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창궐하는 시대의 서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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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창궐하는 시대의 서사론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1.2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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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의 유혹: 내러티브의 사용과 남용 | 피터 브룩스 지음 | 백준걸 옮김 | 앨피 | 246쪽

 

사실과 진실이 그 뿌리부터 흔들거리는 시대에, 세상이 이야기로 넘쳐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야기’란 그저 망상과 아집과 나르시시즘으로 점철된 나만의 스토리를 말한다. 사실과 분석, 논리와 비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사가 현실을 집어삼켜 버렸다. 세계는 ‘storification’의 포로로 전락했다. 위험 수위에 도달한 서사의 홍수에 직면하여, 과거 이른바 ‘서사적 전환narrative turn’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브룩스는 다시 이야기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다.

이 책은 스토리텔링의 힘과 중요성, 그 반대급부로서의 위험성을 문학부터 법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례를 들어 통찰한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서사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서사를 도구 삼아 의미를 생산한다.” 이야기가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야기와 현실 사이에 놓인 경계가 무너졌을 때이다. 

이야기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경각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스토리가 무분별하게 창궐하는 세상을 비판한다고 해서 브룩스가 이야기 자체를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브룩스는 이야기가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서사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서사를 도구 삼아 의미를 생산한다.”

저자에 따르면, 앎의 기원에 서사가 있다. 어원을 따져보면, 서사의 영어 단어 narrative의 어근 “na-”는 “앎”을 뜻한다. 실제로, 어근 “na-”는 knowledge의 “kno-”와 다르지 않다. 지식의 기원을 탐구한 역사학자 긴즈부르그 역시 사실과 증거들을 서사적 연쇄로 엮음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지식의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가령 원시시대 사냥꾼들은 수많은 흔적들을 기록하고 해석하고 단서들을 이어 붙여 내러티브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사가 지식의 기원이다.

그밖에 저자가 말하는 이야기의 장점을 무수히 많다. 저자는 소설을 프리드리히 실러가 말한 유희충동 Spieltrieb과 연결시킨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 즉 허구를 창작하는 행위는 아이들의 흉내 내기 놀이와 맥을 같이할 뿐만 아니라 그 발생 시기 또한 거의 일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허구와 놀이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창의적으로 세상에 대응할 힘을 얻는다는 점이다. 현실은 무섭고 무자비하다. 놀이와 이야기는 그 속에서 자유의 공간을 창출한다. 이를 통해 호모사피엔스는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를 얻는다.

인간은 또한 이야기를 통해 삶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눈이 아닌 타자의 눈으로 삶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체험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다루는 것은 소설의 서사, 소설에 나타난 스토리다. 새뮤얼 리처드슨부터 윌리엄 포크너, 드니 디드로부터 마르셀 프루스트까지, 이야기로서의 소설이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장 ‘법의 이야기, 법 속의 이야기’는 가장 독창적인 대목으로, 사실과 논증만 허락할 것 같은 법률과 재판이 사실은 어느 분야 못지않게 서사와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음을 갈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주목하고 스토리텔링을 분석하는 법률가들은 매우 드물다. 이야기에 감정과 편견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사가 없는 재판이 있을까? 실제로, 재판은 서사들 간의 다툼이고 충돌이다. 상반되는 서사들이 재판정에서 서로 부딪치며 우위를 가른다. 판결 또한 결국에는 둘 중 어느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가장 이성적일 것으로 믿어지는 세상의 모든 ‘사실들’이 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저자는 인문학이 제공하는 반성적 지식, 즉 경제·윤리·정치의 지배적 서사를 분석하는 작업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공적 영역에서 문학 그리고 인문학의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오늘날 미디어와 기업, 정치 등 현실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서사를 분석하는 과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야기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세상을 통제하는지 이제 막 분석적으로 규명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분석되지 않은 이야기는 신화일 뿐이다.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세상을 거짓되고 총체적인 시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 맞서, 공적인 저항 도구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유해한 신화를 해체하는 방법을 전파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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