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칸트의 종교론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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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칸트의 종교론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 김진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3.10.30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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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이성의 오롯한 한계 안의 종교』 [칸트전집 8] (임마누엘 칸트 지음, 김진 옮김, 한길사, 400쪽, 2023.09)

 

1793년 부활절 시장에 때를 맞춰 나온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저서 『이성의 오롯한 한계 안의 종교』는 당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념비적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에서 칸트는 네 번째 이성비판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칸트 스스로 “철학적 종교론”이라고도 불렀던 이 책을 우리는 “종교이성비판”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발간을 전후해서 칸트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칸트의 “철학적 종교론”은 역사적 계시신앙에서 
도덕적 이성신앙으로의 전환을 촉구한다

칸트의 철학적 종교론은 성서에서 계시, 기적, 섭리 등의 사건들로 이어진 ‘역사적 교회신앙’을 ‘도덕적 종교신앙’으로 점진적으로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 민족의 시조 ‘아브람’은 이름도 알지 못한 신의 부름을 받고서 길을 떠났다. 그의 후손들은 점차 그 신을 “아브라함과 야콥과 이사악의 하느님”, 곧 그들의 ‘부족신’으로 받아들였다. “있는 나”(탈출 3, 14)라는 이름을 가진 신이 모세에게 전한 십계명을 유대민족은 613개의 율법으로 확대했지만, 말씀[로고스]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에 처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서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 17)고 선언했다. 모세와 예수, 율법과 은총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놓치지 않았던 칸트는 역사적 계시신앙을 도덕적 이성신앙으로 새롭게 정립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학적 종교론”의 재판 서문에서 칸트는 도덕과 종교의 관계를 다시 조망했다. 칸트에 의하면 자유로운 이성 존재인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도덕법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인간의 의무를 인식하기 위하여 그보다 높은 어떤 다른 존재의 이념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무를 준수하기 위해 법칙 자체를 제외한 다른 어떤 동기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칸트는 의지 규정의 단계와 행위 결과의 단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의지 규정의 단계에서 칸트는 준칙을 결정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중요하게 여겼으나, 행위 결과의 단계에서는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해당하는, 이른바 도덕으로부터 생겨나는 목적, 즉 ‘최고선’의 이념을 중시했다.

칸트에서 최고선은 목적들의 형식적 조건인 ‘의무’[도덕성]와 그에 부합하는 ‘행복’을 결합한 이념이다. 최고선의 이념은 도덕의 성립 근거가 아니라, 도덕에서 나오는 결과적 표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는 어떤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았다고 해서 그 행위 결과로서 그에 부합하는 행복을 인과적으로 보장하는 체계가 아니다.

이를 위해서 칸트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요소들, 즉 의무와 행복을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즉 보다 높고 도덕적이며 거룩하고 전능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와 같은 최고 존재자만이 자연의 합목적성과 자유의 합목적성을 통일할 수 있으며, 도덕적 행위 주체에게 그에 부합되는 행복을 희망해도 좋다는 신앙을 허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도덕적 세계’야말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세계이며, 그것은 ‘최고선’이라는 도덕적 이념을 함께 갖고 있는 세계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도덕은 필연적으로 종교에 도달하게 되며, 종교를 통해서 인간 이상의 능력 있는 도덕적 입법자의 이념으로 확장해 나간다.” 도덕적 입법자의 의지 속에는 세계 창조의 궁극목적이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궁극목적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도덕은 그 자체로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도덕법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최고선의 이념으로 인해 도덕은 종교로 이행한다는 것, 바로 이 사실이 칸트의 이성신앙과 도덕신학의 토대 근거를 이룬다. 

