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동일 교수의 〈한일고금비교〉 ⑧ … 양쪽의 자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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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동일 교수의 〈한일고금비교〉 ⑧ … 양쪽의 자국사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3.10.23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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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동일 교수의 〈한일고금비교〉 ⑧

 

1

한국과 일본의 역사서 비교고찰이 긴요한 과제이다. 이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니, 자료가 적절하지 않아 고민이다. 이른 시기 한국의 역사서는 전하지 않고, <三國史記>(삼국사기)는 <日本書紀>(니혼쇼키, 일본서기)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져 한 자리에 놓고 고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三國遺事>(삼국유사)와 <古事記>(코지키, 고사기)를 비교하면, 다른 점이 너무 많아 얻을 것이 더 적다.

<三國遺事>와 비교하는 대상을 <愚管抄>(구간쇼우, 우관초)로 하면, 공통점이 분명해 길이 열린다. 一然(일연, 1206-1289)과 慈圓(지엔, 1155-1225)이라는 승려가, 역사에 위기가 닥친 시기에 불교에 입각해 자국사를 되돌아본 것이 상통한다. 위기가 일본에서는 武士(부시)가 天皇의 국권을 찬탈한 것이고, 한국에서는 몽골의 침공으로 전국이 유린되는 것이었다.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고, 두 저자 사고에 상당한 거리가 있어, 거의 반대가 되는 책이 이루어졌다.

慈圓은 수세에 몰린 天皇 편의 귀족이어서, 어리석은 생각을 조금 말한다는 책을 썼다. 비관이 가득한 역사관을 조심스럽게 제시하면서, 불교를 근거로 삼았다. 일본은 천하의 중심 須彌山(수미산) 주위 네 대륙 가운데 하나인 閻浮洲(나부주) 동쪽 끝의 변방이어서 正法(정법) 시대에도 큰 혜택을 보지 못하다가, 末法(말법) 시대에 들어서서 모든 것이 그릇되는 폐해가 극심하게 나타났다고 했다. 天皇이 권력을 잃고 정치가 혼란스럽게 된 것이 그 때문이라고 했다. 神佛(신불)이 보호하고 있어도 몰락의 추세를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도리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운이 순환한다는 또 하나의 믿음에서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一然(일연)은 정권과는 거리가 먼 在野(재야)의 禪僧(선승)이었다. 국난의 참상을 절감하고 분발해, 극복하는 정신력을 찾아 나섰다. 釋迦如來(석가여래) 이전 過去佛(과거불)이 활동한 자취가 있는 佛國土(불국토)에서 사는 사람들이 神異(신이)한 능력을 보여온 내력을 어떤 자료든 힘써 수집해 밝히는 것을 소임으로 했다. 처음에는 국가 창업주들이, 다음에는 불교의 고승들이, 그 뒤에는 하층 민중이 神異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神異는 이해할 수 없는 怪異(괴이), 神의 징표인 神聖(신성)이나 神秘(신비)와 많이 다른, 누구나 지니고 있으며 적절한 경우에 발현되는 탁월한 능력이다.

일본에서는 <愚管抄>에 이어서 <神皇正統記>(진노우쇼우토우키, 신황정통기)라고 하는 역사서가 나타났다. 이 둘은 일본어로 써서 동조하는 독자를 늘이려고 한 것은 같고, 다른 점에서는 거리가 멀다. <神皇正統記>의 저자 北畠親房(키타바타케쯔카후사)은 남조 天皇의 측근이었다. <愚管抄>에서 佛法이 으뜸이고 王法(왕법)은 그 아래라고 한 것을 반대로 바꾸어놓았다. 무신정권에 맞서서 天皇을 옹호하고, 남북으로 나누어진 두 天皇 가운데 남조의 天皇이 정통임을 밝히려고 했다. 신성한 天皇의 바른 계통을 말한다고 한 표제에 맞게, 天皇의 유래, 계보, 정통성 등을 분명하게 하는 것을 긴요한 과제로 삼았다. 

“大日本(다이니혼)은 神國(신코쿠)이다. 天祖(텐소)가 처음으로 터전을 열고, 日神(히노카미)의 오랜 계통을 이어, 我國(오가쿠니)에만 있는 일이며, 異朝(이쪼우)에는 비슷한 예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神國이라고 일컫는다.”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창업 시조가 하늘의 신과 연결된다고 하는 건국신화는 나라에도 흔히 있는데, 일본 것만 홀로 신성해 일본은 신의 나라라고 했다. ‘神代’(진다이) 이래로 신성한 혈통을 이은 天皇을 받드는 일본이 홀로 위대하다고 했다. 

