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를 가르친다? -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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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가르친다? -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라는 책
  • 오항녕 전주대·사학
  • 승인 2023.10.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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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대학연의보 [4] : 권20~권27』 (구준 지음, 윤정분·오항녕 옮김, 세창출판사, 400쪽, 2023.08)

 

1.

《대학》은 참 불친절한 책이다. 8조목 앞에 3강령이 있다. 3강령은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한다[新民]’, ‘지극한 선에 머문다[止於至善]’이다. 《대학》은 이 암호 같은 3강령, 8조목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기실 우리만 이렇게 느끼는 건 아니다. 《대학》이 필수 도서였던 시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글자 하나하나 뜻을 풀어주는 주자(朱子)의 《대학장구(大學章句)》가 필요했고, 이것도 부족해서 주자는 《대학》에 대한 Q&A 《대학혹문(大學或問)》이라는 참고서까지 편찬했다. 또 그것도 모자라 진덕수(眞德秀)는 《대학연의》를 지어 격물, 치지, 정심, 성의, 수신, 제가 등 《대학》의 8조목 중 6조목을 상세히 설명했다.


2.

그리고 《대학연의》조차 더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명(明)나라 구준(丘濬)은 치국, 평천하 2조목을 중심으로 《대학연의보》라는 거질의 학습서를 남겼다. 모두 160권이다. 1487년(성화 23)에 완성된 이 책은 저자의 ‘서(序)’와 ‘대학연의보표(大學衍義補表)’로 구성되어 있다. 책머리 ‘심기미(審幾微)’에서는 진덕수의 《대학연의》의 정심성의에 대한 보충이며, 권1에서 160까지는 치국평천하에 대한 설명이다. 조정을 바르게 하기[正朝廷], 관료체계를 바르기 하기[正百官],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기[固邦本], 나라의 쓰임을 관리하기[制國用], 음악과 문물을 정비하기[明禮樂], 제사를 정리하기[秩祭祀], 학교와 교화를 우선함[崇敎化], 규제 사항을 갖춤[備規制], 형벌을 신중히 함[愼刑憲], 군비를 엄격히 함[嚴武備], 외적을 방어함[馭夷狄], 업적을 이루는 법[成功化] 등 12항목으로 치국, 평천하를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필요에 따라 골라보면 된다. 필자가 속한 연구팀에서 한글로 번역을 모두 마쳤는데, 4, 5백 페이지 책으로 20권 전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3.

예전에 하도 인상에 남아 어딘가 써두었던 걸 인용해보겠다. 2015년 1월 12일, JTBC 저녁뉴스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었다.

 

[앵커]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걸림돌로 지적돼온 불통 논란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라며 ‘소통에 큰 문제는 없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장관들의 대면 보고가 적은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오히려 ‘대면 보고가 필요하냐’고 되물어, 현격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이승필 기자입니다.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이나 장관들로부터 좀처럼 대면 보고를 받지 않는다는 건 대표적인 불통 사례로 꼽힙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전화나 문서 보고 방식으로도 충분하다고 반박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신년구상 기자회견(오늘 오전)] : (옛날에는) 전화도 없고 이메일도 없었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그런 게 있어서 어떤 때는 대면 보고보다는 전화 한 통으로 빨리빨리 해야 될 때가 더 편리할 때가 있습니다. 대면 보고를 좀 더 늘려가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만 (배석한 장관과 수석들을 돌아보며)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흐흐흐. (앉아있던 장관과 비서관들도 해맑게 같이 흐흐흐 웃었다.)

 

역사를 통해 고찰한 바에 따르면, 이렇게 군주가 동의를 구할 때 ‘흐흐흐’ 맞장구치는 신하는 대개 간신(奸臣)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현실 속의 대한민국 장관과 비서관들 대부분이 간신이었음이 드러났고, 이렇게 ‘대면 보고가 필요하지 않았던’ 정권이 어떻게 끝났는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4.

그 뒤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매스컴에 보이는 국무회의는 소통보다 불통의 현장과 같다. 대통령만 말하고, 국무위원들은 받아 적는다. 앞에 노트북을 켜놓고도 받아 적는다. 막상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날 국무회의를 들어보면 ‘무슨무슨 대책에 만전을 기해 달라’, ‘무슨 일에 대해 엄정 대처하라’는 등 하나마나한 말이 대부분이다. 그런 말을 꼭 적어야 하나? 더 큰 문제는 대통령만 말한다는 것이다. 토론? 그런 거 없다. 그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저런 국무회의밖에 못하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토론을 즐기고 잘했다는 대통령도 재임하고 조금 지나면 예외가 아니었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 국무회의(2023. 11. 10)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5.

국무회의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왕정(王政) 시대에도 황제 또는 왕과 신하는 국무회의를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연(經筵)이라 불리는, 왕이 신하에게 배우는 제도가 있었다. 《주역》 〈태괘(泰卦)〉는 경연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태괘〉는 상하 소통의 표상이며, 경연의 상징이었다. 지천(地天 ䷊) 태(泰)이다. ‘지천(地天)’이란, 땅을 나타내는 곤(坤)괘와 하늘을 나타내는 건(乾)괘로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땅이 위에, 하늘이 아래 있다는 뜻이다. 땅과 하늘로 이루어진 괘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천지(天地 ䷋) 비(否)괘로, 하늘이 위에, 땅이 아래에 있다. 어떤 괘가 안정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지천의 괘가 태(泰), 즉 편안하다, 번영한다는 뜻이 된다. ‘나라는 번영하고 인민은 편안하다[國泰民安]’고 할 때의 그 ‘태’ 자이다. 언뜻 보면, 땅이 아래에 있고 하늘이 위에 있어야 태(泰)일 듯한데, 옛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어야 운동(運動)이 시작된다고 보았고, 편안함은 그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비(否)괘는 비(非)-소통의 괘인데, 여기서 비(否) 자는 ‘부’로 읽지 않고 ‘막혔다’는 뜻의 ‘비’ 자로 읽는다. ‘남북관계가 비색(否塞)되었다’고 할 때의 그 비이다. 땅은 아래에서 땅대로 놀면서 하늘은 상관하지 않고, 하늘은 위에서 하늘대로 놀면서 땅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운동이나 변화가 있을 리 없다. 막힌 조직이나 사회의 특징은 윗사람만 말을 하고 아래 사람은 듣기만 한다. 태괘가 보여주는 우주적 원리가 정치사상이자 제도로 표현된 것이 경연이었다.


