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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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3.10.3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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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명 교수의 〈생활에세이〉

 

나는 어릴 적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무섭고 못하게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열아홉 살 때 맹장염이 걸렸는데 병원에 늦게 가서 수술 도중에 터져서 복막염이 되었다. 마취를 하고 다섯 살 위인 형의 손을 잡고 누웠는데 이대로 죽어도 억울할 게 없겠다는 시건방진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에는 노는 데 재미를 들여서 그랬는지 마흔이 넘은 사람은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 내가 마흔이 되어서야 마흔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서른 중후반 즈음에는 마흔이 넘으면 제대로 못 노니 그 전에 열심히 놀아야 한다고 한 살 아래 동료와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고 숙취 해소에 시간이 더 걸렸을 뿐이었다.  

사십대 중반에 이십대 중반 조교에게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소싯적에 품었던 ‘사십대 비인간론’을 스스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 사십대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아이는 자라고 직장의 이런저런 스트레스와 직업의 이런저런 보람은 얼마나 이러저러하게 많았던가?

사십대쯤에는 부모뻘 어르신들이 무슨 재미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을 자주 찾아뵈었지만 그들은 그냥 노인들이었을 뿐 인생의 재미나 즐거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막상 그 노인이 되어보니 인생의 새로운 한 단계가 더 있다는 것을 느낀다. 바로 손자를 보는 재미이다. 여기서 내가 ‘보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보는 것이지 ‘돌보는’ 것이 아니다. 행여 나에게 손자 돌보기를 기대하지 말지어다. (손자의) 할머니인 (내) 마누라가 손자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딸이나 사위가 퇴근할 때까지 그를 돌본다. 힘은 들지만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나는 옆에서 손자를 ‘보면서’ 비슷한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이런 보람과 행복은 내가 아이 적이나 열아홉 살 때나 사십대 중반이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상상도 못하던 것들이다. 젊다고 까불지 마라 이것들아. 과거의 나와 내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보람과 행복에도 시한이 있다. 아이가 열 살만 되면, 아니 그 이전에 그런 행복감은 더 이상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든에 가까워질 것이고 몸은 쇠약해질 것이다. 그 때가 되어도 나는 지금 예상하지 못하는 어떤 행복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 같은데, 모르지 그동안 단계별 나이 들어감의 새로운 모습들을 계속 몰랐으니 이번에도 또 모르고 하는 소리일지도.

여든이 넘고 아흔이 되면 삶을 관조하는 평온함을 가져야 할 텐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다. 요즘 이런저런 단톡방에서 할배들이 인생이 이러니저러니 하는 글이나 영상들을 퍼 나르는데, 나는 이것이 싫다. 너무나 뻔하고 식상해 보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론 이런 것들을 퍼 나르는 사람들은 일단 지루한 사람들이다. 젊을 적에도 술자리에서 지루한 얘기를 심각하게 늘어놓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늙은 판이 아닌가 한다. 

요즘 와서는 같은 또래 중늙은이들의 단체 모임에는 가기가 싫다. 일단 쭈글거려서 모양이  안 좋고 하는 얘기들이 다 늙은 얘기들이기 때문이다. 한 스무 살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좋은데 그들은 당연히 그렇지 않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길을 간다.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는 게 좋다. 목숨을 연장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삶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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