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를 실마리 삼아 서사와 창의성의 관계를 탐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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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를 실마리 삼아 서사와 창의성의 관계를 탐구하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1.19 0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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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꾼과 놀이꾼: 서사와 창의성 | 김상환·김민호·서성은·신정아·양혜림 외 6명 지음 | 이학사 | 462쪽

 

‘서사와 창의성’을 주제로 한 이 책은 ‘서사’와 ‘창의성’을 이어주는 끈으로서 ‘놀이’ 개념을 실마리 삼아 서사와 창의성의 관계를 탐구하고, 철학적·인문학적 관점에서 새로운 창의성의 영역을 발굴한다. 또한 서사적 상상력이 한국의 현대 디지털 문화인 게임, 영화, 웹툰, 트랜스미디어 등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다채로운 논의를 펼친다.

책은 크게 ‘서사 이론’, ‘서사와 창의성’, ‘디지털 문화와 서사적 창의성’이라는 세 주제로 구성되며, 이 세 주제는 ‘놀이’라는 열쇠말로 엮여 서로 교차하고 연결되며 맞물리는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인간은 이야기꾼이나 일꾼이기에 앞서 놀이꾼이다”라는 새로우면서도 대담한 테제를 제시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그동안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서사 이론 ― 하이데거, 데리다, 슈탄젤의 서사 이론 ― 을 발굴하고 소개하며, 구체적인 서사 형식, 특히 이른바 ‘K-콘텐츠’에 천착해서 ‘서사와 창의성’의 문제를 풀어나간다. 

이 책의 핵심의제를 제시하는 서론인 「일꾼과 이야기꾼」에서 김상환은 “이야기의 샘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만날 궁극의 요소는 놀이의 성격을 지닌다”는 가설을 제안한다. 즉 ‘이야기하는 인간(호모 나란스)’이 되기 위한 초월론적 조건이 바로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말하기(플롯)’와 ‘일하기(플랜)’의 공통의 원천인 기투가 바로 놀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나가며 김상환은 칸트, 니체, 하이데거, 가다머, 리오타르 등 다양한 철학자의 놀이에 대한 사유를 독창적으로 전유하면서 ‘놀이 철학의 역사’ 혹은 ‘일반 놀이학’을 내놓는다.

또한 김상환은 「탈근대의 가치와 서사: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다시 읽기」에서 이러한 놀이 개념을 우리 시대를 진단하고 전망하는 핵심으로 확장한다. “탈근대 정신은 놀이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며, 탈근대 지식인은 놀이꾼인 동시에 이야기꾼이라는 말이다.” 그는 탈근대사회가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 즉 하나의 ‘거대서사’가 아니라 무수한 ‘작은 이야기’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회라고 말한다. “탈근대사회의 이미지를 놀이 혹은 게임을 모델로 그려가기를 요구하는 것이 작은 이야기 개념이다.” 놀이는 서사와 만나서 시대를 진단하고 지향점을 제시한다. 이렇게 놀이는 단순한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탈근대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이 책에서는 놀이 개념뿐 아니라 서사 개념도 확장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장태순은 「사물의 서사와 창의성」에서 서사 개념을 확장해서 초연결 시대에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에도 적용될 수 있는 서사가 있음을 밝히며, 서사는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사물에도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사물의 서사적 정체성이 그리는 세계는 시간의 흐름을 견뎌낸 존재자들이 그 속에서 경험을 통해 변모된 모습을 정체성의 핵으로 담지하고 있는 세계이다.” 이렇게 서사의 범위는 인간을 벗어나 사물로 확장된다.

사물에까지 서사 개념을 확장해서 적용하는 또 하나의 글이 「연상호 감독의 SF 영화 〈정이〉에 나타난 포스트휴먼 시대의 서사적 욕망」(신정아·최용호)이다. 이 글은 서사가 시대를 진단하는 리트머스시험지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정체성이 신체의 서사에 기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펼친다. 이 글은 〈정이〉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 시대의 질문이 ‘인격적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고 보고 “향후 공동체의 운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인은 인간과 비인간, 휴먼과 포스트휴먼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라고 짚어낸다. 그리고 〈정이〉를 통해 ‘신체의 서사성’, 즉 “신체의 움직임이 정체성 형성에 개입하는 방식”, “의식의 기억이 아니라 신체의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서사는 사물을 통해서도, 신체를 통해서도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개념을 전개하고 확장한다.

이 책은 〈정이〉뿐만이 아니라 〈던전 앤 드래곤〉, 〈FIFA 온라인〉 같은 온라인 게임, ‘퀘스트’와 ‘상태창’, ‘북부대공’과 ‘사대천왕’이 있는 한국 웹툰의 세계, 엑소와 BTS, 에스파 등의 케이팝, 〈꽃보다 ○○〉, 〈삼시세끼〉, 〈신서유기〉 등으로 대표되는 ‘나영석 유니버스’, 〈서편제〉,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등 이른바 ‘K-콘텐츠’의 구체적인 장르 속에서 ‘서사와 창의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한다.

한혜원은 「디지털 게임의 서사성과 창의성」에서 디지털 게임을 “우리 시대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이자 이야기하는 인간 호모 나란스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융합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정의하고, 호모 루덴스가 주변의 기술과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사회문화적인 패러다임을 반영하여 그 시대의 창의적인 놀이터를 구축함을 보여줌으로써 서사의 허구성과 가상성이 놀이와 창의성을 연결하는 끈임을 확인시켜준다.

양혜림은 「한국 웹툰 서사의 창의성」에서 “장르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새로운 시각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도입”하며 “당연하게 공유되어온 세계 설정에 당연하지 않은 요소를 연결”함으로써 공유되는 세계의 영토를 확장하는 웹툰의 창의성을 이야기한다. 독자가 가치 기준을 설정하는 서사 매체인 웹툰은 게임과 마찬가지로 확장된 서사로서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창의성에서 참여자의 중요성은 이수진의 「‘생생한’ 내러티브의 표현」에서도 강조된다. 이 글은 프랑스의 영화학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이론을 중심으로 영화의 창의성을 ‘생생함’의 개념을 통해서 제시한다.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등을 통해 영화의 창의성이 관습을 벗어난 ‘생생한 표현형식’과, 그러한 표현형식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추론 과정을 거치고 정신에너지를 쏟는 관객의 참여 속에 태어난다고 말하는 이 글은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주체는 우리지만 동시에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시발점은 그 장면”이며, 이러한 “능동과 수동의 얽힘”,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은 것의 얽힘, 의도적인 것과 비의도적인 것의 얽힘, 이해된 것과 이해되지 않은 것의 얽힘”이 영화의 창의성을 빚어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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