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회와 주자학, 그리고 지식인 여성
상태바
조선 사회와 주자학, 그리고 지식인 여성
  • 이남희 원광대·한국사
  • 승인 2023.11.19 01: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저자가 말하다_ 『여성선비와 여중군자: 조선 지식인 여성들의 역사』 (이남희 지음, 다할미디어, 440쪽, 2023.10)

 

필자가 최근에 내놓은 책 『여성선비와 여중군자: 조선 지식인 여성들의 역사』(다할미디어, 2023)는 조선 사회, 주자학, 그리고 지식인 여성이라는 세 측면이 그려내는 사회적 영역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그런 논의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 결론 내지 명제는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로 요약,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 ‘조선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에 대한 비판 

흔히 조선 사회에 대해서 갖는 이미지로는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 등을 들 수 있다. 그와 관련해 부내부천夫乃婦天(남편은 아내의 하늘, 따라서 여인은 남편을 따라야 한다[여필종부女必從夫]), 불경이부不更二夫(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따라서 한 남편을 섬겨야 한다[일부종사一夫從事)]),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열녀가 있다. 여성의 정조와 정절이 유난히도 강조되었다. 열녀문이 그 상징이다. ‘열녀 이데올로기’라 해도 좋겠다.  

하지만 남녀 관계와 역할, 그리고 혼인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삼국시대가 달랐고, 고려사회가 달랐고, 조선시대가 또 달랐다. 조선 오백 년만 하더라도 전기와 후기가 크게 달랐다. 그런 변화 양상은 족보, 호적이나 관습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족보를 보면, 남자를 먼저 적고 여자를 나중에 적는 선남후녀先男後女 원칙이 아니라 아들과 딸을 구별 없이 출생한 순으로 적었다. 재산 상속에서도 아들딸 구분 없이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 제사 역시 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 방식이었다. 딸의 자식, 외손봉사도 가능했다. 

또한 결혼 형태 역시 상당히 달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친영이 아니라 남귀여가혼 내지 서류부가혼으로 불리는 혼인 풍속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가 처갓집으로 장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친영제親迎制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고려시대에는 재가녀라고 해서 사회적 차대나 불이익은 없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일정한 시점까지 양반 가문에서도 재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족보 역시 재가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후부로 기록된 것은 재가한 남편을 가리킨다. 

2) 조선 사회의 주자학적 전환

하지만 ‘조선사회의 주자학적 전환The Neo-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이라 부를 수 있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전환은 왕조 교체를 넘어서 문명사적 전환을 의미한다. 조선의 건국은 역성혁명을 표방했으며, ‘주자학을 위한 혁명’이라 부를 만한 것으로, 동아시아 역사에서 아주 독특한 사례였다. 왕조 교체를 통한 주자학적 전환 시도는 거대한 사회적 패러다임의 교체를 의미한다. 

그 같은 주자학적 전환을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주자학적 습속의 장려와 지원이 필요했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두 개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세종의 『소학小學』 보급과 장려이며, 두 번째는 소혜왕후의 『내훈內訓』 편찬 작업이다.

① 세종의 『소학』 장려와 지원: 세종은 『소학』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널리 보급하고자 했다. 『소학』 강독을 권장했으며,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관련 서적을 구입, 인쇄, 배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소학』 장려와 보급은 엄격한 남녀의 구분,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제 남녀칠세부동석,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의 명제가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교육되기 시작했다. 세종은 『소학』 장려와 친영례의 실행 등을 통해서 조선을 실질적으로 주자학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② 소혜왕후의 『내훈』 편찬 작업: 『내훈』은 유교 문명권 중심부의 성별지식[젠더]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재구성해 문자화한 최초의 문헌에 해당한다. 여성에 의해서, 여성의 교육을 위해서 편찬된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주자학적 여성상을 분명하게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소학』을 가장 많이 참조했으며, 유교 고전에는 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유교적 명제들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따라야 할 이념 원칙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열녀’ 이념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굶어 죽는 것보다 절개를 중시하는 과도한 엄격주의에는 이르지 않았다. 

3) 여성선비[女士]와 여중군자女中君子의 등장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변동과 더불어 다양한 양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반적인 사회의 보수화가 이루어졌으며, 전통적 여성상을 강조하는 교육과 정책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시대에 유행했던 여성들의 책 읽기와 글쓰기 열풍에 힘입어, 그들은 점차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른바 ‘지식인 여성’의 등장이라 해도 좋겠다.  

책 읽기와 글쓰기의 확산을 통해서, 나아가서는 언문을 넘어서 문자를 공부해 한문으로 글쓰기가 가능한 여성이면서, 시문을 넘어서 주자학적 소양까지 갖추고 있던 지식인 여성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식과 학문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여사와는 구별된다. 그들은 ‘좁은 의미’의 여성선비라 할 수 있다.  

여사, 즉 여성선비 개념 이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① 신분이라는 측면. 여성선비는 ‘학인으로서의 사士’의 단계에 해당한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왕비가 그렇다.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의 경우, 궁중에서 가장 높은 어른으로 한시적이나마 ‘치국治國’을 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와 ‘군자’의 관계를 미루어보면, 여중군자는 유학적 세계관 속에서 지극한 목표로 여기는 도덕적 실천 내지 도덕적 인격체의 완성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살다가 간 여성들에 대한 찬사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역시 ‘책 읽기와 글쓰기’다. 그 중에서도  ② 글쓰기가 더 중요하다. 핵심은 문자라 하겠다. 한글 창제 이후 언문과 한문이라는 ‘두 개의 글쓰기’가 가능해졌다. 여성들에게는 주로 언문 글쓰기가 행해졌다. 하지만 한문 글쓰기까지 가능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지식과 학문을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싼 생활세계와 사회에 대해 독자적인 의식을 가지고 비판적인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기도 했으며,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해서 문집을 남기기도 했다. 한문 글쓰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이 책은 여성이기도 한 필자가 조선시대를 공부해오면서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던 물음들과 그에 대해 사안별로 공부해 얻어낸 나름의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과 위상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역사상歷史像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으면 좋겠다. 아울러 조선 후기 지식인 여성들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도 그 평가와 자리매김이 정당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남희 원광대·한국사

원광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잡과입격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여성선비와 여중군자: 조선 지식인 여성들의 역사』(2023), 『언간, 조선시대 한글로 쓴 편지』(2023), 『조선후기 의역주팔세보 연구: 중인의 족보 편찬과 신분 변동』(2021), 『조선시대 언간을 통해 본 왕실 여성의 삶과 생활세계』(2021), 『역사문화학: 디지털시대의 한국사 연구』(2016), 『영조의 과거, 널리 인재를 구하다』(2013),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2008), 『조선후기 잡과중인 연구』(1999), 『조선시대 과거 제도 사전』(공저), Click Into the Hermit Kingdom(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 동양철학의 이해』(1991), 『학문의 제국주의』(2003), 『천황의 나라 일본: 일본의 역사와 천황제』(2006)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