<愚管抄>는 불교의 교리를 일본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했다. <神皇正統記>는 神道 신앙이 철학적 타당성을 가진 듯이 말했다. 일본 역사에 관한 이해가 일반론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쪽에서는 불교, 또 한쪽에서는 神道에 의거해 시도한 결과가 둘 다 미흡해, 유교의 보편주의에 맞서는 대안을 마련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한국에서는 조선왕조가 유교국가를 재건하고 전왕조의 역사를 <高麗史>(고려사)에서 정리하고, 통사인 <東國通鑑>(동국통감)을 내놓았다. <神皇正統記>와 한 세기 이상 차이가 있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神道와 유교의 관점은 근접된 비교에 필요한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다음 시대 양국의 자국사를 비교할 때 수용된 양상을 들어 간접적인 논의를 하기로 한다. 

 

2

일본 新井白石(아라이히쿠세키, 1657-1725)의 <讀史餘論>(토구시요론, 독사여론), 한국 安鼎福(안정복, 1712-1791)의 <東史綱目>(동사강목)은 비교고찰을 구체화할 만한 공통점을 갖추었다. 동시대 유학자의 자국사 이해의 표본이라고 인정되는 저작이 師弟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스승 李瀷(이익, 1681-1763)의 사론 특히 <三韓正統論>(삼한정통론)이 <東史綱目>을 이끌고, 新井白石의 후학 萩原裕(하기와라유)가 1858년에 교정을 보고 앞에 붙인 敍(서)가 <讀史餘論>를 마무리해, 모두 고찰한다.

저자는 둘 다 유학자이고, 중국 朱熹(주희)의 <資治通鑑綱目>(자치통감강목)과 관련을 가지고 자국사를 이해하고 서술했다. 安鼎福은 거기서 제시한 규범을 직접 채용해 표제에 같은 말이 들어간 <東史綱目>을 집필했다. 新井白石은 將軍(쇼균)이라고 하는 자기네 군주에게 <資治通鑑綱目>을 進講(진강)하고, 자국사도 말해주려고 일본어로 쓴 책이 <讀史餘論>이다. 

綱目이란 중요 사항 綱은 크게 내세우고, 사소한 것들 目은 작은 글씨로 논의하는 서술 방식이다. 사실을 잡다하게 열거하지 않고, 역사의 근간을 분명하게 해야 하므로 필요하다고 했다. 역사의 근간은 정신적 가치의 구현이고, 정신적 가치는 유교의 도리이다. 정당하게 시작한 왕조가 유교의 도리를 실현해 한 시대를 이끌면 正統이라고 인정된다. 正統을 바르게 판정하는 것이 역사서의 기본 임무이다. 

이렇게 전개된 논의는 총론에서 타당성이 분명하다고 널리 인정할 수 있으나, 각론으로 가면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정당한 시작, 유교 도리 실현에서 크고 작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朱熹는 두 가지 주장을 힘써 했다. 삼국시대 蜀(촉)은 변방의 작은 나라이지만, 漢(한)을 이은 蜀漢이어서 正統이라고 했다. 남북조 시대 남조가 正統이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정통이 사라지기도 한다고 했다. 

李瀷은 이런 논의를 자국사에 적용해 <三韓正統論>을 쓰고, 두 가지 주장을 했다. 檀君朝鮮(단군조선)과 箕子朝鮮(기자조선)의 정통이 馬韓(마한)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삼국시대에는 어느 나라가 정통이라고 할 수 없어 정통이 사라졌다고 했다. 앞의 주장은 衛滿은 찬탈자여서 정통으로 인정되지 않고, 衛滿朝鮮이 漢나라의 침공으로 망했어도 마한의 정통은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데 근거를 둔다. 이것은 유교사관이면서 자주사관이다. 뒤의 주장은 자국사 대등론이다. 

朱熹의 견해를 받아들여 통치의 정당성을 유교의 관점에서 판정하는 유교사관을 강화한 탓에 자주사관이 훼손되었다고 여긴다면 부당하다. 중국사와 한국사는 공통된 원리에 따라 대등하게 전개되었다고 李瀷은 밝혀 논하고, 이런 관점에 입각해 역사 서술을 실제로 하는 작업을 安鼎福이 맡았다. 師弟가 함께 자국사 이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東國通鑑>에서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外紀라고 일컬은 서두의 별도 항목에서 소개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本紀에 넣은 것이 커다란 변화이다. 檀君朝鮮ㆍ箕子朝鮮ㆍ馬韓으로 正統이 이어져, 주체성이 분명한 역사가 중국과 대등하게 전개되었다고 했다. 왕조 교체로 正統을 새롭게 계승하는 시기가 맞물려 중국사와의 대등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고 했다.

