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농민에 대한 영주 계급의 역사적 착취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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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농민에 대한 영주 계급의 역사적 착취방식
  • 이기영 동아대·서양사
  • 승인 2023.10.30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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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영주는 농노의 노동을 어떻게 수탈했는가?: 서유럽 고전적 농노노동 착취제도』 (이기영 지음, 사회평론아카데미, 376쪽, 2023.09)

 

전근대사회에서 토지는 기본적인 생계유지 수단이자 부의 원천이었다.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에서 영주 계급은 강탈, 수증(受贈), 매입, 개간 등을 통해 토지를 대규모로 독점 소유했다. 그렇지만 영주의 대소유지는 농민가족들에게 소규모로 분양되어 소농경영을 통해 경작되었다. 영주가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급하여 보유하게 한 목적은 농민의 잉여노동이나 잉여생산물을 지대의 명목으로 수취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농민에 대한 영주의 착취방식은 기본적으로 잉여노동 그 자체를 조야하게 수탈하는 노동지대형과 그 생산물로 수취하는 지대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착취방식은 부분적으로 병존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일반적으로 서유럽에서 중세 전기에는 노동지대형이, 중세 후기 이후에는 생산물지대형이 유행했다. 서유럽과는 달리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봉건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지대형 착취방식이 우세한 가운데 생산물지대형이 병존했다.

그러나 대토지 소유자가 농민의 잉여노동이나 잉여생산물을 지대로 온전히 수취하는 데에는 토지의 소유관계만으로는 어렵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재판권, 치안권 등 사점(私占)된 공권력과 인두세, 외혼세(外婚稅), 상속세 등으로 표현되는 신분규정으로 구성된 이른바 경제외적 강제(經濟外的 强制)를 영주가 행사함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봉건사회의 농민은 사실상 토지를 항구적으로 점유하고 노동수단을 소유하며 공유지(共有地) 이용권을 가지고 있어 경제적 자립의 가능성이 있는 데다, 영주에 의한 잉여노동이나 잉여생산물 수탈이 시공간적으로 뚜렷이 구분되거나 가시화되어 있어 농민의 저항에 부딪치기 쉽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동력을 포함해서 재화와 용역이 상품화되어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경제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런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가 생활수단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파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노동과정에 경제 외적 강제가 필요치 않다. 따라서 영주의 경제 외적 강제의 지배를 받는 봉건농민은 인격적 예속인으로 나타나는 데 반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법적·사회적으로 자유인의 지위를 지닌다.

 

농민들의 수확작업과 이를 감독·지시하는 장원관리인(영국. 14세기) [출전: 작자미상, Queen Mary's Psalter(Ms. Royal 2. B. VII), p. 78v]

1. 노동지대형 착취방식

노동지대는 소작농민이 토지의 소유주인 영주에게 지대로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을 행하는 대상으로서 영주의 직접경영지가 존재함을 전제한다. 따라서 노동지대형 착취방식에서는 촌락에 기초한 영주의 대토지 경영단위인 장원이 농민들이 제공하는 노동으로 경작되는 영주직영지와 영주가 농민들에게 노동력 재생산용으로 분양한 농민보유지들로 구성된 이분적 공간구조를 취한다. 고전장원이라고 불리는 이런 구조의 장원에서 농민은 작은 규모의 농민보유지를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영주에게 무보수의 강제노동 즉 부역노동(賦役勞動)을 제공하여 그의 직영지를 경작한다. 

농노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존재하지만, 고전적인 개념의 농노는 영주에 대한 예속적 관계보다 이처럼 영주를 위해 부역노동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민 즉 고전장원의 농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고전적 농노제가 실현되는 고전장원제는 루아르 강과 라인 강 사이의 북부 갈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9세기 초에 성립되어 11세기까지 실시되면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대체로 독일에서는 9∼12세기에,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9∼10세기에, 영국에서는 11세기 말엽∼13세기에,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15-17세기부터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중엽까지 고전장원제가 널리 시행되었다.

