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으로 만난 조선과 청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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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으로 만난 조선과 청 문명
  • 정재훈 경북대·한국사
  • 승인 2023.11.06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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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18세기 조선이 만난 문명』 (정재훈 엮고 주해, 그물, 480쪽, 2023.10)

 

18세기 조선은 연행록의 황금시대이다. 이전까지 주로 시로 기록되던 연행이 산문으로 상세하게 변화한 청을 설명하고 있다. 반복되는 연행의 장소를 연행록과 연행록으로 비교하고 연행록으로 연행록을 해설하였다.

본서에서 시도한 비교의 방법은 개별 연행록에서 놓치기 쉬운 18세기의 맥락에 관해, 특히 18세기 전후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시도한 것이다. 연행록을 연행록으로 주해할 수 없을까 하는 의도에서 18세기의 연행록을 모으고 번역하고 주해하였다.

물론 18세기의 전기와 후기에서도 늘 연행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과 변화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홍대용이나 박지원의 경우 연행을 통해 종래의 구태의연한 화이론을 탈피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박지원은 연행에서 청을 오랑캐로 이해하며 사(士)의 입장을 전제하고 문제해결을 시도하였다. 18세기의 조선은 하나의 문명국으로서 성리학에 입각한 자존의 문명을 만들었다. 세계 최강의 문명을 자랑하는 청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면서, 북벌이 아닌 북학으로의 긴 여정을 만들어 나간 조선의 길을 되돌아본다.

연행이 조선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만 18세기의 전반기에는 조선문화에 대한 자신감 속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요소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그에 비해 18세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더욱 적극적으로 청의 실체와 문화를 인정하면서 구체적으로 청문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북학(北學)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왕인 정조(正祖)의 경우에도 연행을 통한 새로운 정보의 유입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정조 13년(1789)의 동지사행에 이미 정해진 화원(畵員) 외에 당대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金弘道)와 이명기(李命基)를 파견하여 연행의 주요한 곳을 그려오게 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얻어진 연행도(燕行圖)에는 벽돌로 만들어진 산해관 외성이나 북경성의 동문인 조양문이 그려져 있어 당시 새로 건설될 예정이었던 화성(華城)의 모델로서 유용하게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 건륭제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태학(太學)의 벽옹(辟雍)을 그려오게 한 것 역시 유교적 이상군주인 군사(君師)를 추구하였던 정조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을 확인하게 해 준다.

고대 벽옹의 원모습을 복원한 것은 1783년(건륭 48) 2월 14일 건륭제가 친제(親祭)를 행하고 벽옹을 지을 것을 명하고 나서 이듬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때 건륭제가 벽옹을 짓도록 한 이유는 건륭이 등극한 지 5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태학에 가서 석전제(釋奠祭)를 행하고 벽옹에서 학문을 강론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식은 건륭제가 지향하였던 정치가 유교정치에서 이상적으로 추구하였던 왕통과 도통의 일치, 즉 성인(聖人)에 의한 정치, 요순정치를 자신이 실현한다는 것을 내외적으로 과시하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조는 건륭제의 이러한 행적을 연행사들의 보고를 통해 그 실상을 자세하게 파악하였으며, 이후 치러지는 행사에서 많은 참고를 하였다. 곧 정조가 1795년 을묘년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연을 화성(華城)에서 치르는 과정을 보면 건륭제의 즉위 50주년 행사를 적지 않게 참고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건륭제가 기로(耆老)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석전제(釋奠祭)를 행하고 벽옹에 친림하여 학문을 강론한 것을 모델로 삼아서 정조 역시 화성에 가서 행궁의 봉수당(奉壽堂)에서 혜경궁에게 진찬(進饌) 의례를 행한 다음 날에 낙남헌(洛南軒)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다. 또 화성의 문선왕묘(文宣王廟)에 가서 알성의(謁聖儀)를 행하였는데, 이 의례는 화성의 행궁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행하는 의례였다. 이 의례를 위해 1795년 5월에 정조는 화성의 문선왕묘를 전면적으로 개축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현상을 염두에 둔다면 북경의 태학의 모습을 그린 것은 의례적인 최고 학부로서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건륭제가 추구한 군사(君師) 일체로서의 제왕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의미에서 건축된 벽옹의 모습을 그린 것이며 이는 조선의 정조가 깊이 참고하는 의미가 있었다.

연행의 정보를 활용하여 만든 궁궐 정전 앞 조정(朝廷) 품계석(品階石) 역시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과 관련하여 특기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이 의례에 참여할 때 우리 사신들이 품석(品石)에 따라 서 있었던 점이다. 이 품석(品石)은 품패석(品牌石) 또는 품계석으로 불리는 것으로 사실 조선에서는 정조(正祖) 이전에는 없었다.

품계석을 정조 1년에 설치하였던 것은 중원의 예를 단순하게 수용한 것이 아니라 정조의 새로운 정국 구상을 실현하는 방편의 일환이었다. 더구나 청나라에서는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의 품석을 설치한 것에 비해 창덕궁의 인정전 조정에는 정1품에서 종3품까지는 정종(正從)에 맞추어 문무반 각 6개씩의 품계석이, 정4품에서 정9품까지는 정품에 해당하는 문무반 각 6개씩으로 모두 24개의 품계석이 설치되어 중국에 비해 차이가 있었다.

이상의 점을 염두에 둔다면 18세기 조선과 청에서 정조와 건륭제의 유사성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였던 청과 또 이와 유사한 역사 전개를 하였던 조선은 당시 유럽에서 근대로 가던 또 다른 길을 걷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정재훈 경북대·한국사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 전기에 유교정치사상이 어떻게 이해, 수용되고 자기화하였는지를 검토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조선의 사상과 문화의 정체성과 특성, 동아시아에서의 위상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은 「조선전기 유교정치사상연구」, 「조선시대의 학파와 사상」, 「조선의 국왕과 의례」, 「조선 국왕의 상징」 등과 다수의 공저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동호문답」, 「동사」(공역), 「대학연의(상)」, 「대학연의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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