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일본’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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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일본’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가?
  • 유불란 서울대·정치학
  • 승인 2023.11.0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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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방편’으로서의 한일관계를 넘어서: 혐오와 야합의 시대, 성신지교(誠身之交) 다시 돌아보기』 (유불란 지음, 논형, 200쪽, 2023.09)

 

‘극일(克日)’이란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요.

얼핏, 고민할 것이 무어냐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시합에서든 일본과 맞닥트리면 으레 뉴스 헤드라인으로 달리듯, 저들을 이기자는 소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해당 표현은 비단 한일전 스포츠 경기에서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는 분야를 찾기가 더 힘들 만큼 두루 쓰이고 있는 터입니다. 그리고 개중 적지 않은 경우에서, 그런 일본을 ‘이긴다’, 혹은 ‘극복하다’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설명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예를 들어, 이하의 「극일의 길, 떳떳한 한국인이 되자」처럼 어느 유명 일간지 제1면 헤드라인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하겠지요. 

 

그들(일본)의 관심사 중 하나는 한국에서 성장하는 식민 이후 세대들의 양적 팽창이었다. 이들은 적어도 일본이 물리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세대들이었으며, 자주적 의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세대들이었다. 저들은 크게는 한국인 전체, 작게는 식민 이후 세대들의 의식의 깊이를 재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교과서 왜곡은 역사적 필연성에서 볼 때 저들이 띄어 본 제2의 운요호(雲揚號) 사건인 것이다. 우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매의 아픔을 느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중략) 만일 한국인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분연히 일어서 과거 피식민 세력으로서의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한민족으로서의 긍지를 되찾아가는 탈외세적 자세를 정립한다면, 일본은 분명 우리를 재평가할 것이다. (조선일보 1982. 08/29)


해당 기사가 작성된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한일관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82년의 이른바 일본 교과서 왜곡 사태였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상기 기사의 논자는 제목에서처럼 문제를 일으킨 일본 쪽이 아니라 오히려 당하고 있는 이편 우리들의 반성과 분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바깥으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그 자극만큼만 반응하는 “피동적 자세”에 안주해서도, 용어상 ‘극일’이 구체적으로 일본을 지목하고 있되 그에만 한정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저 “소극적인 극기”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의 “민족적 국가 목표”를 설정하는 “대승적 자기 발견”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대체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바로 하루 전에 또 다른 유명 일간지는 이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일본과의 「경쟁심을 통한 선진화 운동」이 필요하기에, 라고.   

 

그것은 편견이나 굴절된 감정을 원색적으로 터뜨리는 ‘배일(排日)’도 아니며 격앙된 목소리로 일본을 성토하는 ‘항일’도 아니다. 극일은 문자 그대로 우리 의식 속에 잠재돼 있을지도 모를 일본 콤플렉스를 극복하자는 것이며, 우리의 힘을 길러 일본을 능가하자는 선진화 운동이다. 그리고 한, 일 두 나라 사이의 전통적인 경쟁심을 발전의 계기로 전환 시키는 운동[이다.] (경향신문 1982. 08/ 28)  

 

이처럼 그 시절 한국 사회에게 일본은, 그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주체를 지탱하는 원대한 민족적 목표”를 설정하기 위한 자기 모색의 ‘출발점’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즉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극일이란, 실은 근대화라는 진짜 목표 쪽으로 사람들을 매진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겠지요. 특히나 그즈음 어느 신문에서 솔직하게 시인하였듯, 이만한 “국민적 감정분출”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국민 에너지의 ‘집열 현상’”이라는 점에서 그냥 지나쳐 버릴 순 없다던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일본이 갖던 이 같은 우리 사회에서의 특별한 함의는 비단 7, 80년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느 연구자의 표현을 빌자면, 임진전쟁 이래 일본을 향한 ‘원수의식’은 우리 사회에서 DNA처럼 고착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만, 개화기를 전후한 시기부터는 이러한 일종의 주적 개념 위에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비춰주는 ‘거울’로서의 새로운 함의가 더해지면서, ‘원수/교사’로서의 한국 사회 특유의 모순된 일본상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긴 호흡에서, 그러니까 非서구 후발주자들의 ‘근대화’라고 하는 사상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이즈음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일본 부정은 결국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지난 한 세기 반에 걸쳐 일본을 매개로 사고해 왔던 식의 근대화 모색이, 그런 시대정신이 마침내 우리 사회에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팬데믹 후 한국은, 흔히 일컬어지듯 코로나 이후 세상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에서의 격변 이상으로, 조선-한국적 근대의 모색이라는 우리 자신의 맥락에서 이제 전혀 새로운 시대로 넘어간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K-방역이나 K-POP에서의 성과를 매개로 우리 사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낙관적인 분위기가 퍼져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른바 선진국 반열에 들게 되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어찌 됐든 간에 이 자부심을 바탕삼아 개화기 이래 우리 선배들이 그토록 절절하게 되뇌던 일본에 대한 ‘부러움’과 ‘열패감’에서 이제 전반적으로 벗어나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일본을 방편 삼아 우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든다는 데 있습니다. ‘일본은 없다’, 즉 이러저러한 측면에서 저들이 이제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곧 우리가 선진국임을 증명해 주진 않는다는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우리는 과연 근 150여 년에 걸쳐 계속되어 온 ‘일본의 세기’, 즉 저들 식의 근대화를 시대정신처럼 삼아 왔던 세상이 종언을 고하고 있는 이때, 일본을 언급하지 않고서 스스로가 오늘 어디쯤 어떻게 서 있는지, 그리고 이제부터는 어디로 향하면 좋을지를 나의 언어로 설명해 낼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우선 그간 우리 사고를 좌우하다시피 해 온 저 ‘방편으로서의 일본’이라는 옛 주박부터 해체해야 할 터입니다. 

