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간 없이 사유하기』 …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와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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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 없이 사유하기』 …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와 판단
  • 신충식 경희대·현상학
  • 승인 2023.11.06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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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난간 없이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의 정치 에세이』 (한나 아렌트 지음, 신충식 옮김, 문예출판사, 824쪽, 2023.09)

 

최근 사회철학을 전공한 한 원로 철학자와 언쟁이 있었다. 그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너무나 한결같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에 신물이 난다고 했다. 구글을 검색해 보니 “거의 다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하다”며 치를 떨었다. 너도나도 아이히만이라고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악의 평범성이니 무사유니 하는 개념이 공식처럼 따라붙으니 피로감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아렌트의 저작은 정치학, 행정학, 교육학, 젠더, 디아스포라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읽힌다. 아렌트의 저술이 이 시대의 쟁점을 새롭게 해석하고 성찰하는 데 지속적으로 영감을 부여하기 때문이리라. 

이번에 필자가 번역한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아렌트가 1953년부터 서거하기 직전인 1975년까지 여기저기 남긴 논문, 강연, 서평, 대담 등을 총망라한 저작이다. 총 42편의 에세이가 담겨 있는 데다가 지금까지 출간된 아렌트 번역서 중에서 가장 두툼하기에(824쪽)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아렌트 본연의 입장을 들여다보기 좋을 듯하다. 아렌트의 제자였던 제롬 콘이 시기별로 이 모든 글을 정리했는데 이 중 26편은 다양한 지면에 실렸던 것이고, 나머지 16편은 처음 출간된 것이다. 이 글들을 통해서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와 정치적 판단의 전모를 파악할 수도 있을 테고, 각기 독립된 글이니만큼 주제에 따라서 그 어느 글을 읽더라도 무방하리라 본다. 

젊은 시절 아렌트는 정치와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현상학 창시자인 후설, “사유의 왕국에서 숨은 왕”이라 불렸던 하이데거, 독일의 양심이라 일컬어지는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은 순수 철학도였다.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관심은 1931년 무렵(25세) 나치가 정권을 탈취하리라는 확신에서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신문을 꼼꼼히 챙겨 읽게 되었다. 아렌트가 정치적으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불법 체포가 자행되었던 밤이었다. 이때부터 유대인은 게슈타포의 지하 감옥이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아렌트는 나치가 정권을 탈취한 직후인 1933년 봄 베를린에 있는 프러시아 국립도서관에서 독일 시오니스트 단체에 건네주려고 반유대주의 자료를 검색하다가 체포되었다. 아렌트의 아파트는 압수수색 당했고 그녀와 어머니는 잠시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여행 서류를 꾸릴 경황도 없이 체코슬로바키아와 제네바를 거쳐 파리에 정착했다. 

아렌트는 8년 동안 파리에 머물면서도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젊은 유대인 망명자들에게 미래를 대비하도록 농업과 수공업 기술, 유대인 역사, 시온주의,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1941년 파리마저 나치 치하에 들어가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1941년 5월에 남편 블뤼허와 비자를 받아 간신히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10년간이나 더 무국적자로 지내야만 했다. 

필자는 옮긴이의 번역이 잘 읽히기를 바라면서 『난간 없이 사유하기』를 어떤 점에 착안해서 읽으면 좋을지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아렌트는 짧은 시간 안에 미국에서의 적응 기간을 마치고 자신이 다섯 번째로 터득한 언어인 영어로 20세기의 가장 충격적인 정치 현상인 전체주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51년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전체주의의 기원』을 펴냈다. 그녀에게 전체주의의 지배는 기존의 통치양식과 전혀 다른 형태였다. 지난 2,500년 사이에 처음으로 등장한 정부 형태가 전체주의였다. 무엇보다 전체주의 정권은 계급을 ‘대중(mass)’으로 전환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에 고립된 대중은 지극한 공포의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한마디로 전체주의적 파국은 세계를 사막화한다. 더 큰 위험은 사막에는 모래폭풍이 있어서 묘지처럼 절대 고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모든 정당 체제도 대중운동으로 대체되면서 권력은 군대가 아닌 경찰로 넘어가게 된다. 

