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와 선비 … 〈한일고금비교론〉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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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와 선비 … 〈한일고금비교론〉 ⑨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3.11.1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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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Inazo Nitobe, Bushido, the Soul of Japan, an Exposition of Japanese Soul (이나조 니토베, 《부시도, 일본의 魂(혼)에 대한 해명》)이라는 책이 1899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저자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다방면의 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내용은 일본의 정신이라고 하는 武士道(부시도)를 설명하고 찬양하는 말을 영어로 능숙하게 구사해 펴놓은 것이다. 

이 책이 영어권에서 많이 읽히고 높이 평가되었다. 막연한 소식을 열거하지 않고, 특이해 확실한 증거를 든다.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한 대학(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 갔다가, 이 사람의 흉상이 있고, 기념 공원을 만들어놓은 것을 보고 놀랐다. 근래에 다시 출판한 것을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이 책을 넉넉하게 사서 공무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 책 일본어 번역판(失內原忠雄 譯, 新渡戶稻造 《武士道》)은 일본 국민의 필독서 노릇을 하면서 일본인의 자부심을 고취해왔다. 1995년에 일본에 가 있을 때 한국인 연장자 교수가 읽어보아야 한다고 권유해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지 않고 일본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다. 영어본과 일어본을 함께 이용하면서 내용을 거론한다.

武士道는 일본의 魂이다. 武士가 ‘義ㆍ勇ㆍ仁ㆍ禮ㆍ誠ㆍ名譽ㆍ克己’ 실행을 道로 삼아, 일본 정신을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것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현란한 표현에 휘둘리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살피면, 참으로 훌륭하다고 내놓은 보물이 유교에서 항상 말하는 덕목 가운데 ‘智’는 빼고, ‘勇ㆍ名譽ㆍ克己’를 보탠 것이다. 

‘智’를 뺀 것은 武士는 文士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탠 것들은 유럽의 기사도에서도 볼 수 있는 군인정신이다. 主君(주군)에 대한 충성이 최고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일본에만 있지 않고, 기사가 명예롭게 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라고 했다. 공통된 근거를 가진 차등론의 가치관을 일본이 특히 잘 보여준다고 했다.

서양에는 없고 일본에만 있는 것은 자세하게 고찰해 호의적인 이해를 구했다. 武士가 자주 하는 切腹(세뿌쿠)라는 이름의 자결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결을 좋지 않게 여기는 통념을 가지고 볼 것은 아니라고 하고, 切腹은 죄과를 인정하고, 과오를 사과하고,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동료를 구출하고, 성실성을 입증하는 정당한 의식이므로 엄숙하게 거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일본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훌륭한 줄 알도록 했다. 

이 책이 서양에서 인기를 얻은 이유를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동아시아를 알고 싶은 호기심을 쉽게 풀어주었다. 동양이 서양보다 낫다고 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안도감을 가지게 했다. 서양에서 차등론의 가치관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일본을 배우자고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일본은 武士가 지배자, 文士는 보조자 노릇을 하는 나라이다. 이른 시기의 文士 菅原眞道(스가와라미찌자네)가 文士는 이해도 대우도 얻지 못해, “履氷不安行”(얼음을 밟고 불안하게 간다), “耳聞誹謗聲”(귀에는 비방하는 소리나 들린다)고 882년에 지은 <博士難>(하카세난)에서 한 말이 계속 타당하다. 武士는 “도덕의 지침이 되기 때문에 유교를 존중했을 따름이고, 사회에 학문적 영향력을 끼친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德川幕府 시절 武士가 학문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 일본은 다른 사회에서처럼 순수한 학문을 존중하지 않은 이유의 하나이다”라고 한 지적이 적절하다. (Chie Nakane et al., ed., Tokugawa Japan, the Social and Economic Antecedents of Modern Japan, 1990)  

한국은 잠깐 동안의 武臣亂(무신난)을 청산하고, 文士가 武士의 횡포를 제어하며 국정을 담당하고 가치관을 확립하는 나라임을 분명하게 했다. 文士라는 말을 줄여 ‘士’라고만 하거나 ‘儒’라고 한다. 고유의 구두어는 ‘선비’이다.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仁義禮智(인의예지), 이 네 덕목을 실행한다는 것이 중국에서 받아들인 전통적인 견해이다. 그런 도리를 현실에 입각해 재검토하고 구체화하고 더욱 분명하게 했다. 

