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민, 유럽중심주의를 파헤치다
상태바
아민, 유럽중심주의를 파헤치다
  • 최일성 한서대·정치학
  • 승인 2023.10.21 2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옮긴이에게 듣는다_ 『유럽중심주의』 (사미르 아민 지음, 최일성·조현수 옮김, 서강대학교출판부, 390쪽, 2023.09)

 

이 책은 사미르 아민(Samir Amin)이 2008년에 발표한 Modernité, Religion et Démocratie를 완역한 것이다. 아민은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이다. 주변부의 저발전 문제를 파헤친 논문으로 1957년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양극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사이의 지배와 종속, 착취와 수탈의 관계를 더욱 심화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그는 이러한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주변부를 근대화하고 중심부를 따라잡게 할 것이라는 서구 측의 주장이 자의적이고 신화적인 ‘유럽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민이 발표한 저술들 가운데 본 저술의 학술적인 가치는 무엇보다 유럽중심주의의 실체를 밝히고, 그것의 하위 이데올로기를 제시했다는 데 놓인다. 통념적으로 유럽중심주의는 유럽인에 의해 만들어진 유럽 중심의 세계관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단순한 유럽 중심의 세계관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기원을 유럽에서 찾으며 그 과정을 인류의 보편사로 등재하기 위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역학이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중심주의는 인류 문명사에 ‘영원한 유럽’, ‘보편적인 유럽’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정초하기 위한 자의적이고 신화적인 시도와 긴밀하게 결탁한다. 이러한 유럽중심주의는 필수적으로 ‘타자’ 혹은 ‘주변부’에 대한 자의적이고 신화적인 구성을 동시에 강요하며, 또한 주변부가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면 유럽의 기적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요컨대 주변부도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단일하면서도 불가결한 역사관으로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아민이 드러낸 유럽중심주의의 실체이다.

아민은 이러한 유럽중심주의에 다음과 같은 하위의 이데올로기가 내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먼저, 자본주의 체제의 기원이 이미 오래전 유럽 문명에 맹아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이른바 ‘자본주의 기원론’이다.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의 등장이 마치 유럽의 창조물인 양,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어낸 주체가 바로 유럽이고, 더 나아가 유럽에서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목적론으로 표출된다. 게다가 이러한 목적론은 아민이 지적하고 있듯이 동방 문명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로마’ 문명이 유럽문화의 뿌리라거나, 거기에서 유래한 민주주의나 과학적 합리성 등이 유럽의 발명품이라는 신화를 통해 보강된다. 이로부터 그리스·로마 문명 대한 동방(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랍 등)의 기여는 완벽하게 삭제된다.

 

                                                         Samir Amin (1931-2018)

둘째, 자본주의 체제가 유럽의 우월성·예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이른바 ‘유럽예외론’이다. 아민에 의하면, 이 이데올로기는 인종적 우월성과 문화(기독교)적 예외성이라는 가설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이른바 ‘유럽의 기적’을 실현했다는 신화로 표출된다. 그런데 아민이 보기에 인종주의와 기독교 예외성은 목적론적 기원을 공유하는 허구적인 가설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동방에 기원을 둔 그리스 문명을 유럽의 계보로 편입하기 위해 유럽인은 유전학적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유럽/비유럽’의 구도를 만들어내야 했으며, 동방에서 탄생한 기독교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기 위해 기독교와 여타 종교(특히 ‘이슬람교’)의 관계를 ‘문명/비문명’ 혹은 ‘과학/비과학’으로 재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민은 이러한 목적론이 ‘이성(그리스)’과 ‘신앙(기독교)’을 동시에 전유하려는 유럽중심주의의 자의적인 조작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 지점에서 아민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이 과연 주변부의 역사이론이자 해방담론이 될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한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는 관련 국가들을 동질화·균질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인 양극화로 이끌었다. 그런데도 역사유물론의 지배적인 사상체계는 오늘날 지구적인 차원에서 관찰되는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양극화 문제를 논제에서 가볍게 소외시켰다. 게다가 그러한 양극화가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유럽중심적 가설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양극화는 주변부 국가의 ‘내부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통해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해결될 것이며, 그 결과 중심부를 향한 주변부의 이른바 ‘따라잡기’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거리낌 없이 단정한다. 따라서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본연의 임무에도 불구하고, 주변부의 빈곤 상태가 마치 ‘발전을 향해 이행 중’에 있다는 소위 ‘발전주의’ 담론과 유사한 성격을 띠게 되며, 더 나아가 주변부 국가가 지구화된 자본주의 체제에 더욱 빨리 통합될수록 유리하다는 유럽중심주의에 굴복하고 만다. 아민은 이러한 실패가 역사유물론에 내재한 유럽중심주의에 기인한 것이며, 그것이 역사유물론을 주변부의 역사와 유리된 추상적·철학적 담론으로 나아가게 만든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민은 역사유물론의 우선적인 과제가 유럽자본주의를 넘어 세계체제적인 수준에서 관찰되는 자본주의를 분석대상으로 삼는 데 있다고 본다. 달리 말해 유럽의 역사와 그들의 물질적 성취에 경도된 이른바 ‘유럽자본주의’만을 모델로 삼을 것이 아니라, 주변부를 포함한 세계체제적 수준의 자본주의를 대상으로 그것의 파괴적인 효과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현실자본주의’라고 명명하고, 그것의 본질적인 성격을 양극화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그는 분석대상을 유럽자본주의에서 현실자본주의로 전환하고, 유럽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필요했던 ‘가치’의 개념을 현실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필요한 ‘세계화된 가치’의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이 오늘날 역사유물론이 당면한 첫 번째 과제라고 주장한다.

