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왜 이다지도 변하지 않는가? 변화의 가능성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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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왜 이다지도 변하지 않는가? 변화의 가능성은 있는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1.2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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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 사라 아메드 지음 | 시우 옮김 | 오월의봄 | 568쪽

 

이 책이 제기하고 답하는 질문은 두 가지다. ‘세상의 변화는 왜 이다지도 어려운가?’ ‘그럼에도 변화는 왜 가능한가?’ 저자 사라 아메드는 이 책에서 고통, 증오, 공포, 역겨움, 수치심 등의 감정을 분석하며 우리를 둘러싼 권력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탐구한다. 한마디로 감정은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감정이 어떻게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과 연결되어 차별과 배제를 유발하거나 유지되는지 보여준다. 

아메드는 이렇게 감정을 문화정치의 측면에서 바라보며 세계를 분석한다. 이를테면 백인과 흑인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고착되어 있다. 백인은 흑인을 증오하고,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역겨워하기도 한다. 흑인에게 원래부터 그런 부정적 느낌이 있었던 것처럼 흑인을 탓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규정하기도 한다. 비단 백인과 흑인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보수적 기독교인과 동성애자, 국가와 난민 사이에 흐르는 감정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더 많은 특권을 지닌 주체가 고통, 증오, 공포, 역겨움, 수치심과 같은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타자 탓으로 돌리며 이 사회를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기존 권력구조와 사회 규범은 유지된다. 

사라 아메드가 ‘감정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감정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듯이, 감정의 문화정치는 바로 이러한 역사와 권력구조를 은폐하고, 폭력의 역사를 재생산하는 일을 한다.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 이성애주의 등 폭력에 기초한 세계가 당연한 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우리가 특정 대상, 인종, 문화 등을 대하면 혐오하고, 증오하고, 역겨워하는 감정이 생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은 사회, 정치, 역사와 결부되어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아메드는 오드리 로드와 프란츠 파농이 인종차별을 경험한 사례, 호주의 원주민이 겪은 폭력을 조사한 연구자료, 9·11 테러와 같은 사건을 배경으로 타자를 역겨운 존재로 묘사하는 내용이 담긴 게시물을 분석한다. 이 밖에 정부 보고서, 정치 연설문, 신문 기사 등 다양한 텍스트들이 등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정동 이론, 현상학,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참고하며 ‘감정은 정의와 부정의 문제’라는 성찰을 보여준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참고해 감정을 실체가 아니라 순환을 통한 가치 축적 체계, 즉 ‘정동 경제’로 분석하는 부분은 이 책의 주요 특징이라 할 만하다. 즉 아메드는 감정은 자본처럼 이동하며, 유통 효과로 생산되고, 이런 움직임을 통해 감정이 집단적 몸들의 표면에 물질화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증오의 정동 경제는 증오라는 감정이 여러 사람의 몸을 순환하면서 특정 대상과 집단을 위협적인 존재로 몰아가기도 한다.

정동(affect)은 지난 수년간 인문학계의 핵심 키워드였고, 논쟁의 주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라 아메드는 일반적인 정동 이론가들과 다르게 정동과 감정을 구분하지 않는다. 감정과 정동의 구분은 분석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실제로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메드는 정동 이론가들이 감정을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비판적이며, 감정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사회, 정치와 매개되어 표출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감정은 무엇을 하는가?’를 통해 ‘감정은 어떻게 움직이고 개인과 집단에 달라붙는가?’ ‘감정은 어떻게 세계를 재생산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감정의 문화정치가 하는 구조적 모순을 인지하고 있어도 사회가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권력관계는 집단적인 저항에도 완고하게 지속되는 것일까? 사라 아메드는 그 이유를 ‘투자’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즉 우리가 사회적 규범에 계속 ‘투자’하기 때문에 이 세계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이상과 일치된 삶(‘우리가 아는 모습의 삶’)을 추구하고, 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자본주의, 이성애주의, 국가주의 등을 이상적인 사회 규범으로 여긴다.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다음 세대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간주한다. 이 규범이 유지되도록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감정들을 쉽게 떼어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있을까? 변화의 가능성은 있을까? 사라 아메드가 말하는 대안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 내가 느낀 여러 감정이 다양한 세계를 정의할 수 있다는 것, 분노하고, 고통을 느끼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평범한 것에서 경이를 느끼는 것. 이런 감정적 여정을 밟으면 주체와 집단의 관계가 새롭게 재정립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우리의 미래로 만들기 위해 정치적 행동에 나서는 일에 희망을 걸고 있다. “희망은 우리보다 언제나 앞서 있는 미래를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행동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뿜어내는 감정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왜 우리는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가? 왜 ‘페미니즘’이란 단어만 들어도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내뿜는가? 왜 중국과 북한을 증오하는가? 왜 외국인노동자를 혐오하는가? 이런 감정들이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역사와 사회구조를 되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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