본서는 그러한 ‘방편적 사고’를 분석하기 위한 길라잡이로서, 개화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양국 관계에서 되풀이 되어온 패턴화된 사고 경향과 거기서 비롯된 일련의 전형적인 행태들을 추적하였습니다. 관련해서 일본 측,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과의 교섭을 전담하고 있던 쓰시마 측이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서양 세력의 대두라는 위기 앞에서 부단히 ‘조선’을 핑계거리로 활용하려 한 양태는 아마도 이런 방편적인 활용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처럼 상대를 방편으로 삼고픈 유혹은 비단 일본이나 쓰시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로 국내 정치 차원에서의 인심 수습과 단결을 위해 일종의 프로토 내셔널리즘적인 차원에서, 조선 후기 내내 임진전쟁의 기억을 어떻게 활용해 왔는지 비교군으로서 아울러 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근대에서의 사례들이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 의식 위주의 비교적 단순명료한 형태를 띠고 있던 데 비해, 개화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 ‘선망’이 뒤섞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사회에서의 모순된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되기에 이릅니다. 이 같은 전환과정에 주목해, 서구에서의 신사도의 형성이 이른바 메이지 부시도(明治 武士道)의 창안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이런 당시의 세계적인 문제의식의 환류가 조선에 미친 영향에 주목했습니다. 요컨대 일본에게 서양은, 마찬가지로 조선에게 일본은 경계 대상으로 밉기야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서 저들이 어떻게 그토록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본받아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본에서, 그리고 조선에서 차례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방편으로서의 일본’은, 우리 사회에서 기왕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일본 핑계 대기에서 점차 오히려 스스로를 향해 우리 자신을 계도시키기 위한 지렛대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개화기로부터 일제 강점기의 시작과 끝을 망라하는 방대한 일기로 잘 알려진 윤치호의 경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바,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근대화라는 목적과, 본래대로라면 이를 위한 방편에 불과했을 터인 일본에 대한 가치의 전도가 어떻게, 또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분석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밖으로든 안으로든, 일본을 방편 삼으려는 이 같은 오래 묵은 의존성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요? 상황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이천 년대 이후 한류의 대유행 이상으로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혐한 현상이 얼마나 발호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사회적 정서에 편승해 한국 때리기로 나름의 정치적인 기획을 밀어 붙이려는 움직임이 도드라지고 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요컨대, 한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한국에 대한 방편적 활용이 일본 사회에서 어느새 다시 부활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방편으로서의 한국은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는 오늘날의 기술적 환경과 맞물려, 다시 방편으로서의 일본을 자극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으면 좋을까요. 본서에서는 이를 모색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문제의 시발점에 해당하는 방편적 사고의 구조와 그 작동 매커니즘의 해명을 꾀하고자 합니다. 

 

유불란 서울대·정치학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정부 국비유학생으로 도일해 도쿄대학 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수학했다. 이후 경희대 공공거버넌스 연구소 및 서강대 글로컬사회문화연구소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 LnL(기숙형 대학) 시범 사업단에서 동아시아 단위의 사상적 상호작용의 분석과 그에 입각한 동아시아 공동체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화해의 이정표 1 : 이론적 기초를 찾아서』(2020) 및 『한국의 정치와 정치이념』(2018,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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