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화된 민족주의의 계보를 해부한 독창적 몽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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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화된 민족주의의 계보를 해부한 독창적 몽타주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1.13 0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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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의 계보학: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만든 서사들 | 실라 미요시 야거 지음 | 조고은 옮김 | 나무연필 | 296쪽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는 한국 사회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회자되어온 레토릭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인가? 이는 곧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최근 불거진 '국가 정통성' 논란은 이 질문에 대한 익숙한 변주일 것이다. 

저자 야거는 개화기부터 현대까지의 특정 텍스트를 골라낸 뒤 그것이 어떤 서사로 구축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새롭게 한국 근현대사의 내적 논리를 읽어낸다. 그녀는 이 작업을 위한 방법론으로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채택한다. “수수께끼 같은 형식을 활용하여 충격을 주고 이를 통해 생각을 움직이게 만드는 그림 퍼즐”이라 할 수 있는 몽타주처럼, 여러 텍스트들을 찾아내 그것들을 병치함으로써 그들 간의 연관성을 끌어내는 것이다. 정통 역사학과는 사뭇 다른 방법론을 통해 저자는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강렬한 통찰을 이끌어낸다.야거는 흔히 적대적 이분법으로 나뉘었던 관점들의 내적 논리가 기실 얼마나 유사한지를 섬세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젠더'라는 필터로 한국사를 바라볼 때 새로이 조명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한국사 가운데서 저자가 골라낸 두 인물은 신채호와 이광수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조선’을 딛고 넘어서야만 하는 과제로 인식했다. 조선에 문제가 있었기에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었고 이 땅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에 신채호가 선택한 길은, 조선 시대의 양반을 문약함의 상징으로 규정한 뒤 이들의 존재를 지우면서 한국사 가운데서 강한 무력의 시대와 인물을 조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의 일환으로 그는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등의 전기를 집필한다. 이와 같은 과거에 대한 평가와 재해석에 이어 신채호는 동시대의 국민들에게 나약함을 떨쳐내고 강한 군사력을 함양할 것을 요청한다.

반면에 이광수가 나아간 길은, 신채호에 비하면 좀더 다층적이다. 신채호가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나약한 양반의 모습은, 이광수의 소설에서 식민지 시대의 나약한 지식인 남성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내면이 갈등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결단하지 못하는 남성들과 달리, 이광수가 그려내는 여성들은 고난으로 멍들지만 ‘개화’하여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는 중심에 서기도 한다. 가령 『무정』의 주인공 형식은 자살하려는 자신의 약혼자 영채를 외면하고서 새로운 여성 선형과의 유학을 꿈꾸는 반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기생으로 살아가던 영채는 주변 여성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한 뒤 자기 삶의 의미를 자각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저자는 이를 그저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사랑’이라는 사적인 삶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삶으로 편입되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즉 이광수의 여성 인물들이 보여주는 선택은, 서구의 근대적 개인주의에 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에 대한 투신으로 드러나기에 집단주의적이다. 또한 이렇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통합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삶은 설득력 있는 서사적 힘을 갖게 된다.

한편 해방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필자의 시선이 머문 곳은 박정희와 운동권 학생들, 그리고 전쟁기념관이다. 저자는 그 목적은 다를지언정 근대화에 관한 원칙에 있어서는 신채호와 박정희가 서로 닮아 있음을 조명한다. 신채호가 조선의 양반 문화를 의식적으로 폄하했듯이, 박정희 역시 새마을운동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농촌에 내재되어 있던 전통 문화를 지양한다. 그러면서 신채호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이순신이 갖춘 용맹성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북한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의이자 박정희에 반하는 민주화 세력에 대항하는 담론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대항 담론을 만들어냈던 1980년대의 운동권 학생들은 어떠했을까? 저자는 이들이 이광수의 서사에서 엿보였던 유약한 남성성, 그리고 군부독재의 잘못된 아버지를 넘어서려 했다고 본다. 그러면서 만나게 된 주체사상은 급진성을 품고 있는 듯 보임에도 여전히 혈연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이다. 혁명가의 이상적 모델이 서구에서는 권위적인 부친을 살해하는 아들이라면, 한국에서는 아버지에게 효성을 다하는 아들이 된 것이다. 당대의 운동권 학생들이 강인하면서도 자애롭게 묘사되는 김일성에게 왜 끌렸는지, 그러면서도 서구로부터의 ‘오염’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여성들을 이에 저항하는 주체로 만들려 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논리이다. 또한 이들의 서사 속에서 남북 분단은 남녀의 이별로 표현되는바, 이는 북한을 남한의 적으로 묘사해온 오랜 냉전 수사에 대한 문제제기였으나 이광수의 여성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사랑을 국가의 문제로 환치한 것이기도 했다.

한편 군부독재가 물러간 시대에 대한민국 정부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집약적으로 엿볼 수 있는 공식 기념물로, 야거는 1994년에 개관한 전쟁기념관을 살펴본다. 전쟁과 애국 전사에 관한 전시에서 그녀는 이 계보의 불안정성을 읽어낸다. 달리 말하면 이 불안정성이 잠재되어 있기에 기념물에서는 더더욱 과거사를 영웅적으로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군대와 국민을 단단히 묶어 설명함으로써 무력의 증대와 국가의 부강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는 북한에 대한 남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서사로 이어지는데, 약해 보이는 아우는 북한으로, 그러한 아우를 끌어안은 형은 남한으로 묘사한 〈형제의 상〉 조각상을 통해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남한이 영광스러운 ‘남성적’ 과거를 정당하게 계승했음을 드러낸다고 평한다. 이때 야거는 질문한다. “군사력에 대한 기념비는 과거 군사정권의 폭력적 통치를 상기시키는 대상으로 읽힐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향한 평화로운 이행과 포용의 상징으로 보일까?” 그녀는 〈형제의 상〉에서 상징적으로 엿볼 수 있듯, 화해의 제안조차도 결국 전쟁에 대한 기념을 통해 표현되는 아이러니를 말하고 싶은 듯하다.

이와 같이 한국 근현대사의 국면들을 살펴본 뒤, 에필로그에서는 간략하게 김대중의 남성성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이 분석은 상당히 독특한데, 야거는 과거 한국의 남성성이 무력을 숭상하는 남성성(신채호)이거나 무력한 남성성(이광수) 등이었다면, 김대중의 남성성은 ‘기독교적 용서’에 기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을 용서하기 위해 몇 번이고 일어나는 김대중의 남성성, 이것은 과거 한국이 경유해온 남성성의 계보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차이는 과거 남성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를 참조하고 변용하여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분석에서 단적으로 엿보이는 것은, 저자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오직 이행의 개념으로만 이해하려는 역사 이론에 반기를 든다는 점이다. 즉 역사 진보의 신화를 넘어서, 이에 대한 비판적 전통을 되살림으로써 그녀는 더욱 풍요로우면서도 자유롭게 역사를 해석해낸다. “역사가의 과제는 텍스트, 사건, 이미지의 병치로 드러나는 여러 겹의 의미의 층위를 벗겨내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예상치 못하거나 숨어 있는 연결을 (재)포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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