新井白石은 입각점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실 열거를 시작했다. 천하대세가 아홉 번이나 변해 武家 시대가 되고, 武家 시대는 또한 다섯 번 변해 당대에 이르렀다는 말로 총론을 대신했다. 그 끝에 按說을 달아 권력을 남용하다가 망했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권력의 타당성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綱과 目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正統 판정을 천황의 혈통이 이어졌다고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정당한 통치 여부는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혈통주의를 역사가 이해의 근간으로 삼아 일본은 우월하다고 했다. 

유학자가 <神皇正統記>의 神道 사고를 이어받아 확인했다. 그 이유가 식견 부족에 있다면, 유학자일 수 없다. 幕府를 드나들며 유학자 직분을 수행한 것이 사기 행각이다. 將軍이나 그 주위 권력자들을 깨우쳐주려고 하지 않고, 듣고 싶어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처세의 요령으로 삼아 사기 행각을 했다. 이 점을 명시하면 잘못이 더 크다고 여겼음인지, 序는 쓰지 않았다. 

교정을 하고 <讀史餘論>을 다시 낸 萩原裕가 자기가 쓴 敍(서)를 앞에 내놓았다. 명시하고 싶지 않은 것을 명시해, 도와주면서 난처하게 했다. 거기서 말했다. 역사를 보면 일본은 우월하고, 중국은 열등하다. 일본은 神의 나라이고, 중국은 神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면 중국은 鬼의 나라”라고 하지는 않았다.) 한 말을 직접 들어보자. (박경희 역, 2015에서 가져온다.) 

 

중국사는 “권모와 사술”, “경망스러운 말로” 온통 부당하게 전개되다가, “이민족과 辮髮(변발)의 영역으로 변했다.” “皇朝 우리나라는 아주 먼 옛날부터 여러 왕이 통일하여서 저 군웅과 도적들이 분열과 약탈하는 것이 같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반석 위에 두고 인민을 윤택하게 하여 이백 년 동안 문명의 변화를 번성하게 했다.” 그래서 중국의 불행과 일본의 행복이 너무 다르다고 했다.   

李瀷과 安鼎福이 중국과 한국은 대등하다는 것, 新井白石과 萩原裕가 중국은 열등하고 일본은 우월해 차등이 크다는 것은 아주 다르다. 하나는 대등론이고, 또 하나는 차등론이다. 이 둘은 사실이 아닌 관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新正白石은 유학자로 자처하고 성리학을 한다면서 중국사는 부당하게, 일본사는 정당하게 전개되었다고 하는 차등사관을 보여 표리가 달랐다. 

公家(쿠케, 공가)와 武家(부케, 무가)의 쟁패나 이중 지배가 이유는 말하지 않고 훌륭하다고 하다가, 이따금  딴소리를 했다. 按說(안설)에서 사소한 시비를 장황하게 펴는 가운데 사태의 진상을 알아차리는 말을 토로했다. 고유명사는 생략하고, 띄엄띄엄 인용한다. “대대로 이어온 친분을 버리고 조정에 소속하여 집안을 일으켰고 얼마 후에는 조정에 모반하여 서로 싸워 천지를 어지럽혔다.”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으나 천하는 결국 진정되지 않았으며 군신ㆍ부자ㆍ형제가 서로 싸워”. 각자의 울분을 풀려고만 생각하던 무리들, 그렇기 때문에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박경희 역, 316-317면)

 

新正白石은 이런 按說을 써서 복잡하게 얽힌 사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보충설명을 하기만 했다. 엄정한 기준을 내세워 잘못을 나무라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칼찬 사무라이 맨 아래 등급의 하급무사에 글하는 전문가가 있어, 직분을 조심스럽게 수행해야 하고, 國政大事(국정대사)에 관한 논의는 삼가야 했다.

 

3

安鼎福은 관직을 담당하지 않고 布衣(포의)로 있는 在野(재야)의 文士(문사) 선비였다. 유학의 이치를 심오하게 탐구하고 돈독하게 실행해 천하의 스승이 되고 만민이 잘사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사명감을 가졌다. 잘못을 나무라는 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을 들면 노비 천대이다. 

