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에 대한 미래주의 비평 ··· ‘빨리빨리 비빔밥’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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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에 대한 미래주의 비평 ··· ‘빨리빨리 비빔밥’의 맛
  •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3.11.0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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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빈 교수의 〈동아시아 담론〉
 

 

굴뚝 위에 앉아 세상 바라보기

어린 시절, 겨울날 굴뚝 위에 앉아 눈이 휘날리는 하늘을 보고 있으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나와 세상을 차례로 다 볼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곤 했다. 아마 어느 동화책의 잔영이 기묘하게 나타난 것인지 모른다.

이 글은 한류에 관한 지구적 차원의 문화사적 의미를 ‘미래주의 조망’으로 토론하고 ‘미래사적 방법론’으로 구상하려 한다. 내가 추구하는 인문학적 상상과 사회과학적 실천은 이 지점에서 합류한다. 이 시도는 우리가 무언가를-《사상(思와 想)-사물(事와 物)》-사고하며 토론할 때, 이미 그것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담아내어 말하고 있으며(분석), 동시에 내 마음이 가고 싶은 길을 따라 말하고 있다(구상)는 깨달음에서 나왔다. 우리는 시점을 고정하여 인간사의 주제를 분석하고 정의 내릴 수 없다. 개념화하는 순간 이미 그것을 전제로 하는 시점은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의 보이는 것에서 안 보이는 메시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참고하여 보이는 미래상을 구상하려고 하는 게 ‘사유하는 동물’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인색한 꼰대 스크루우지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까지’ 유령친구와 여정을 같이 하고 나서야 가능했다. 


동서양 상호학습효과에 의한 혼성문화의 결실

근래 한류의 발전과 세계무대의 분출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서양 상호학습효과에 의한 혼성 근대화”를 통해 구성된 “혼성문화의 결실”이다. 또한 한류는 22세기 동아시아 시대의 도래를 앞서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큰 전제를 가지고 몇 가지 생각의 여행을 떠나보자. 

첫째, 막스 베버는 서양 중심주의 근대화를 논하였고, 황태연은 공자유교가 인류문명의 근대화를 자극하고 발전시켰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양인은 시간-공간을 달리 살았으나, 학계에서 각자 동서양 중심의 논리를 ‘자기식’으로 역설하였다. 나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참조하면서, 동서양 문명 서열의식을 해체하기 위해 장기 역사적으로 ‘상호학습효과를 통한 혼성 근대화’가 적실하다고 논했다. 한류의 생성과 발전은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전형적인 사례이다. 

둘째, 디지털 기술은 서양이 창출하고 주도했지만, 한국은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를 활용하여 ‘학습’하고 중진국 중에서 가장 높은 학점을 획득하여 선진국으로 진입했다. 저 옛날, 계유년에 장안 건달들과 함께 쿠데타(박정희와 전두환이 모방한 사건)를 모의하면서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손바닥으로 천하를 바라본다’라고 자신이 뛰어난 모략가임을 과시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초등생들도 손바닥 핸드폰으로 지구상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다. 아마 지구상 어느 민족보다도 한민족이야말로 동서양의 정보를 가장 빨리 듣고 보고 욕하고 찬미하고 전송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한류 쿠데타가 성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쿠데타로 좀 삐딱하게 표현했지만, 그것은 못된 놈들의 깡패짓이고, 한류는 착한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비폭력의 조용한 혁명임이 틀림없다.

 

              이미지 출처: The Times 온라인판, ‘Hallyu! How Korean culture conquered the world’<br>
                     이미지 출처: The Times 온라인판, ‘Hallyu! How Korean culture conquered the world’

세계가 반한 한류의 ‘빨리빨리 비빔밥’

혼성문화의 달인답게 한국인만큼 온갖 것을 다 비벼 먹는 데 능한 민족은 없다. 더구나 비벼서 내는 그 맛이 가위 독창적이다. 한류가 동서양을 비벼서 만들어 낸 그 맛에 세계인이 열광하는 게 놀랍지 않다. 

