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죄 무전유죄 - 정조대 북한산성 환곡 징수인 치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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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 정조대 북한산성 환곡 징수인 치사사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3.11.1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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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 교수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이 당대 탁월한 법률 전문가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정조 연간에 그가 역임한 여러 관직 생활의 경험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산은 1789년(정조 13)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이후 1794년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지방관의 잘잘못을 살펴본 적이 있으며, 1797년에는 황해도 곡산부사로 부임하여 직접 고을민의 분쟁과 관련한 재판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가 승하하기 바로 전해인 1799년에는 요즘으로 치면 법무부 차관급에 해당하는 형조참의라는 중책을 맡았다. 형조참의는 그가 역임한 마지막 관직이었다.

반대 세력의 공격으로 두 달 남짓 짧은 근무로 막을 내렸지만, 다산은 형조참의 시절에 미제사건을 많이 해결하였다. 다산의 능력을 알아본 국왕 정조는 당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던 여러 고을의 의심스러운 옥사를 재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다산에게 특명을 내렸다. 이때 다산이 해결한 사건 중에는 함봉련 옥사가 있었다. 이 사건은 소위 조선판 유전무죄 무전유죄 재판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발단

함봉련 옥사는 북한산성에 위치한 군영(軍營)의 환곡 징수인이 업무 수행 중 폭행을 당하여 치사한 사건으로, 당시 함봉련은 사건의 가해자로 몰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10여 년을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다. 사건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북한산성에는 수도 외곽을 수호하기 위해 총융청(摠戎廳)을 위시한 여러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 군영에서는 군량미를 활용하여 민간에 환곡을 나눠주고 있었는데, 사건은 북한산성에서 파견된 환곡 징수인인 서필흥이 봄에 나누어준 곡식을 가을에 거두기 위해 민간에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북한산성 모습. 『북한지(北漢誌)』에 수록된 북한산성 일대 그림의 일부이다. 화면 우측에 보국사(輔國寺), 중앙 부분에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군영, 좌측에 행궁(行宮)이 보인다. 규장각 소장

당시 서필흥은 경기도 양주 의정리에 사는 토호 김태명 집에 환곡을 독촉하기 위해 방문하던 중이었다. ‘족징(族徵)’이라 해서 친족이 미납한 환곡을 김태명에게서 대신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자 서필흥은 김태명의 집 안에 있던 송아지를 몰고 나왔는데, 마침 김태명이 길에서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다툼이 시작되었다. 말다툼은 결국 싸움으로 비화되었고, 급기야 김태명은 서필흥을 때려눕힌 다음 배 위에 앉아 무릎으로 그의 가슴을 세차게 짓찧기에 이르렀다. 이때 김태명 친척의 머슴이었던 함봉련이 땔나무를 지고 돌아오다 사건을 마주한다. 김태명은 함봉련을 불러 세우고는 자신의 송아지를 빼앗아 가려 했다는 이유로 서필흥을 손 좀 봐주라고 명령한다. 이에 함봉련은 땔나무를 진 채 손으로 서필흥의 등을 밀었고, 밭에 잠시 넘어졌다가 일어난 서필흥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폭행치사 사건으로 비화하다

폭행 시비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면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환곡 징수인 서필흥이 집으로 돌아간 후 갑자기 많은 피를 토하며 죽으면서 이 사건은 폭행치사로 비화한다. 그는 죽기 전 처에게 “나를 죽이려고 한 자는 김태명이니 당신이 꼭 내 원수를 갚아주오.”라는 유언을 남겼고, 결국 서필흥의 처가 한성부 북부로 달려가 고발하면서 이 사건이 관아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서필흥이 죽으면서 남긴 말, 그리고 김태명이 무릎으로 서필흥의 가슴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사실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사건의 주범은 김태명이 명확했다. 하지만 사건은 엉뚱하게 전개되어 갑자기 함봉련이 죄를 뒤집어쓰는 처지가 되었다.