여기에서 칸트는 신을 ‘도덕적 입법자’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면서, 이성존재의 주관적 목적인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세계통치자’라고 생각한다. 칸트는 도덕법이 우리에게 도덕적 행위를 강제하는 한에서,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한 인간이 행복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신성성을 향한 계속적인 접근 노력만이 최고선의 실현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도덕적 행위와 그것과 비례적으로 일치하는 행복이 인과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적어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칸트가 제시한 최고선의 실현은 현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최고선의 실현 불가능성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 조건은 자연의 세계와 도덕의 세계를 동시에 지배할 수 있는 이성 존재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서 신 존재는 도덕적 필요에 의해 필연적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는 이론적인 요청명제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좌) 칸트초상화, 요한 고트리프 베커 작(1768) Portrait by Johann Gottlieb Becker, 1768; (우) Kant-Porträt, Gottlieb Doebler 1791. Museum Stadt Königsberg, Inv. Nr. 74, Typ

성서와 교회사에서 도덕과 믿음[은총]의 갈등 구조 

바오로는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로마 3, 28)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가 되게 하는 것”(로마 3, 31)은 아니라고 단서를 달았다. 이에 대해 야고보는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되고,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비판했다.(야고 2, 24-26) 이 논쟁 앞에서 사도 베드로는 ‘믿음의 목적’은 ‘영혼의 구원’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에 ‘모든 희망’을 걸고서, 우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했다.(1베드 1, 9-16) 이처럼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믿음’과 ‘은총’을 강조하면서도, 받을 ‘은총에 대한 희망’을 위해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깨우친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Papa Leone X, 1475~1521; 재위 1513-1521)가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데 항의하여 비텐베르크대학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기치를 들고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루터교회의 핵심 교의로 정착된 이 모토는 사실상 사도 바오로가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 16-17)라고 말한 성구에서 유래한다. 바오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받은 구원”이기에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에페 2, 8)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예수님 안에서 창조된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말했다.(에페 2, 10)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루터교의 경건주의 신앙에 익숙하게 된 칸트는 장성하여 믿음과 은총 교리보다 도덕신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칸트는 “하느님의 선물”[믿음과 은총]보다 “하느님의 작품”[도덕과 선행]을 더 중시한 탓에 루터교 사제 신분의 국무장관에게 큰 봉변을 당해야만 했다. 칸트의 철학적 종교론은 바로 이 도덕과 믿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쾨니히스베르크대학 옛 건물(프레겔 강의 크나이포프(Kneiphof) 섬에 세워진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뒤편 부지 Alte_Universität_Koenigsberg

정치적 탄압에 맞선 칸트의 ‘철학적 종교론’

칸트가 쾨니히스베르크대학 총장으로 취임한 1786년 8월 17일에 ‘계몽 군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제(Friedrich der Große, Friedrich II, 1712~1786; 재위 1740.05.31.~1786.08.17)가 서거하자, 그의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 1744~1797; 재위 1786.08.17.~1797.11.16)가 프로이센의 왕좌를 넘겨받았다. 이듬해인 1787년 4월 23일, 칸트는 자신의 대표작 『순수이성비판』의 재판을 간행했고, 베를린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는 이 책의 초판(1781.03.29)에 이어서 재판까지도 당시 교육문화·국무장관 제트리츠(Karl Abraham Freiherr von Zedlitz, 1731~1793) 남작에게 기꺼이 헌정했다. 또한 이듬해에 칸트는 둘째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을 출간하고 대학 총장도 재임되는 등 학문적인 성취와 명성을 드날렸다. 

하지만 칸트에게도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1788년 7월 3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선대왕의 계몽주의 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기만적이고 교활한 사제’라고 힐난했던 뵐너(Johann Christoph Wöllner von Woellner, 1732~1800)를 제트리츠의 후임 장관으로 발탁했던 것이다. 일주일 후인 7월 9일, 뵐너는 “프로이센국의 종교법에 관한 칙령”(das Religionsedikt vom 9. Juli 1788)을 발표했다. 12월 19일, 뵐너는 수정과 보완을 거친 종교칙령(das preußische Zensuredikt vom 19. Dezember 1788)을 새로 공표하고 ‘즉심위원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검열 기구를 베를린에 설치하여 도덕과 종교에 대한 모든 저술의 검열을 강화했다. 이로써 뵐너는 루터파의 종교적 합리주의자들을 견제하고자 했다. 드디어 1791년 6월, 칸트 역시 이들로부터 침묵을 종용받았다. 이에 격분한 칸트는 1791년 9월, 「변신론의 실패」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는 단지 전초전이었다.

