다는 그가 남긴 발자취 중에서 비교적 깊게 파인 곳에 주목하였다. 일제강점기에서 어수선한 해방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겪는 등 20세기 전반기라는 불행한 시대를 살다간 한 지식인의 비극적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찬연한 이념의 고향을 찾아 북으로 간 뒤 남로당계 인사 숙청 과정에서 살아남았더라면 설정식은 아마 한국문학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했을 것이다. 설정식이 추구하던 문학은 ‘진정한 민주주의 민족문학’을 건설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세계문학의 대열에 합류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나는 시인과 소설가와 번역가로서 설정식의 활약과 업적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다. 1930년대 초엽에 발표한 초기 시에서 해방기에 쓴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품을 논의 대상으로 삼되 해방기에 발표한 작품보다는 초기 서정시 쪽에 좀 더 무게를 실었다. 소설 장르에서는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모두 다루었지만 특히 장편소설 『청춘』(1949)에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번역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나는 설정식의 삶과 문학을 다루는 이 책에 ‘분노의 문학’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런데 이 부제는 김기림이 설정식의 두 번째 시집 『포도(葡萄)』(1948)에 관한 서평을 쓰면서 붙인 제목 「분노의 미학」에서 빌려와 조금 바꾼 것이다. 김기림은 설정식의 첫 시집 『종(鐘)』(1947)에서 “그 찬연한 분노와 또 저주의 미(美)”를 발견하였다. 김기림은 두 번째 시집에서도 설정식이 “혼란한 시대의 회오리바람에도 조금치도 현훈(眩暈)을 일으키는 일이 없이” 분노의 미학을 표현했다고 지적하였다. 

          시인 설정식의 30대 모습이다.

이 점에서는 김광균(金光均)도 김기림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설정식의 시에는 “육신과 희망을 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부단한 분노”로 가득 차 있다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설정식은 세 번째 시집 『제신의 분노』(1948)에서 아예 ‘분노’를 중심 주제로 삼았다. 나는 이러한 분노가 비단 설정식의 시뿐 아니라 그의 작품 전체에 관류하는 중심 모티프로 간주하였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이 무렵 다른 작가들보다 한 옥타브쯤 목소리가 높다. 문학가 설정식이 느낀 격양된 목소리와 분노는 어디까지나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해방기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그 나름의 반응이었다. 그는 해방기의 혼란스러운 정국에 “제집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두 번, 세 번 저당으로 넘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술을 부어가며 아름다운 꽃이여, 나비여 하며 음풍여월을 하고” 있는 현실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설정식의 문학관은 《민성(民聲)》에 처음 발표했다가 『포도』에 수록한 「스켓치」라는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비는 또 흙이 기다리는 것으로써 하여금
믿고 내리는 것이
기온이 내려가도 천 리 민심을 아는 것이 
나 홀로 비록 하잘것없이
다못 시(詩)로써 절대를 뚜드리는 도로(徒勞)에 넘어져도
물방울은 하나하나 바위를 쪼았는데
그대 어찌 거연(懅然)히 풍경 뒤에 체어(諦語)하리오

         

설정식은 작게는 시, 넓게는 문학, 더 넓게는 예술로써 절대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한탄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스티븐 스펜더가 한때 “시는 아무것도 일어나게 할 수 없다”고 절망감을 드러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그런데도 설정식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 음풍농월하거나 아름다운 자연 뒤에 숨어 있는 행위는 진리를 왜곡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나는 여러 기관과 여러 사람한테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먼저 구하기 어려운 여러 자료를 구해 준 서강대학교 로욜라도서관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설정식의 막내아들이요 시인인 설희관(薛熙灌) 선생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전기를 다루는 이 책의 1장을 꼼꼼히 읽으면서 틀린 부분을 바로잡아 주셨다. 『설정식 문학전집』(산처럼, 2012)의 편집자인 설희관 선생님은 지금도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전집에서 누락된 선친의 작품을 발굴하여 그의 네이버 블로그 ‘햇살무리’에 꾸준히 올리고 있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 인문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환경문학, 번역학, 수사학, 문학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해 온 인문학자다. 주요 저서로는 《『우라키』와 한국 근대문학》, 《한국문학의 영문학 수용: 1925~1954》, 《번역가의 길》, 《궁핍한 시대의 한국문학: 세계문학을 향한 열망》, 《비평의 변증법: 김환태·김동석·김기림의 문학비평》, 《이양하: 그의 삶과 문학》, 《환경인문학과 인류의 미래》,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외국문학연구회와〈해외문학〉》, 《아메리카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눈솔 정인섭 평전》, 《하퍼 리의 삶과 문학》,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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