현실자본주의에 대한 아민의 문제의식은 곧바로 자본주의 이행 논쟁을 겨냥한다. 만일 오늘날 지구적인 수준에서 관찰되는 자본주의가 유럽자본주의(동질화)가 아니라 현실자본주의(양극화)이라면, 역사유물론 역시 유럽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아니라 현실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역사유물론은 인류의 문명이 유럽이라는 환경에서 봉건제를 거쳐 정상적이고 온전한 방식으로 자본주의로 이행했다는 논리만을 펼칠 뿐, 중심부의 ‘착취’와 ‘침탈’로 점철된 주변부 자본주의의 형성과정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아민은 ‘유럽자본주의(동질화)’로의 이행이 아니라 ‘현실자본주의(양극화)’로의 이행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전(前)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개념을 마련하는 것이 역사유물론의 두 번째 과제라고 본다. 이때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봉건제에서 (유럽)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했느냐는 기존의 질문이 아니라, 유럽에서는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자본주의가 발전했는데 반해 주변부에서는 그렇지 못했느냐는 ‘비대칭’ 혹은 ‘불균등’에 대한 질문이 된다. 아민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 이른바 ‘공납제 생산양식’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마련될 수 있다고 본다.

아민이 보기에 유럽의 봉건제는 공납제 생산양식의 후진적·주변적인 형태에 불과한데, 오히려 그러한 후진성 덕분에 비교적 제한 없이 자본주의 체제로 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파악한다. 실제로 유럽의 봉건제는 정치적으로 강력했던 중앙집권적 공납제 사회―중동, 인도, 중국 등과 같은―가 아니라, 그러한 정치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 주변부 공납제 사회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럽은 상대적으로 뒤처졌지만, 반대로 유연성―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차단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에서―을 지닐 수 있었고, 이러한 유연성 덕분에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더욱 폭력적이었다는 논리이다. 이에 비해 중심부 공납제 사회(중동, 아랍, 중국 등)는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일화를 이룬 유럽과는 달리 이행과정에서 강력한 정치력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제동이 걸렸다는 것이다. 공납제 생산양식의 이러한 성격 차이가 자본주의로 이행과정에 차이를 만들어냈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중심부와 주변부의 위상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변부의 근대화 과정을 아민이 ‘전도된 근대화’로 명명한 이유이다.

이제 역사유물론은 아민과 함께 새로운 논쟁에 돌입한다. 그것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아민의 비판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정초하려는 새로운 역사유물론에 대한 전망을 포함한다. 만일 우리가 유럽자본주의의 역사적 특수성을 인식한다면, 혹은 유럽이 발전시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영원하지 않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자본주의가 인류를 통합시키기보다는 분열시켰다는 사실(현실자본주의)을 인식한다면 진정으로 보편적인 역사유물론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민의 기대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기대에서 아민은 자신이 해명하고자 노력한 주변부와 역사유물론의 상관관계를 심도 있게 파헤친다.

 

최일성 한서대·정치학
한서대 국제관계학과 및 자유전공학부 교수.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정치이론, 정치인류학, 정치철학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 역사유물론과 유럽중심주의: 사미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 비판을 중심으로」, 「상고르의 ‘아프리카 사회주의’와 권위주의」, 「‘비서구 저항담론’으로서 세제르의 탈식민주의 비평, 그 가능성과 한계」, 「범아프리카주의, 사해동포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등이 있으며, 저술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말리의 역사』, 『세네갈의 역사(근간)』 외 다수가 있다. 최근에는 탈식민주의 정치학자의 정치사상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