1792년부터 칸트는 자신의 철학적 종교론을 논문 네 편으로 연속해서 발표하고자 했다. 그의 “철학적 종교론” 첫째 원고 “인간의 본성에서 근본악에 대하여”는 1792년 『월간 베를린』 4월호에 게재되었다. 그러나 두 달 후인 6월에 둘째 원고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선한 원리와 악한 원리의 투쟁에 대하여」가 검열 통과에 실패하자, 칸트는 근본악 원고와 세 편의 미간행 원고를 단행본으로 출간하고자 했다. 이렇게 『이성의 오롯한 한계 안의 종교』는 1793년 부활절에 맞춰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칸트는 1793년 3월 18일, 종교론의 출간 직전에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제트리츠 장관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칸트는 1794년 3월에 출간된 종교론 재판(B)의 서문에서, 그리고 6월에 나온 『만물의 종말』에서 프로이센의 종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1794년 10월 1일, 뵐너가 기안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경고 서한을 받은 칸트는 학자로서 힘든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칸트는 왕이 서거(1797.11.16.)할 때까지 학문적 탄압을 묵묵히 이겨내야 했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1770~1840. 왕의 둘째 아들 빌헬름 1세[1797~1888]는 1871년에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의 등극으로 칸트는 『학부논쟁』(1798)에서 자신의 사정을 밝히고 새로운 뜻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칸트의 “철학적 종교론”도 그 본래의 위상을 회복하게 된다.

 

크리스티안 야콥 크라우스, 요한 게오르크 하만, 테오도르 고틀립 폰 히펠, 카를 고트프리트 하겐 등 친구들과 함께한 칸트 Kant with friends, including Christian Jakob Kraus, Johann Georg Hamann, Theodor Gottlieb von Hippel and Karl Gottfried Hagen

칸트의 세 비판서와 철학적 종교론의 화두: ‘지식’은 ‘이론적’이고, 
‘도덕’은 ‘실천적’이고, ‘희망’은 ‘이론적-실천적’이다

칸트는 네 권의 비판서를 통해 가능한 모든 학문논쟁에 보편타당하게 적용할 수 있는 반듯한 ‘먹줄’을 긋고자 했다. 비판철학자 칸트가 내놓은 비답은 이성의 서로 다른 기능들에 부합하는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칸트는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 있는 학문적 기준을 어떻게 정초했던 것일까? 이 작업은 이성의 관심 지향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최고선의 이상”에서 인간 이성의 관심 방향을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세 가지 물음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이론적 지식’, ‘도덕적 실천’, ‘종교적 희망’에 대한 화두였다. 칸트는 첫째 물음[자연철학과 형이상학]을 『순수이성비판』(1781, 1787)에서 다루었고, 둘째 물음[도덕철학과 윤리학]은 『실천이성비판』(1788)에서 다루었으며, 셋째 물음[역사종교, 이성신앙, 윤리신학]은 『판단력비판』(1790)과 『이성의 오롯한 한계 안의 종교』(1793, 1794)에서 다루었다.