이번에 출판된 필자의 저서는 노동지대의 실현 형태이고 고전적 농노노동 착취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봉건적 부역노동 제도를 중심으로 영주가 농노의 노동을 어떻게 착취했는지를 토지대장을 비롯한 서유럽의 중세 문헌기록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 기초해서 살펴본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 의거해서 고전적 개념의 농노에 대한 영주의 노동지대형 착취제도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봉건적 부역노동은 고전장원제의 골간이 형성되던 8세기 전반(前半)의 원초적 형태에서는 노예 출신 농노에게는 그때그때 관리인의 지시를 받아 행해지는 매주 3일씩의 주부역(週賦役) 방식으로, 자유인 출신에게는 일정 면적을 할당해서 스스로 책임지고 경작하는 정적부역(定積賦役) 방식으로 부과되었다. 노예 출신에게는 주부역 외에도 영주가 갈이질 수단과 식사를 제공하면서 ‘간청’을 통해 ‘코르베(corvée)’라고 불리는 추가적 집단 갈이질부역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9세기 초에 고전장원제가 성립한 이후 전개된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고전적 형태에서는 출신신분에 따라 상이했던 원초적 형태의 부역노동제도가 곳과 때에 따라 여러 가지로 뒤섞였으며, 코르베가 이제는 간청 사항이 아니라 농노의 당연한 의무가 되고 노예 출신보다 쟁기와 역축을 갖출 능력이 더 컸던 자유인 출신들에게 더 많이 부과된다. 자유인 출신의 농노를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부역노동의 부담이 원초적 형태에서보다 커진 것이다. 

그렇지만 부역노동제도는 영지와 심지어 장원에 따라 달랐고 지역별로도 차이가 있었다. 지역별로 봤을 때, 노예제의 발전과 노예의 농노화가 뒤늦었던 게르만족의 원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파리 분지의 중심부 영지들에서는 부역방식이 뒤섞이면서도 지배적 방식은 정적부역 방식이었다. 이에 비해 게르만족의 원주지에 가까운 파리 분지의 북쪽 주변부에서는 주부역 위주의 부역방식이 실시되었다. 또 게르만사회와 로마인사회의 영향을 함께 받은 파리 분지 동쪽 주변부의 독일 서남부 지방에서는 주부역과 정적부역의 혼합적 부역부과 방식이 우세하다.

농노는 부역노동을 수행할 때 쟁기와 같은 노동수단을 스스로 지참해야 했고, 그의 아내도 부역노동을 분담하거나 보조해야 했으며, 갈이질부역이나 수백 킬로미터의 장거리 수송부역과 같은 힘든 노동은 여러 명이 작업반을 구성하여 공동으로 수행했다. 농노의 부역노동은 파종기나 수확기와 같은 농번기에 집중적으로 부과되었고,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하루 종일 행해졌으며, 부역노동 수행과정에서 관리자의 감독을 받음은 물론이고 부역수행에 방해가 되는 행위는 통제되었다. 또 농노는 부역노동 수행과정에서나 수행결과물에 도둑 등으로 인해 영주에게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배상해야 했고, 영주직영지에 필요한 파종용 씨앗이나 거름과 같은 농자재의 일부를 떠맡았으며, 연체료와 벌금 부과, 구타와 같은 신체형 부과 등을 통해 부역노동의 이행을 강제당하기도 하는 등 농노의 노동은 심하게 통제되고 착취되었다. 

고전장원제 단계의 지대가 노동지대라고 해서 부역노동으로만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물이나 현금 형태의 공납도 그리 크지는 않지만 포함한다. 공납 부분까지 노동일수로 환산해서 영주가 농노의 노동을 수탈한 전체 노동일수를 산출하면, 영지에 따라 1년 365일 중 최저 172일에서 최대 299일까지다. 이는 전체 농노노동의 50% 전후에서 70% 초반까지를 차지하는 크기다.