지구적인 네트워크 시대에 서양과 중국, 일본이 타문화를 대면하면서 상호학습효과를 이용한 혼성화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아시아 네트워크 시장에서 앞자리를 한국에 내어주고 있다. 미국과 서구, 중국과 일본은 문화적 우월의식으로 인해 ‘상호학습효과’를 경시하고 외부의 문화에 대한 장벽을 치는 데 급급하다.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이 문화적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은 고전문화의 선생이었으나, 권위주의체제의 ‘검열제도’와 이웃 나라들과의 상호학습효과를 경시한 결과 현대문화에 있어서는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마저도 한때 ‘동아시아의 더러운 추억’인 메이지 근대화 이후 ‘아시아 우등생의식’으로 인한 작위적 자존감에 도취하여 ‘전 지구적 보편의 수용과 문화세계화’를 무시한 결과, 이제는 1억 4천만의 갈라파고스에서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오차즈케의 맛’(お茶漬の味, 1952)에는 차와 밥을 말아 먹는 오로지 일본적인 ‘비빔차밥’이 나온다. 우리의 다양한 재료의 비빔밥보다는 훨씬 조합이 단순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동서양 비빔밥문화와는 달리 일본 밖으로는 아무런 반향을 주지 못하는 나 홀로 오타쿠문화의 상징에 머물고 말았다. 

오늘날, 사상적 근거 없는 서양의 인종차별주의, 중국과 일본에서의 작위적 문화 우월의식은 정말 희극이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우월성이 쇠퇴하는 상황, 일본의 어정쩡한 문화적 우월감과 자기도취, 중국의 고전문화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우월감과 사회 전반의 검열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자. 

 
동서양 서열의식의 무력화

이른바, 장기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단위(개인과 국가, 민족과 문명)는 각자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고, 그 고유성은 자기만의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우열관계론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위 중에 어느 하나가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논리는 역사상 특정 시기 특정 상황에서 나타나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할리우드도 한류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근래 한류의 부상은 동서양과 (동)아시아 내부의 문명 서열의식을 허물거나 최소한 그에 대한 회의론을 증대시키고 있다. 즉, 고전시대 동아시아는 중국이 문화적 선생 노릇을 해왔으나, 이제는 후진으로 쇠락하고 한국이 선진으로 등극하고 있다. 일본도 문화적 갈라파고스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어 외부세계에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내가 바라보는 한류는 동서양의 문화 혼성화로 인한 동서양 관계성을 변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변화시키고 있다. 서세동점과 미세동점이 제3세계에 뿌린 추악한 신식민주의 유산, 일제 식민주의와 숭미-친일 군사독재의 잔재, 천민자본주의라는 합병증을 앓고 있는 한국인의 탈근대적 문제의식을 ‘체’로 삼고, 은유와 풍자, 해학과 조소의 표현양식을 ‘용’으로 삼아 제작된 문화가 세계로 확산하며 공감을 얻고 있다. 

 

이미지 출처: '오늘날 케이팝! - 한국 음악이 일으킨 혁명 (K-Pop Now! - The Korean Music Revolution)' 단행본 표지 (제공: 터틀 출판사)<br>
이미지 출처: '오늘날 케이팝! - 한국 음악이 일으킨 혁명 (K-Pop Now! - The Korean Music Revolution)' 단행본 표지 (제공: 터틀 출판사)

한류의 우상파괴: 정치꾼과 학벌꾼을 가르치다

한류의 뚜렷한 장점은 역사상 침략하고 통치한 적이 없는 문화라는 점이다. 자연히 통치와 착취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식으로 충만한 색채를 지니게 되었고, 그에 대해 세계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한국형 비판의식은 ‘지배하려는 힘에 대한 비판사상’과 호응할 수 있다. 여기서 ‘비판’의 의미는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려는 힘으로부터 해방과 계몽을 지향한다’라는 목적성을 띠고 있다. 

한류 영화와 드라마, K-팝이 내포한 자유분방함과 독창성, 세상의 위선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의 거대한 물결은 서서히 세계적 주류문화와 엘리트 문화영역으로 충격파를 전송하고 있다. 미국과 서구는 한류의 확산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고, 중국은 한류가 가진 자유분방함이 두려워 봉쇄와 검열을 강화하였다. 일본은 보수 정치와 문화적 고유성에 침잠하여 국경 안에 숨어지내면서 질시와 자기만족의 이중 감정으로 쳐다만 보고 있다. 

분출하는 한류의 조용한 비폭력 문화혁명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는 오히려 대중을 우습게 보는 타성이 여전하다. 그래서 나는 이전 글에서 엘리트 혐오자인 비트겐슈타인이 제자들에게는 정작 엘리트 소굴인 학교를 떠나서 일하라고 말했던 이유를 논했다. 이러한 탈엘리트주의-반권위주의는 한류의 주요한 정신이다. 근래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한류의 ‘동서양 혼성문화혁명’의 파도는 18세기 독일의 질풍노도운동, 유럽의 6-8혁명, 미국의 히피즘이 추동한 변화를 재현하고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번민》(1774)은 독일에서 질풍노도(疾風怒濤) 문학운동을 일으켰다.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청년의 열광과 우상파괴주의가 분출하여 당시 유럽의 전반적인 문화적 변화를 이끌었다. 프랑스혁명으로 등장한 나폴레옹도 이에 감흥을 받아 괴테를 두 번 만났다.