칸트는 이 저서들에서 자신의 특유한 선험철학의 방법론으로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 ‘종교이성’의 역사적 변증법을 기술하면서, 이성의 ‘선험적 이상’인 ‘최고선’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 조건들을 일별하고 있다. 따라서 이 논의들에 대한 공통적인 정초 근거는 이성의 이론적 사용과 실천적 사용을 구분하는 칸트의 세계관적 사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칸트가 첫째 물음[지식]은 ‘이론적’, 둘째 물음[도덕]은 ‘실천적’이라고 한 것과 달리, 셋째 물음[희망]에 대해서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라고 규정한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론적 지식의 한계를 분명하게 규정함으로써 종교가 들어설 수 있는 여지(토대)를 마련하였다. 칸트는 오직 ‘자연 인과성의 법칙’에 근거하는 경험적 인식의 틀 안에서만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론적 지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이론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 지식의 영역에서 경험의 범주를 초월한 신 존재의 ‘존재론적’, ‘우주론적’, ‘목적론적’ 증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로써 칸트는 신 존재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유보한 것일 뿐이었다. 여기에서 ‘영혼’, ‘세계’[자유], ‘신’의 이념은 통일성을 지향하는 ‘순수이성의 대상’ 개념으로서, ‘이념’이자 ‘선험적 이상’일 뿐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성 사용의 다른 유형, 즉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통해 신의 존재 사실을 보다 의미 있게 진술하고자 했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실천적 이성 사용’을 통해 요청론적 신 존재 주장을 이끌어냈다. ‘도덕성’과 ‘행복’의 조화 개념인 ‘최고선의 이상’은 실천이성의 대상 개념인데, 그 실현을 위해 요청적 희망의 주요 내용으로 상정했다. 이성의 실천적 사용은 ‘자유 인과성의 법칙’에 근거하는 예지적 세계의 당위 원칙에 따른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실천적인 것’이다. ‘실천적’ 행위 주체인 나는 자유의 법칙에 근거하여 오직 도덕적 의무만을 이행해야 한다. 이성의 ‘이론적’ 사용에서 ‘자유’는 증명할 수 없는 선험적 이념이지만,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는 증명이 불필요한 명증적인 공리와 같은 것으로서 “윤리학의 근본요청”이다.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근거이고,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근거이다.” 자유는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도덕법은 자유를 인식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도덕법과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 언제나 이미 도덕적 실천 주체의 존재를 필연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다시 말해 이성의 이론적 사용에서 ‘영혼’, 자유[세계], 신의 존재는 이성의 대상개념[이념 또는 이상]이지만,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는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을 위한 조건 명제로서 규제적인 의미에서 그 실제성을 부여하는 ‘요청 명제’이다. 영혼불사와 자유, 그리고 신 존재는 도덕적 행위와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제해야할 형이상학적 명제인 것이다.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이성의 규제적 사용으로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이 의도하는 인류의 최종목적에 대한 고유한 의미를 인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연 목적도 이성의 이론적-구성적 사용으로는 밝혀질 수 없다. 목적론적 세계관 그 자체도 자연세계 곳곳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그것들 역시 예지적 세계의 특성에 속한 것이라서 그 인과론적 연관성을 이론적[구성적]으로 명백하게 밝혀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세계관의 의미체계 역시 이성사용의 ‘규제적 원리’를 따라서, ‘자연 인과성’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를 동시에 매개할 수 있는 ‘전지, 전능, 전선하신 신의 존재’를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 조건으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칸트는 오직 도덕신앙[윤리신학]만이 “위안을 주는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상 이 논의는 칸트의 네 비판서의 변증론에서 공통적으로 다루어지는 내용이다. 

 

(좌)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의 칸트 동상(1945년에 소실된 크리스티안 다니엘 라우흐Christian Daniel Rauch의 원작을 하랄트 하케Harald Haacke가 복제함); (우)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있는 임마누엘 칸트의 무덤 Grabmal Immanuel Kants in Kaliningrad (ehemaliges Königsberg), Russische Föderation.

