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대토지소유 해체…조선에서는 소작제 모순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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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대토지소유 해체…조선에서는 소작제 모순 심화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1.19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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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속과 차별: 식민지기 조선과 일본의 지주제 비교사 | 최은진 지음 | 역사비평사 | 624쪽

 

일본과 식민지 조선, 두 지역 모두 메이지민법에 의해 지주적 토지소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었다. 일본 민법의 토지법제는 자본주의의 육성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지주제는 일본 본국의 지주제보다 열악하고 불안정했다. 소작기간과 관련하여 보통 일본에서는 부정기계약이나 계속 소작하는 경우가 많고 정기계약일 경우 3~5년 정도였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지주가 일방적으로 자주 해약하는 부정기계약이 많고 정기계약은 1년 정도로 짧아 소작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소작료는 일본에서는 주로 정조법에 의해 일정액을 수취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보통 훨씬 고율의 타조법으로 징수했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촌락 내 소작료 감면 관행 등이 살아 있었다.

일본에서 대토지소유 해체 경향이 나타나던 중에도 식민지 조선에서는 지주제가 발달하는 상반된 현상이 나타났으며, 조선의 식민지지주제는 일본에 비해 더 열악하고 불안정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심각한 소작 문제가 계속 심화되었다. 일본과 달리 농업 아닌 다른 산업으로 경영의 중심을 옮겨갈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의 지주들은 고율의 소작료 등의 소작경영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했으며, 식민농정은 이를 규제하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조장했다.

식민지 조선의 소작입법 취지는 일본 본국과 차별적이었다. 일본의 소작법안은 비록 그 제정에 실패했으나 개혁 성향의 관료 주도로 고안되어 상대적으로 소작권 보호와 지주제 개혁을 목표로 한 데 반해, 식민지 조선의 조선농지령은 농업증산과 체제안정을 위해 기존의 지주 권익을 보장하면서 입법이 이루어졌다.

조선농지령은 마름 등 소작지 관리자에 대한 규정(신고 의무 등), 소작기간에 대한 규정(최단기간 3년 등), 임대차 계약의 효력(소작권 상속 가능, 등기 없이도 제3자에게 대항 등), 소작료의 감면 조건과 결정(불가항력으로 인해 수확 감소 시 소작료 감면 등), 부·군·도 소작위원회의 소작쟁의 조정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조선농지령의 의의는 소작기간을 최소 3년으로 법제화하는 등 소작권에 대해 어느 정도 규제한 점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농지령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소작쟁의의 핵심 문제인 소작료에 대한 언급이 없어 종전의 고율 소작료가 그대로 인정되었다. 둘째, 마름 등 소작지 관리자의 소극적인 규제로 인해 이들의 횡포가 계속 나타났다. 셋째, 지주가 정당한 사유 외의 이유로 소작인의 소작계약을 해약했을 때 지주가 소작인에게 손해배상 해야 하는 책임이 없었다. 넷째, 소작위원회에 대한 판정 요구는 당사자의 합의로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지주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다.

비록 일본에서 개혁적인 소작법 입법 시도가 좌절되고 그 움직임은 중단되었으나, 소작법안의 ‘경작권 강화’의 방침은 1930년대 초중반에도 소작쟁의 조정에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특히 소작인들의 열악한 경제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각 농촌의 지도원들이 부락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협조체제’하에 나서서 중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소작농은 계속 증가하고 자작농은 계속 감소했으며, 빈농의 증가 현상은 식민지기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지속되었다. 조선농지령이 실시되었어도 1930년대 전 기간과 1940년대 초까지 대지주 수와 그 소유 면적은 증가·유지되었고, 식민지지주제는 확대·유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소작조정령 시행으로 소작조정의 길이 열리면서 소작쟁의는 급증했다. 또한 촌락 유력자의 중재로 소작법의 부재를 보완했던 일본과 달리, 식민지 조선의 소작조정 주체는 거의 행정에 의해 독점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경우 지주와 농민 측의 촌락 유력자에 의한 소작조정을 제도 내에 도입하려는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선농지령은 일본 정치경제를 위해 복무(服務)하면서 농업생산력 증진과 체제안정을 최대 목적으로 했다. 식민당국은 표면상 지주와 소작인의 ‘공존공영’을 통해 농업을 개발한다고 하면서, 식민지지주제를 유지하며 생산력을 증진할 것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만주 침략 이후에 일(日)·선(鮮)·만(滿) 경제블록화의 일환에서 식민지 조선의 농업증산 경제정책 기조를 이어 나가며, 소작쟁의와 농민운동으로부터 체제안정과 농업·농촌의 통제를 도모하고자 했다. 일본의 소작법안이 지주적 토지소유제도에 일정한 제한을 가해 소작권을 보호할 목적으로 입법 추진된 것과는 다른 차별적 취지였으므로, 일본의 소작법안 조항은 조선농지령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농지령이 표방한 진보적 근대성은 표피적 근대화에 불과했으며 이보다 식민성을 더 엿볼 수 있다.

또한 조선농지령은 지주 측의 요구를 중심적으로 반영함에 따라, 소작 문제 해결에 역부족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34년 제정된 조선농지령은 1931년 입법에 실패한 일본의 소작법안과 비교하면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일본의 소작법안이 상대적으로 ‘농민적 입법’으로서 비교적 소작농민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던 데 비해, 조선농지령은 ‘지주적 입법’에 가까웠다. 그나마 조선농지령 시행 이후의 소작실태를 보면 여전히 법제도 밖의 논리가 통용되고 조선농지령의 최소한의 취지도 관철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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