1968년 프랑스 6-8혁명은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 등의 보수적인 가치들을 대체하는 평등, 성해방, 인권, 공동체주의, 생태주의 등의 진보적인 가치들이 사회의 주된 관심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경향성이 현재까지도 프랑스 사회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히피즘도 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의 교착 상태와 불안한 미국 사회의 영향으로 청년들이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진 상태에서 발생했다. 이는 사회의 기존 질서와 물질만능주의를 거부하고,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조를 미국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내가 굴뚝에서 목격한 한류의 미래상은 상기 우상파괴운동의 사례처럼 인종과 문화, 국경의 벽을 뛰어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보편적 자유와 평화의 길을 외치고 개척하는 것이다. 문화적 보헤미안으로서 기득권 문화와 정치와 사회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인간성의 자유와 해방을 선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왕이면 미세동점의 위선적 지배체제와 한반도 분단체제를 해체하는 ‘조용한 사상과 문화의 혁명’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박찬욱의 ‘JSA’(2000), 봉준호의 ‘괴물’(2006)과 ‘설국열차’(2013)는 이러한 비판의식에서 미세동점 이후의 세계를 ‘미래사적 방법론’으로 구상할 것을 자극하고 있다. 많은 한류의 영상작품들은 지배권력이 구축한 서열화한 세상에서 민초들이 어떤 모멸과 희생을 겪고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오징어 게임’(2021)은 그 대표작이다. 

 

                                                           오징어게임.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넷플릭스

비판론에 대한 비판론: 국가주의 붕어빵 틀 부수기

근래 SNS에서 간혹 보이는 한류 비판론에는 중대한 특징이 있다. 사안에 따른 우려 섞인 마음은 이해하지만, 비판론은 대부분 ‘국가, 사회의 교육제도 숭배주의와 엘리트 아카데미즘’의 흔적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른바 엘리트-클래식문화가 대중문화의 천박함을 경시하는 의식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역사상 대중의 팬덤이 많지 않은 엘리트-클래식문화가 사회의 거대한 혁신을 추동한 적은 없다. 

그리고 21세기 탈근대적 문제의식의 시대에는 엘리트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이 거의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양아치 서사를 그린 영화에서 지고지순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그리고 법꾸라지 엘리트들의 양아치 짓을 풍자하는 드라마라면, 그것들은 엘리트문화인가 대중문화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류를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지만, 그 가치를 이해하기도 하면서 방해꾼들에 대한 비판을 병행해야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한류가 예술이라는 이름과 안 어울리게 획일적으로 진행하는 K-팝스타 양성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또한 천민자본주의에 편승하는 비즈니스꾼의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예술은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K-팝은 엔터회사가 미성년자들을 합숙시켜 틀에 박힌 내용을 획일적으로 연습시켜 돈벌이로 내몰아 앵벌이를 시키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비판이다. 근래 ‘걸그룹 fifty-fifty’ 사태는 이것을 입증하는 자료로 인용되고 있다. 아직 예술의 의미도 모르는 소녀들을 어른들이 돈벌이에 이용하면서 일어난 추잡한 사건이라고 아쉬워하는 비판론에 일리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런 한류 비판론은 국가적 정규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르고 버젓한 직업을 얻어야 한다는 표준화-규격화된 생각의 지배를 반영한다. 바로 그러한 교육제도라는 ‘붕어빵 틀’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자기만의 자유분방함으로 예술적 개성을 분출한 결과물이 한류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비판론에서는 엘리트 아카데미즘의 엄숙주의적인 ‘생각의 습관’에 젖어 ‘자유분방한 대중예술’을 천시하는 정서를 감지할 수 있다. 단언컨대, 정규교육이 기계적으로 양육한 표준화된 사고체계로는 한류의 독창성과 개방성, 반권위주의적 저항성을 읽을 수 없다. 

