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문학 속의 정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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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학 속의 정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유
  • 박소현 성균관대·비교문학
  • 승인 2023.11.19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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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문학이 정의를 말하다: 동아시아 고전 속 법과 범죄 이야기』 (박소현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544쪽, 2023.10)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의를 향한 대중의 열망이 뜨거운 시대에 산다. 정의를 부르짖는 각양각색의 목소리는 불협화음처럼 들릴지라도 우리가 바라는 민주사회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축적된 수많은 정의론과 웅변적인 구호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바라는 소소한 정의의 가치조차 당장 실현되기 어렵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이다, 법의 권위주의와 형식주의의 장벽은 생각보다 훨씬 견고하며 제도적 변화는 끔찍할 정도로 느리다는 것.

이때 문학은 굳게 닫힌 법의 문을 두드리다 지친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침묵 당한 약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할 때 문학의 저항적이고도 전복적인 언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어떤 인도주의적 원칙이나 강력한 법규도 실현하지 못한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아동이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의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일명 ‘도가니법’은 바로 소설 『도가니』(2009)가 촉발한 사회변화 중 가장 성공적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회의론자들이 문학적 상상력만으로는 폭력적인 사회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법의 추상적 언어에는 무관심한 대중도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 대중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법과 정의 이야기에는 공감한다. 오늘날 대중문화의 꽃이라고 할 만큼 법과 정의의 딜레마를 다룬 다양한 이야기들이 확산하는 현상은 단순히 대중적 기호에 영합한 결과라기보다는 대중이 공유한 정의감에 호소하고 이를 일깨운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법과 문학의 오랜 반목과 상호작용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타난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서구 소설이 추구한 허구적 정의를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 부르며, 그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그녀는 공적인 삶에 있어서 문학적 상상력의 과제는 사회정의로 이어지는 필수적인 가교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우리가 이런 상상력을 함양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가교를 잃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까닭에 그녀는 판사를 비롯한 법률전문가에게 소설 읽기를 권장했다. 누스바움의 문학적 정의 담론은 필자의 『문학이 정의를 말하다: 동아시아 고전 속 법과 범죄 이야기』에 중요한 화두를 제공했다. 이 책에서 필자가 천착한 주제는 바로 동아시아 고전문학 속의 법과 문학적 상상력의 관계다. 

그러나 이 책의 출발점은 동아시아 고전문학에 전개된 정의론 자체라기보다는 중국 공안소설(公案小說)이었다. 공안소설은 명청(明淸) 시대 상업적 출판시장의 발달과 함께 성행한 대중적 범죄소설 장르였다. 16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오래 지속된 이 장르의 인기는 조선과 일본에까지 전파될 정도로 광범위했다. 서구학자가 애초에 이 장르를 서구 탐정소설(detective fiction)과 비교한 시도는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망스럽게도 공안소설에 근대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추리의 서사(narrative)가 부재한 사실의 발견에 그쳤을 뿐, 공안소설이 출현하고 발전한 문화적 맥락에 대한 폭넓은 이해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사실 서구 탐정소설과 중국 공안소설은 별개의 문화적 맥락에서 출현하여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텍스트의 독립적인 서사 질서를 구축했다면, 공안소설은 텍스트 너머 법과 문학의 경계를 탐색하고 그것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이 책에서 중국과 한국의 범죄소설의 사회사와 법문화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대한 영역의 문학사 지도를 그리게 되었고, 그 여정은 끝나기는커녕 아직도 진행 중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잘 정리된 문학사적 서술을 기대한 독자라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책에 서술된 여정은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졸저 『문학이 정의를 말하다』는 중국 공안소설로부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흠흠신서(欽欽新書)』에 이르기까지 이질적인 장르와 텍스트의 역사를 추적한다. 그런데 이 이질적 텍스트들의 연결고리는 바로 법과 문학의 긴밀한 관계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유교적 법문화를 그 배경으로 공유한다. 유교는 예치(禮治) 이념을 내세워 법과 윤리의 긴밀한 상호작용, 즉 법의 도덕성을 추구했으며, 법과 문학의 관계를 대립적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여겼다. 법치 – 유교문화에서 법치는 법의 독단적 지배를 의미한다 – 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유교적 엘리트는 다양한 층위의 법 이야기(legal storytelling)와 정의의 서사가 생산‧전파‧축적되는 것을 허용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민중의 법의식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는 불평등한 신분 질서와 전제적 지배체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공정성의 가치를 중시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현대 법문화의 중요한 역사적 토대를 구성한다. 특히 이 오랜 법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상상하고 열망한 정의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과거의 정의론이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고, 미래에 전개될 정의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이해하고 성찰하는 데 지극히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은 법과 제도의 중심에 항상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예나 지금이나 정의 실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법이나 제도 자체라기보다는,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의 삶이다. 법이 인간의 삶을 다루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 이를 망각할 때 정의로운 법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사실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법과 정의의 이야기이며, 법과 문학의 관계에서 문학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문학 속의 정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유일 것이다. 

필자는 『문학이 정의를 말하다』가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 축적된 법과 범죄, 정의에 관한 담론과 서사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이 주목한 것은 결국 인간다운 삶과 정의로운 사회를 갈망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시간을 거슬러 이념적, 제도적 차이마저 뛰어넘는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필자가 이 책에 소개하고 분석한 텍스트들은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방대한 전통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우리 사회가 정의의 이상을 향해 한걸음 전진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박소현 성균관대·비교문학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중어중문과에서 석사, 미국 미시건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서 한·중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제학술지 Sungkyun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부편집장(Associate Editor)을 역임했다. 동아시아 문학사와 법사학, 여성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저·역서로는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동아시아 연구 어떻게 할 것인가?』(공저), 『능지처참』(역서), 『당음비사』(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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