희망은 행복을 지향한다. 그러나 희망은 ‘행복해도 좋을 품격’을 전제하며, 
이 때문에 근본적으로 도덕성을 근거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근본악의 상황에서 ‘선의 원리’를 회복하기 위해 
‘심성의 혁명’을 일으키고, 선을 향한 부단한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네 번째 이성비판서인 『이성의 오롯한 한계 안의 종교』에서 칸트는 “전능하신 천지창조자이자 신성한 도덕적 입법자로서 신”, “자비로우신 인류의 통치자이자 도덕적 부양자로서 신”, “신성한 법칙의 관리자이자 공정한 재판관으로서 신”에 대한 신앙을 “참된 보편적 종교신앙을 가능하게 하는 위안적 희망”으로 요청하고 있다. 칸트의 신 존재 요청은 서로 다른 원리와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 세계와 자유 세계의 구조 상이성 문제를 모순 없이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현상적인 자연세계와 예지적인 자유세계의 구조가 달라서 제기되는 난제를 피할 수 없어서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 앞에 서게 된다. 다시 말해 도덕적 실천과 그에 비례적으로 부합하는 행복의 배분이라는 최고선의 요구는 두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의 상이성으로 인해 현상적으로 인과적인 결합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종교적 희망에 대한 물음은 “실천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는 ‘희망의 물음’을 자신의 철학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면,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칸트의 이 물음은 ‘도덕적 실천’과 ‘종교적 신앙’의 관계 규명을 넘어서서 ‘종교적 희망의 참된 근거’가 ‘행복해도 좋을 품격’에 있다는 사실로 인도한다. 이는 ‘희망’이 ‘행복’을 지향하지만, ‘도덕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신 존재’ 요청에서 ‘신의 은총판단’ 요청으로

1844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 300주년 기념 포스터. 다른이들과 함께 칸트와 헤르바르트를 기리고 있다. Poster celebrating the 300 years of the University of Königsberg, 1844. Among others, Kant and Herbart are honored.

그리하여 칸트는 우리가 순수한 도덕적 심성만을 최고선의 이념으로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비록 우리는 그 자신의 힘만으로 도덕적 신성성을 성취할 수 없더라도, 그 실현을 위한 무한한 노력을 ‘신적인 의무’로 인식함으로써, 그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도덕적인 세계지배자의 협력이나 배려에 대한 믿음”을 희망해도 좋다고 말한다. 

이처럼 칸트는 도덕적으로 살려고 부단하게 무한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그 도덕적 의무 이행에도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축출당할 처지에 있다는 어려움을 해소하고 행복을 보증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하느님의 ‘은총판단’이라는 새로운 요청명제에서 찾았다. 이 사실은 초대 교회 사도들의 선행과 믿음에 대한 생각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칸트 역시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면서도 구원의 은총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모든 이들을 향한 구원의 은총을 그대로 열어 놓았으며, 이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판단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은총판단 요청은 칸트가 이미 『실천이성비판』에서 요구했던 신 존재 요청의 확장적 변형이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적 행위를 판단 받기 위하여 ‘예지적 존재자’인 ‘신적인 심판관 앞에’ 서게 된다면, 그 심판자는 바로 “그를 (실천적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죄책을 짊어지신 대리자이시고,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최고의 정의를 넉넉히 실행하시는 구속자이며,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심판관 앞에서 의롭게 하시는 변호자”이시기에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물신주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시대에 칸트의 철학적 종교론은 오직 도덕만이 인류사회의 최고선을 담보할 수 있는 비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김진 울산대학교 명예교수·대구한의대 연구교수 

대구한의대학교 향산교양교육연구소 연구교수 및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독일 루어대학에서 『칸트의 요청이론』(Kants Postulatenlehre)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국칸트학회와 대한철학회 학회장을 역임했다. 2023년 2월, ‘희망학 아카이브’(Hope Archive)를 울산 옥동에 개소하여 저술 작업과 콜로키움을 이어가고 있다. 주요 연구분야는 근현대 독일철학, 종교철학, 형이상학, 희망철학, 심리철학, 역사철학, 정치신학, 동서비교철학이다. 저서로 『희망의 인문학』(2021), 『형이상학』(2020)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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