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과학인가? 유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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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과학인가? 유행인가?
  • 김병길 숙명여대·국문학
  • 승인 2023.10.21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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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에세이]

 

2030세대 연애는 MBTI에서 시작된다고 할 정도로 최근 그 호응도가 두터운 신망에 이를 만큼 심상치 않다. MBTI가 등장하기 이전 한때 대중심리학의 이름으로 혈액형 성격설이 유행했다. 알고 보니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였다. 혈액형 성격설은 일본 제국 시기 정립되어 전후 민간에서 유행하다 한국에 상륙했다. 일본의 우생학자 후루카와 다케지(古川竹二)가 주위 사람 3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논문 「혈액형에 의한 기질 연구」(1927)」가 그 기원이다. 후루카와는 홋카이도(北海道)의 순종적인 아이누족에 비해 대만 원주민에게서 O형이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들어 그들의 반항적인 기질을 설명했다. 심지어 그는 대만 원주민과 일본인의 통혼을 늘려 O형의 비율을 줄이자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식민 지배에 발 벗고 나선 제국의 우생학이다.

‘O’라는 인간이 있다. 그는 중학 시절 악질 교원을 배척하고 교규를 바로 잡자며 동지들과 약속한 동맹 휴학을 일 년간 월사금 면제라는 조건에 매수되어 밀고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는 아픈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하자는 아내를 향해 일본말로 “홋또께요(내버려둬)!”라 외쳤다. 노인은 몹시 앓는 소리를 했고, 할머니는 영감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해방되던 날 ‘O’는 “좋긴 개뿔이 좋아?”라 고함쳤다. 일본인들이 모조리 전쟁에 끌려간 기회를 틈타 시학(視學, 학교 교육이나 경영을 시찰) 자리를 노리고서 술과 과자를 사다 로비했건만, 그 결말이 나던 날 아침 해방으로 깻박쳐서다. 군정 세상이 되어 영어가 한몫을 보게 되자 영어에 능통한 그는 지프차를 타고 양담배를 얻어 피우고 껌을 씹는 허영을 부렸다. 한 개 깡통을 위해 오천 년간 준수해 온 민족의 피를 더럽히는 일도 사양치 않았다. 깡통과 레이션(ration, 보급품)을 얻고자 외국 군인한테 남의 처녀까지 데려다 바쳤다.

혼인에는 별로 가지 않는 ‘O’가 초상이 났을 때는 며칠씩 가서 밤샘했다. 남의 기억에 남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사람을 이십여 명이나 풀고 지프차를 네 대나 대어서 부고를 일일이 전했다. 본인은 친절이라고 말하나 실상은 부의금을 강요한 처사였다. 그런가 하면 요릿집에 다니며 자고 해도 아내 이외의 여성과 입술 한번 대어 본 적 없노라 성현인 듯 말하며 다른 여성을 경험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서슴지 않았다.

미국 유학의 기회가 오자 ‘O’는 경쟁자 ‘S’씨와 ‘M’을 모략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여러 사람이 ‘M’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일자, 이를 눈치채고서 ‘M’이 막대한 돈을 공산당에 제공했다고 모함해 두 달 동안이나 고생시켰다. 다음으로 예상치 못한 ‘A’ 박사가 물망에 올랐다. ‘O’는 자신을 중매해 준 생불 같은 ‘A’ 박사를 요로에 다니며 6·25 때 부역이나 한 듯 중상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O’는 통계학자로 금의환향한다.

장차 국장이 될 ‘O’를 축하하기 위한 환영회 날 그의 아내는, “O형의 인간이시여 길이길이 복되소서. 거짓과 더불어 길이길이 위대하소서. 그리고 길이길이 출세하소서, 거짓과 더불어”로 끝맺은 편지를 남기고서 떠난다, ‘O’의 인생에서 가장 호화로운 희망의 날에. 단편 「O형의 인간」(1953)은 그렇게 끝난다. 왜정 때 황국 신민은 피를 나라에 바쳐야 한다고 혈액형을 검사했다. ‘O’는 자신의 혈액형을 B형이라 말했지만, 아내는 O형이리라 생각했다. 알파벳으로 ‘오’지만 숫자로는 영(零, 수가 전연 없음)으로도 읽을 수 있어서다. 인간성과 진실성이 영이라는 의미에서다. 성이 ‘오’ 씨라서가 아니다. 본명 ‘오성근’, 그가 바로 ‘O’형의 인간이다. 이 「O형의 인간」은 이무영의 대표작이다.

농민문학의 선도자로 추앙받던 작가 이무영은 오늘날 고향에서 ‘음성의 수치’로 비난받는다. 이 반전의 역사를 보며 우려되는 점은 친일 여부가 한 작가의 창작 성과를 예단하고 외면하는 전가의 보도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무영의 문학도 그로부터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문제는 「O형의 인간」과 같은 작품 또한 이무영 창작 여정의 한 이정표라는 사실이다. 부끄러운 과거를 직시할 용기가 없다면 우리는 역사의 반쪽을 망실하고 말 일이다.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기는커녕 오히려 황송하다며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 시인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2020년대 MBTI가 등장하면서 혈액형 성격설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MBTI의 인기에 밀려서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대중이 혈액형 성격설을 사이비 과학으로 인식해서다. 혈액형 성격설의 몰락을 보건대, MBTI 역시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유행에는 성쇠가 있을지라도 기억과 망각이라는 야누스의 역사는 그 시류의 증언자로 굳건해야 할 터, 이무영의 「O형의 인간」을 이참에 새삼 꺼내 읽어 본 이유다. 

 

김병길 숙명여대·국문학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 현대소설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역사소설, 자미에 빠지다》, 《역사문학, 속과 통하다》, 《정전의 질투》, 《우리말의 이단아》, 《우리 근대의 루저들》, 《우리 소설의 비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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