956년(고려 광종 7년)에 큰일이 있었다. 주요한 奴婢按檢法(노비안검법)을 실시해 良民(양민)이던 奴婢는 원하면 按檢이라는 검증을 거쳐 원래의 신분을 되찾게 했다. 이 일을 다각도로 다룬 것을 주목할 만하다. 먼저 당장 일어난 반론을 들었다. “노비가 있어 풍속의 교화가 이루어졌다”, 노비를 풀어주면, “뜻을 얻어서 주인을 배반하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가 크게” 일어난다고 한 말도 옮겼다. 

토론할 준비를 갖추고, 柳馨遠의 선행 견해를 들었다. “노비의 이름은 본디 죄를 지은 자를 沒入(몰입)시킨 데서 비롯되었고, 죄없는 사람을 노비로 삼는 일은 옛날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죄가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고 世系(세계)만 따져 百代(백대)라도 부려먹는다.” “사람은 같은데, 어찌 재물로 삼는가?” 이어서 자기 말을 길게 했는데, 요점을 셋으로 간추릴 수 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노비가 대대로 이어지는 법은 실로 王政에서 차마 못할 바이다. 어찌 한 번 賤籍에 들어가면 百代토록 면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하고 탄식했다. 그 다음에는 노비는 원래 죄지은 사람이었다고 한 柳馨遠의 말을 풀이했다. 도적질한 죄수나 침공한 오랑캐 포로를 노비로 삼고, 그 벌이 본인에게 그치고, 자식에게 이어지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끝으로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적극적인 대책을 말했다. 원문을 들면 “雖經一大變更 無貴賤之可言 然後 王者出而制之”라고 했다. 직역하면, “비록 일대변혁을 거쳐 귀천은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연후라도, 임금이 나타나 이것을 제지해야 한다”이다. 부분적인 개혁은 소용이 없고,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한 말이다. 

노비만 없애려고 하지 말고, 귀천이 없다고 해야 한다. 차등론을 버리고 대등론이 타당하다고 하는 대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말만 바꾸어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행을 해서 잘못을 타파해야 한다. 실행을 하려면 王者(왕자)라고 한 지도자가 출현해야 한다.  

고려 光宗이 奴婢按檢法를 실시한 것을 두고 이렇게까지 말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과도한 공상이다. 자기 시대에도 계속 심각한 노비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의 우리와 토론하자고 한다.

일본에서는 鎌倉幕府(카마쿠라바쿠후)가 1225년에 처음, 1239년에 다시 人身賣買禁止令(인신매매금지령)을 낸 것이 획기적인 의의 있다. 역사 기록에 그 내역이 분명하게 전한다. 두번째 금지령 서두를 들면, “인륜을 매매하는 짓을 거듭 금지하고 제지한다”(人倫賣買事 禁制重之) 하고, “굶주리는 탓에, 처자나 권속을 팔아 자기 목숨 보존에 보태기도 하고, 몸을 가별하고 후덕한 집에 넘겨준 것을 살아갈 방도로 삼기도 한다”(而飢饉之比 或沽却妻子眷族 助身命 或容置身於富徳之家 渡世路之間)고 했다. 인신매매 금지에는 기존 매매 무효화가 수반되었을 것이다.

이 자료를 길게 소개하는 이유는 <讀史餘論>의 미비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데 있다. <讀史餘論>은 1225년 가사에 권력자 누가 죽었다는 말만 있다. 1239년 기사는 없다. 人身賣買나 그 禁止令에 관해서는 전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앞뒤의 다른 대목뿐만 아니라 책 전체가 권력자들의 쟁패 기록이고, 피지배 민중의 삶은 취급하지 않았다.

 

4

<東史綱目>과 <讀史餘論>의 거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너무 큰 질문이므로 셋으로 나눈다. (가) 18세기 당시, (나) 20세기 근대 사학과 관련해, (다) 미래의 학문을 위해 이 둘의 거리를 각기 이해하고 평가하기로 한다.

(가)에서는 둘의 거리가 동아시아문명권 중간부와 주변부의 수준 차이이다. (나)에서는 일본이 <讀史餘論>의 전례를 버리고 서양의 실증사학을 수입했다. 한국은 그것을 다시 수입해 <東史綱目>의 전례도 버렸다. 둘의 거리가 망각되고, 무의미해졌다.

(다)에서는 서양 근대의 창안물인 실증사학이 청산의 대상이 된다. 그 대안을 <讀史餘論>에서는 찾을 수 없고 <東史綱目>에서 찾아야 한다. <東史綱目>이 <世界史綱目>이게 히는 확대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구하고 토론하자.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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