근래 한국 영화와 드라마, K-팝은 엘리트 ‘아카데미전’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앙데팡당전’에 출품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기껏 교과서 속의 표준화된 졸견으로 교과서 밖의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를 비판하는 게 우습다. 스카이캐슬에서 자란 법꾸라지, 재벌기업 장학생 판검사, 부모찬스 특권상속자들, 강남 카페막시스트 등등. 이런 ‘포스트모던 명품으로 겉치장한 영리한 모지리동아리’ 멤버들이 ‘앙데팡당전’에 전시된 고호의 명화를 천박하다고 무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BTS, Dynamite

엘리트의 엄숙주의, 제도주의적 교육관에서는 한류의 우상파괴사조를 읽지 못한다. 우리는 국가와 사회가 규정한 제도하에서 교육받고 그 자격증으로 일생을 살아간다. 어린이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각종 시험으로 구분을 당하다가 마지막에도 취직시험 끝에 월급을 받고 살아간다. 그렇게 사는 게 착하고 모범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학교, 고액 연봉, ‘사’자 든 직업은 우리 사회의 표준이다. 그런데 한류는 이 모든 표준적 공식을 깨버린다. 탈제도적인 자기교육과 소박한 대중과의 직접 소통(이 그들의 시험이다)이야말로 붕어빵 틀 같은 세상에 한류가 주는 가장 놀라운 메시지다. 

국가 제도와 사회적 권위의 표준을 경배하는 사람들은 엘리트가 한류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한류가 엘리트를 가르치고 있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온갖 엘리트 엄숙주의를 뛰어넘은 K-연예계가 고상한 척하는 엘리트 세계에 거대한 변화의 파도를 전송하고 있다. 오늘날 영화와 드라마의 대사, K-팝의 도전적 가사와 음악을 들어보라. BTS,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등, 그 내면의 논리-정서구조는 이미 엘리트와 아카데미즘체계(국가와 자본권력, 문화와 지식권력)가 생산하는 위선의 소리를 넘어서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이른바, 근대적 사고는 대중의 무식함을 교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탈근대적 문제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열심히 교화를 주장하는 엘리트들이 사실은 더 천박하고 위선적이기까지 한 게 들통난 것이 오늘날의 특징이다. 한류는 세상의 위선을 폭로하는 예술적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굳이 한류가 비판받아야 할 경우는 스스로 예술이 아닌 자본주의 쓰레기로서 대중의 저질욕망을 만족시키는 쾌락을 생산할 때이다. 이러한 비판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제도권 엘리트주의, 맹목적 애국주의와 반공주의, “양키 제일주의 트럼피즘”(America-First Trumpism)을 개무시하고 더 높은 차원, 즉 새로운 문화를 창도하는 ‘질풍노도’를 일으키는 데 한류가 앞장서야 한다. 

사실, 비판론이 향해야 할 방향은 문화를 검열하려는 정치권력과 사회적 권위이다. 특히 보수 정치꾼과 꼰대 주의자는 한류를 방석집 요정에서 술이나 따르는 호스티스 취급을 하고 있다. 자신들이 지배할 수 있는 하인 취급을 하고 있다. BTS의 취임식 참여와 병역 논란, 블랙핑크의 미국방문 동행 논란, 세계 잼버리대회에서 억지로 열린 콘서트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가끔 한류 영역에서 권력에 아부하려는 자들이 나와서 한류가 지향하는 원래의 가치-비판의식, 상상력, 창작의 자유-를 훼손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거의 보수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한류의 예술성과 비판의식을 모욕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 웃픈 위선이 있다. K-연예계와 스포츠 스타들의 비행(마약, 학폭, 성추문, 음주운전, 꼼수 병역기피 등)에 대해서는 그렇게 쌍욕을 하고 난리를 치며 끝내 퇴출하는 반면, 각종 기회주의적 행태로 살아가는 정치꾼, 법꾸라지에게는 너무나 관대하다. 이놈들은 드라마에서는 ‘상식, 정의, 공정’을 파괴하는 빌런으로 마지막 회에 철저히 패망하는데, ‘부조리’(알베르 까뮈)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게 한스럽다. 드라마 밖에서도 그 새끼들이 철저히 망가지는 것을 너무 보고 싶다. “Yeah, fucking tomboy!”(Tomboy 가사, 걸그룹 (G)I-Dle) 


한류의 사상사적 발원

이 글의 결론으로, 한류를 추동한 우리의 사상적 기원은 보수성(반도사관과 타율이성)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이상과 실천에서 유래한다. 이른바, 김구(백범)의 “문화대국론”, 안중근과 여운형의 “동양평화론”이 김대중의 “문화산업의 개방과 세계화정책”으로 연동되어 현실적인 탄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고전시대 이래 형성된 “반도사관과 소국의식”을 극복하고 21기 문화-지식 네트워크시대의 “문화적 대국의식”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사조를 선도하는 사상적 근거를 정초하게 되었다. 

이른바, 인류 역사상 인도의 비폭력-무저항의 평화사상 이후 두 번째로 한국에서 발원한 “문화대국-동양평화론”은 동아시아의 진보적 발전과 한류문화혁명의 세계적 확산을 견인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다. 우리는 “타율이성”을 극복하고 “문화적 대국의식”과 더불어 “자율이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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