6.

지금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소개하는 중이다. 책 제목부터 보자. ‘대학연의보’라고 했다. ‘대학연의’를 보충[補]하였다는 말이다. ‘대학연의’는 ‘대학’의 의미를 풀었다[衍義]는 뜻이다. ‘대학’은? 그렇다, 유니버시티(University)의 대학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 언젠가 들어본 《논어》, 《맹자》, 《중용》, 《대학》할 때의 그 ‘대학’이다. 《대학》은 성년이 된 사람들이 배우는 것이고, 그래서 어릴 때 배우는 《소학》에 대비된다. 《대학》을 읽어보지 않았어도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는 말은 들어보았을 터, 바로 이 책의 핵심인 8조목 가운데 4조목이다.

나머지 4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이다. 언젠가 중국의 어떤 과학대학을 가본 적이 있는데, 교문에 ‘성의 정심’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과학에 왜 성의, 정심일까 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는데, 과학이 격물, 치지니까 당연하다 싶었다.


7.

구준이라는 신하가 경연 교재, 즉 황제를 가르치기 위해서 편찬한 것이 《대학연의보》라고 이해하면 된다.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획, 계획, 조정, 분담, 협력 등이 필요해진다. 이 일상의 유지를 한 마디로 하면, 그건 ‘제도’이다. 이걸 말 위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무(武)에서 문(文)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것이다. 문치(文治)는 바람직한 어떤 것이기 이전에, 나라가 유지되려면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학습=경연은 어떤 고매한 정치이상이나 정치윤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이런 구체적인 필요성, 그 필요성을 해결해가는 실천의 하나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경연의 공부에 대한 다음 서술을 보자.

 

스스로 현인(賢人)에게서 공부하고 몸 가까이의 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저 멀리에 있는 일까지 사정을 잘 알고 주도면밀하게 정치를 할 수 있다면 그는 민중의 마음을 얻어 다투어 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지만, 진정 민중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민중을 감화시키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어가려면 반드시 배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옥도 갈아서 광택이 나게 하지 않으면 보석으로 쓰일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배워서 사물의 도리를 습득하지 않으면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나라를 세우고 백성에 임하면서 먼저 교육과 배움에 의지했던 것이다. (『예기(禮記)』 「학기(學記)」)

 

이 인용문 중에, “진정으로 민중=백성을 감화=변화시키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풍속=문화를 만들어가려면 반드시 배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는 선언이 중요하다.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문명을 이루어 나가려면 배워야 한다는 강력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8.

경연이 제도화된 데는 이런 일반론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왕정(王政)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국왕만 세습이고 나머지는 다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문과나 무과를 붙은 양반뿐 아니라, 의과(醫科)나 역과(譯科) 같은 잡과도 마찬가지이다. 일부 공신 자손 등 지금으로 치면 국가유공자의 특채인 음서(蔭敍)도 있었지만 이미 관료제가 자리를 잡았으므로 시험이 우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과 신하의 세미나 마당인 경연은 ‘실력이 검증된 신하’들과 국왕의 지적 수준을 맞추는 장치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경연을 담당했던 관청은 집현전, 홍문관이었다. 『경국대전』에는 이들이 하는 일을 ‘경서와 역사서를 공부하면서 국왕의 고문에 대비한다[講論經史, 以備顧問]’고 했다. 집현은 모을 집(集), 어질 현(賢), 훌륭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관청이라는 뜻이다. 집현전을 이었던 홍문관도 넓을 홍(弘), 글월 문(文), 문치를 넓히는 관청이라는 뜻이다.


9.

수양대군(세조)은 단종을 내쫓고 경연 관청이었던 집현전을 폐지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예종은 예전 집현전과 같은 관청을 두려고 했고, 성종은 홍문관을 설치했다. 세조가 성종의 할아버지인데, 그대로 집현전이라고 하면 할아버지의 ‘행적’, 집현전 폐지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산군(燕山君)은 경연에 내관 김순손을 대신 보냈다. 대리출석. 당시에도 대리 출석이란 게 있었는지 모르지만, 조선 경연 사상, 아니 세계 경연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잔치에는 나갔다.

광해군(光海君)은 재위 16년 동안 경연을 연 것이 10여 일에 불과했다. 첫 경연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나서였다. 추우면 따뜻할 때 하자고 하고, 날이 따뜻해지면 선선해진 뒤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국문(鞫問)에는 직접 참석해서 밤을 새웠다. 그래서 광해군 시대에는 무고한 옥사가 많았다.

 

오항녕 전주대·사학

전주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교수. 중국 연변대학교·독일 튀빙엔 대학교 초빙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동아시아 기록위원회(EASTICA) 이사,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실록이란 무엇인가』, 『후대가 판단케하라』, 『호모 히스토리쿠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조선의 힘』, 『기록한다는 것』, 『밀양 인디언』,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 역서로 『사통(史通)』, 『대학연의(大學衍義)』, 『국역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문곡집(文谷集)』, 『존재집(存齋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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