아렌트 분석의 가장 큰 기여는 당시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진정한 형태가 전체주의임을 밝혔다는 점이다. 더욱이 새로운 정치적 사유의 가능성을 위해 통치, 권위, 권력, 법, 전쟁 등과 같은 전통적 개념 틀과 범주들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곧 이 책의 편집자가 제목으로 차용한 ‘난간 없이 사유하기’다. 

아렌트는 대담에서 ‘난간 없이 사유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근거 없는 사유’라고 말했지요. 저는 그렇게 잔인하지 않은 은유를 하나 갖고 있는데, 출간한 적은 없지만 저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를 ‘난간 없는 사유’라고 부릅니다. 독일어로 ‘덴켄 오네 겔랜더(Denken ohne Geländer)’입니다. 즉, 여러분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난간을 붙잡을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 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제가 저 자신에게 이 난간을 말하는 방식이죠.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제가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아렌트는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철학자로 불리기보다 ‘정치이론가’이길 원했다. “철학으로 인해 ‘흐려지지 않은(unclouded)’ 눈으로 정치를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철학자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자신이 사는 세계가 어찌 됐든 고독을 작업 조건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정치적 사유를 형이상학에서 시작할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모든 다리가 끊겼어도 “개념의 무지개다리”를 건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안을 강구해야 하는가? 아렌트는 기본적으로 사유 활동에 자체의 ‘재귀적’ 성격이 있다고 본다. 인간은 예외 없이 의식에 내재한 ‘이원성, 즉 나와 나 자신의 이원성’을 보인다. 사유하는 행위자는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지 않고서는 활동적일 수 없다. 재귀적 과정으로서의 사유는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것에서 물러남으로써 시작한다. 무릇 사유 활동은 나타남의 세계, 감각기관을 통해 주어진 무엇, 공통감에 기반을 둔 실재성의 감각으로부터의 물러남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의도적인 물러남이 세계로부터의 완전한 물러남이라기보다는 다만 감각들에 현전하는 세계로부터의 물러남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유는 ‘공동 나타남(common appearing)’으로부터의 물러남이다. 사유가 어떤 현안에 구속될 수밖에 없지만, 사유의 방향성은 세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의 본령은 인간이 아닌 세계, 아니 더 나은 세계의 존속에 있다. 도대체 그녀의 사유 영역에서 세계란 무엇인가? 간단히 표현하자면 세계는 인간이 함께 모이는 곳마다 그들 사이에 나타나는 사이-공간이자 “정치영역”이다. 따라서 세계는 자연과 달리 인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관건은 ‘세계 내의 불후성(immortality in the world)’이다. 인간은 가도 세계는 영속해야 한다. 우리 애국가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세계는 영속한다. 그런데 세계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즉 세계는 영속하지 않는다. 작업(work) 활동을 통해서 이룩한 도시와 같은 인공물의 세계는 강제력이 아닌 언어에 바탕을 둔 행위를 통해서 전승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어떤 강제력으로부터 발생하지도 않으며, 동시에 이 내재적 운명은 강제력으로 괴멸되지도 않는다. 

 

                                                   Hannah Arendt and Martin Heidegger
                                                   Hannah Arendt and Martin Heidegger

인간의 직접적인 공동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현상의 공간인 세계는 이른바 모든 형식적 공론영역, 다양한 정부 형태, 조직적인 공론영역에 선행한다. 결국 세계-내-인간 조건의 핵심은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의 세계다. 정치적인 것은 곧 세계에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스승 하이데거의 세계 개념이 철학자의 “관조적 삶”을 우위에 두는 데 반해서 아렌트는 “정치적 삶”을 더 우위에 두었다. 