 

영주에 대한 농민들의 공납 장면(독일. 15세기) [출전: Rodericus Zamorensis(스페인 사람. 1404–1470) 저, Spiegel des menschlichen Lebens(Heinrich Steinhöwel의 독일어 번역, Augsburg: Baemler, 1479년), p. 9r]

2. 생산물지대형 착취방식

생산물지대형 착취방식은 고전장원제가 해체되고 12세기 이후 실시되는 이른바 순수장원제 아래서 실행된다. 순수장원제는 영주직영지가 상속, 기증, 장원관리인의 횡령 등으로 대폭 축소되거나 소멸하고, 이에 따라 부역노동이 불필요하여 장원농민들이 생산물 형태의 지대를 지불하는 장원제다. 순수장원제 단계에서 지대는 생산물지대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북부 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대륙부에서는 생산물지대 다음에,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생산물이 금납으로 바뀐 화폐지대가 우세한 시대가 이어진다. 따라서 생산물지대형 착취방식은 다시 순수 생산물지대형과 화폐지대형으로 세분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생산물지대는 절대주의 체제 아래서 다시 강화되기도 하여 화폐지대보다 훨씬 오랫동안 유행했다. 순수장원제로의 이행은 11세기 이후의 인구증가, 도시와 상업의 발달, 농업기술의 발달과 보급 등을 배경으로 한다.

생산물지대는 고전장원제하의 노동지대처럼 지대의 액수가 영주의 자의(恣意)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관습이나 문서화된 계약에 의해 정액제(定額制)나 정률제(定率制)로 고정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영주와 소작농민이 수확물을 50% 이하로 나눠 갖는 분익소작제(分益小作制) 방식의 정률제가 가장 선호되었다. 화폐지대는 정액제가 관행이었다. 이와 같은 지대제도의 변천은 영주와 농민 관계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경제적으로는 지대가 일정하게 고정됨으로써, 농민의 소득은 생산력이 발전하고 노력이 증가하는 것만큼 증대될 수 있었다. 특히 정액제는 그런 면에서 농민에게 특별히 유리한 것이었다. 게다간 화폐지대는 중세 후기 이후의 지속적인 화폐가치 하락으로 농민의 실질적 지대부담을 경감시킨 반면에 영주의 실질수입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경제외적 측면에서도 농민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감시가 수반된 불명예스런 부역노동을 수행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의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 여전히 지대율이 높은 분익소작제와 같은 가혹한 소작제에 의거한 반(半)봉건적 토지소유 관계가 유지되었고, 영주는 자신의 영지에서 농민에 대해 재판권, 부역 부과권, 독점시설물 사용강제권 등 봉건적 여러 권리를 행사했으며, 농민은 매년 영주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다. 프랑슈콩테와 같은 일부 지역에는 신분제적․법적 의미의 농노제가 잔존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봉건적 토지소유관계 및 봉건적 여러 부담의 폐지와 잔존 농노제의 완전 철폐는 프랑스 대혁명 때 이루어진다. 영국에서도 법적·신분제적 농노제가 철폐되는 것은 17세기의 시민혁명 때이며,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의 잔재는 1922년의 토지소유권법(the Law Property Act)에 의해 비로소 말끔히 청산된다. 동유럽의 농노는 일반적으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해방되며, 러시아에서 봉건적 토지소유관계가 완전히 철폐되는 것은 20세기 초의 혁명을 통해서다.

 

이기영 동아대·서양사

동아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 석사 및 박사과정 수료(문학박사). 여러 차례 프랑스, 독일, 미국 등지의 대학 연구소와 도서관에서 서양 중세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며 연구한 바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서양 중세 봉건사회의 구조와 형성 및 농촌경제다. 저서로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서유럽 대륙지역을 중심으로』,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서유럽 농노제와 봉건적 주종관계의 형성 및 인종문제』, 번역서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 『서양의 장원제―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에 대한 비교사적 고찰』,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 『서유럽 농업사 500-1850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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