鄭道傳(정도전)은 불교를 배격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선비는 임무와 사명이 대단하다고 했다. “우리 선비의 學은 안의 心身에서 밖의 事物까지, 근원부터 흐름까지 하나로 관통한다”(吾儒之學 自內心身 外而至於事物 自源徂流 一以通貫)고 했다.(<佛氏雜辨>) “心身ㆍ人物’은 ‘마음가짐과 신체활동, 인간관계와 물질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로 관통한’다”는 것은 공통된 원리에 입각해 통괄해 이해한다는 말이다. 

鄭道傳은 “저 선비라는 자가 헌 갓과 낡은 옷차림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뽑고 움츠리면서 겨우 몸을 지키기나 하는”(彼號爲儒者 敝冠羸服 恐恐焉 延縮觀望 僅足以圖保其身)것은 잘못이라고 나무랐다. “의연히 조정에 서서 도리의 경중이 되어야 한다”(毅然立於朝 以爲理道之輕重哉)고 했다. (<送趙生赴擧序>) 선비는 국정을 맡아 수행하는 능력과 자세를 당당하게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국정을 담당하는 官人(관인)이 능력대로 선발되지 않았다. 기득권자들은 사명감을 잃고 안이하게 처신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비판하고 나선 士林(사림)이라고 일컬어지는 선비들은, 이치의 근본을 안에서 찾아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역설했다. 그 선두에 선 趙光祖(조광조)는 鄭道傳과 다른 말을 다음과 같이 했다.

“몸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바르게 할 생각만 하며, 일이 닥치면 감히 피해를 헤아리지 않는 것이 올바른 선비의 마음 씀이다”(不顧其身 惟國是謀 當事敢爲不計禍患者 正士之用心也)고 했다.(<參贊官時啓 2>) 그래서 박해를 받고 죽을 각오를 한다. 국난이 닥치면 의로운 일을 위해 목숨을 바쳐 義兵(의병)도 되고, 烈士(열사)도 되는 것이 당연하다.

선비가 위의 둘만이 아니고, 하나 더 있었다. 官人으로 진출하거나 士林의 도리를 실행하겠다고 할 수 없는 불리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이치를 탐구하고 세상을 바로잡고 하는 선비도 있어 方外之士(방외지사)라고 했다. 法度(법도) 밖을 뜻하는 方外의 선비라는 말이다. 그 선구자 金時習(김시습)이 한 말을 들어보자.

方外之士가 道(도)를 지킴이 독실하지 않고 뜻을 세움이 확고하지 않다면, 굶주림은 내 목숨을 버리기에 알맞고 궁박함은 이 삶을 망가뜨리기에 족할 뿐이다. 어찌 시냇물을 손으로 움켜 마시면서 임금의 부름을 우습게 알고, 명아주 풀을 뜯어 먹으면서 일생이 즐겁다고 만족하겠는가? (<雜著 山林>)

올바른 도리를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서 가난을 참고 견디면서 어떤 타협도 거부한다고 했다. 어디 매이지 않아 무엇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미지의 진실을 찾아 나서서 사상의 방랑을 거듭했다. 사회규범 설정의 원리를 제공하는 정통 유학에 대해서 계속 반발했다. 儒佛道(유불도)의 유산을 제한 없이 활용하면서 발상과 표현에서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창조 작업을 했다. 氣(기)일원론 철학을 개척하고, 자아와 세계가 대등하게 대결하는 소설을 만드는 작업을 중첩시켜 진행했다.

일본의 <武士道>에 상응하는 한국의 <선비론>은 없다. 몇 사람이 시도한 바 있으나 전폭적인 신뢰를 얻지 못한다. 교과서 수준의 저작은 기대하기 어렵다. 선비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두고 심각한 논란이 있어, 논란에 참여하지 않고 이해나 하려고 하면 허상을 잡는다. 《武士道》처럼 《선비론》도 영어로 써서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리려고 한다면, 선비의 외형만 대강 그린 것을 보여주어 매력이 없다는 반응이나 얻을 것이다.

한국의 선비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여럿이 각기 다른 소리를 하면서 논란을 벌인다. 그 가운데 士林의 선비가 받드는 理學(이학)을 비판하고, 그 대안인 氣學(기학)을 方外의 선비가 창조하고자 하는 논란이 특히 치열하다. 理學은 相生(상생)을 지향하고, 氣學에서는 相生이 相克(상극)이고 相克이 相生이다. 

일본의 武士는 절대적인 相克을 위해 자기를 相生의 제물로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한국의 선비는 스스로 결단해 相克이 크면 相生도 큰 가치를 창조하고자 했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은 정체되고, 한국은 역동적인 이유이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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