이렇듯 아렌트에게 사유와 세계성은 인간의 조건에 필수적이다. 사유는 인간이 단지 자기 필요나 보살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를 떠나서는 기능할 수 없는 정신이다. 필자는 이 저작에 실린 여러 글과 대담에서 사유와 세계의 상호 연관성을 정치적 사유와 정치적 판단의 관계에서 규명하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렌트 정치사상의 궁극적 관심은 정치적 사유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있다. 양자의 차이점은 사유가 부재의 영역인 비가시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고, 판단이 항상 특수한 것들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유의 시제는 현재이며 “내 앞에 던지는 것(ob-ject)”인 반면에, 판단의 시제는 과거이며 “뒤를 비추는 일(re-flect)”이다. 

아렌트의 정치적 판단의 중요성을 파악하기 위해 판단을 세계성의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아렌트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상력이 곧 “유일한 내부 나침반”이라고 한다. 아렌트에게 상상력은 곧 타인의 입장에 서볼 수 있는 ‘확장된 사유방식’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정치적 사유양식이다. 이때 상상력을 위한 닻은 세계의 세계성(Weltlichkeit der Welt)이어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계성은 아름다움의 영역이다. 아름다움은 최소의 유용성에 최대의 세계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어떤 개념 없이도 나 자신과 타인 사이에 조화로울 수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두고 이를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어도 일반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지 않는가! 이처럼 아름다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아렌트가 말하는 본래적 판단이다. 

이러한 이유로 문화와 정치는 연대한다. 관건은 지식이나 진리가 아닌 판단과 결정, 공적 생활의 영역과 공동세계를 두고 이루어지는 분별 있는 의견교환이다. 거기서 어떤 행위방식이 취해질 수 있는지, 그 영역과 세계가 장차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 거기서 어떤 유형의 사안이 나타나야 하는지 등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 별난 능력을 최초로 자각한 사상가로 키케로를 꼽는다. 키케로는 “무지한 군중”이 웅변가의 대단히 정교한 수사 장치들을 곧잘 받아들여 설득되는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판단에 “결코 주관적일 수 없는 토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분명 세계의 세계성과 무관하지 않다. 모든 판단은 세계 내에서 특정 입장을 갖는 주관성에서 비롯하지만 동시에 이는 모두가 자기 자신의 입장이 있는 세계가 객관적 사실이자 우리가 공유하는 무엇임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인간이 가진 최고의 분별 감각인 취미(taste)가 작용한다. 물론 취미판단이 곧 정치적 판단일 수는 없지만, 양자의 판단이 어떤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판단의 타당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아렌트는 정치적 판단을 위한 타당성이 복수의 인간 내에 있는 관찰자 자신의 공통감(sensus communis)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획득된다고 본다. 당연히 이 모든 과정은 인간 간의 상호소통과 무관하지 않다. 소통을 통해 형성된 공통감으로 우리는 공동체 성원이 되고, 사적 오감으로 주어진 일들을 두고 소통하게 된다. 

지금까지 논의한 판단은 규정적 판단이나 인지적 판단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이다. 이는 한마디로 특수자들을 일반 규칙하에 두지 않고서도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다. 반성적 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 인간의 인지적 측면은 중요하지 않다. 특수자를 특수자로 다루는 최고의 정신역량인 판단력은 정치적인 것의 지평에서 발현된다. 

이에 반해서 자유가 선-정치적이라 할 사회적인 영역에 위치할 때 정부는 권력과 폭력을 독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내에서 사물들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판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능하며 특질에 바탕을 두고 구별하는 취미 역량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미각과 후각이 본래 식용 가능한 음식과 독성 물질을 구별하기 위해서 발달했듯이 정치인의 판단역량도 기본적으로 오감을 아우르며 미를 분별할 수 있는 취미판단에서 비롯한다. 결국 정치적인 것이 자유를 전제하는 데 반해서, 정치적인 것의 점진적 소멸은 판단의 쇠퇴를 가져온다. 그러기에 정치적인 것은 문화적인 것의 미, 정치적으로 표출된 지속성, 세계의 잠재적 불후성이 스스로 드러내는 광채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신충식 경희대·현상학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한나 아렌트가 강의했던 뉴욕의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철학과에서 시간 현상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한국현상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인문중핵교과를 담당하고 있으며, 인류사회재건연구원 부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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