 

『대명률직해』. 화면은 폭행치사 사건의 형률 규정을 수록한 ‘투구(鬪毆)조’ 부분이다. 조선에서는 여러 사람이 구타하여 한 사람이 죽은 경우 주범인 한 사람만 사형에 처하고, 다른 가해자는 감형해 주었다. 하나의 생명에 대해서는 하나의 생명으로 감는다는 인식이었다. 규장각 소장.

요즘의 동장에 해당하는 이임(里任), 그리고 이웃 사람들의 진술을 종합한 한성부 북부 관리는 사망한 서필흥을 검시한 보고서에서 사망자 가슴 부분이 검붉은 빛으로 변한 데다가 딱딱하며 코와 입에서 피가 나온 정황으로 보아 사망 원인이 폭행이라고 판단하면서도 함봉련을 범인으로, 김태명을 목격자로 지목했다. 김태명은 당시 마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토호였고 함봉련은 김태명 족속의 머슴에 불과했으므로 이웃들은 김태명을 비호하고 천한 함봉련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함봉련이 그를 밀어 죽였다고 결론 낸 것이다. 더구나 이웃 대부분이 김태명과 친, 인척 관계로 얽혀 있어 제대로 된 진술이 나오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한성부 관리의 2차 수사 결과도 함봉련을 범인으로 지목한 1차 결과와 동일했다. 결국 이와 같은 내용으로 사건이 중앙에 보고되면서 조정 관리들도 별반 의심 없이 재판을 종결하고자 했다.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려 옥에 수감된 함봉련이 결백을 주장하면서 사건 처리가 완료되지 않은 채 무려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산, 함봉련의 억울함을 풀어주다

다산은 형조 아전을 시켜 이 사건 문안을 가져오게 하여 기록의 반도 읽기 전에 지극히 원통한 옥사임을 직감하였다. 그는 살인 사건을 다룰 때 중요시해야 하는 요소로 사망자 가족의 진술, 변사체 검시 결과, 사건과 관련한 증거 세 가지를 꼽으면서 해당 사건 처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적어 국왕에 보고한다. 

먼저 죽은 서필흥 아내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가해자 김태명과 그를 비호하는 이웃 사람들의 거짓 진술에 휘둘렸다는 것이다. 다산은 서필흥이 죽기 전 자신을 죽게 만든 장본인으로 김태명을 지목했음에도 마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토호 김태명 대신에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미천한 함봉련이 가해자로 둔갑했음을 꼬집었다.

또한 검시 결과 피해자의 가슴 부위 상처가 치명상임을 인지하고도 관리들이 이를 소홀히 다룬 점도 비판했다. 검시관들이 김태명의 무릎에 의해 서필흥이 가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실을 알아냈음에도 함봉련에게 떠밀려 넘어진 부분만 침소봉대하여 문제 삼았음도 지적했다.

 

『심리록』에 수록된 함봉련 옥사. 왼쪽 ‘북부함봉련옥(北部咸奉連獄)이라 적힌 부분부터 시작한다. 참고로 『심리록』에는 사건 처리 과정에 대한 설명이 『흠흠신서』와 조금 차이가 있는데, 이 글에서는 『흠흠신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힌다. 규장각 소장.

국왕은 함봉련 옥사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다산의 문제 제기를 즉각 받아들였다. 정조는 다산의 재수사 결과를 보고받은 당일에 형조에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함봉련을 즉시 형조의 뜰로 데려와 칼과 수갑을 풀어주고 옷을 입혀 무죄 석방하고, 사건의 원래 문안을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이었다. 이처럼 뒤늦게나마 함봉련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준 것은 전적으로 다산의 공이었다. 하지만 미천한 머슴 출신이라는 이유로 함봉련이 십여 년을 살인범으로 몰려 감옥에서 오랜 세월 심한 고초를 겪은 뒤의 일이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함봉련 사건 이후 대략 2백여 년이 흐른 1988년, 지강헌 탈주 사건으로 인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명해졌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이 말에 더해서 검찰 권력의 기득권과 무소불위 행태를 비판하는 “유검무죄 무검유죄”라는 말도 등장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공정과 정의의 실현은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인 것 같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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