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 현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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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 현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10.21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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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제17강_ 정병기 영남대 교수의 「포퓰리즘의 등장과 확산」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열 번째 시리즈 ‘오늘의 세계’ 강연이 매주 토요일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섯 섹션 총 5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 공동체에서부터 개인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지금 여기의 어젠다를 새로운 시선으로 담론의 장을 펼친다. 오늘의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추이를 점검해보는 세 번째 섹션 ‘오늘의 정치와 경제’  제17강 정병기 교수(영남대 정치외교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포퓰리즘 – 현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정병기 교수는 “정치 경제적 관점”에서 “경제적 위기의 산물로 이해”되는 한편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는 자유 민주주의 위기의 산물로 이해”되는 포퓰리즘에 대해 “자본주의 구조와 민주주의 질서의 변화를 함께 천착함으로써” 보다 “입체적”인 이해를 시도한다. 그를 위해 먼저 “포퓰리즘의 접근법과 개념을 살펴보고, 민주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는 데 이어 나름의 “새로운 이해 방식을 제시”한다. 이를 토대로 하여 “포퓰리즘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과 유형 변화를 고찰”해보고 “민주주의의 변화와 그에 대한 포퓰리즘의 대응”을 검토한다. 끝으로 “한국의 포퓰리즘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 후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중심으로” 들여다보되, 한국 포퓰리즘을 두고는 “대중의 포퓰리즘 성향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포퓰리스트라고 지칭할 만한 정당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밝히고” 향후 펼쳐질 그림도 전망해본다. 

 

지난 9월 16일, 정병기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오늘의 세계>의 1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포퓰리즘은 정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생겨났으며, 정치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 질서에서 발흥했다. 그에 따라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관점은 크게 정치 경제적 입장과 정치 사회적 입장으로 나뉜다. 정치 경제적 관점에서 포퓰리즘이 경제적 위기의 산물로 이해되는 반면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는 자유 민주주의 위기의 산물로 이해되었다. 이 글은 자본주의 구조와 민주주의 질서의 변화를 함께 천착함으로써 정치 경제적 시각과 정치 사회적 시각을 종합해 포퓰리즘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1. 포퓰리즘의 개념과 접근 방법

2000년대 이후 정리된 접근법들은 포퓰리즘 개념의 최소화를 통해 보편적 핵심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했는데, 무데(Cas Mudde)와 로비라 칼트바서(Cristóbal Rovira Kaltwasser)의 정의가 대표적이다. 이데올로기 접근법을 따르는 이들에 의하면, 포퓰리즘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thin-centered) 이데올로기”다.

이 글에서는 무데와 로비라 칼트바서의 최소 정의를 다시 최소화해 포퓰리즘을 “사회를 인민과 엘리트라는 두 진영의 대립 구도로 파악하며, 정치는 인민의 의사를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념”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는 포퓰리즘은 인민과 엘리트의 대립 구도라는 사회관, 가능한 한 인민 직접 정치를 추구한다는 정치관 그리고 엘리트에 대립되는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인민관을 보편적 핵심으로 한다. 이때 정치관은 ‘가능한 한’이라는 수식어에서 보듯이 대의 정치를 수용할 수 있음을 유보 요건으로 하며, 인민관은 ‘보통 사람들’의 구체적 규정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내포한다. 포퓰리즘의 역사적 유형은 이 정치관과 인민관의 변화에 따라 양상을 달리해왔다.

 

2. 민주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현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democracy=demos+kratos)를 직역한 ‘인민의 지배’라는 개념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인민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치하는 체제와 이념으로 이해해 ‘인민의 자치’라는 개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 ‘인민의 자치’는 ‘모든 사람 혹은 개인이 지배받지 않을 자유로운 상태’와 ‘어떠한 개인도 지배할 특권을 갖지 않는 평등한 상태’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핵심적 내포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라고 보아야 한다. 이 개인주의는 자유 시장과 기업의 자유로 연결되는 경제 중심적 사상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각인이 갖는 자유와 평등을 핵심 가치로 삼는 사상을 말한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함축하는 민주주의 개념에서 ‘자유’를 떼어내 특별히 강조함으로써 평등 가치를 약화시키며, 현대 자본주의 질서에서 그 ‘자유’의 내용은 소유적 개인주의와 경제적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논할 때에는 전략적으로라도 민주주의를 최소한으로 정의하고 자유 민주주의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민주주의를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보장되는 질서와 그 이념’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구분해 자본주의 체제 내의 현실 민주주의를 지칭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협의로는 그 현실의 시기에 따라 구분해 사회 민주주의 동의 구조가 형성되기 이전 자본주의 시기[고전적 자유주의 혹은 구(舊)자유주의 시기]에 한정하는 의미로서 ‘구(舊)자유 민주주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한다.

1950-70년대까지 중북부 유럽 국가들은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사회 민주주의 동의 구조를 형성해왔다. 사회 민주주의가 지배하던 시기도 자본주의 질서를 벗어난 것이 아니므로 큰 틀에서는 자유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구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구분하듯이 사회 민주주의 시기를 별도로 지칭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사회 민주주의 시기의 민주주의를 사회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이후의 민주주의를 신자유 민주주의라고 지칭한다.

 

3.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과 포퓰리즘의 유형 변화

현대 포퓰리즘은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변화에 따라 세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 유형이 1920-40년대에 발흥한 구포퓰리즘(paleopopulism)이며, 둘째 유형이 1970-80년대에 생겨난 신포퓰리즘이고, 마지막 셋째 유형이 2000년대 이후 발흥한 포스트포퓰리즘(postpopulism)이다.

               <표 1> 포퓰리즘의 역사적 유형 변화와 성격 – 출처: 포퓰리즘의 등장과 확산: 열린연단

포퓰리즘은 ‘약한 이데올로기’라는 특성으로 인해 다른 이데올로기나 정치 전략 및 성향과 쉽게 결합한다. 특히 극우 포퓰리즘, 우파 포퓰리즘,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비근한 용어에서 보듯이 현대 포퓰리즘은 체제 이데올로기 및 극단-온건 성향과 자주 결합한다. 그 결합에 따라 현상하는 현대 포퓰리즘의 구체적 유형을 도형으로 표시하면 <그림 1>과 같다.

                                                    <그림 1> 현대 포퓰리즘 스펙트럼

‘인민 직접 정치’-(중첩)-‘엘리트 대의 정치’가 극단-(단순)-온건 축과 결합할 때는 대개 세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다. 이 도식에서 극단은 폭력적 집단주의(특히 국가주의)를 공유하는 것으로 상정되며, 그에 따라 온건은 좌와 우의 중도라는 의미보다 극단에 반대하는 의미로서 국가주의나 폭력적 집단주의에 대립하는 경향을 말한다. 중간의 영역은 오히려 극단과 온건 사이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단순’의 영역으로 좌-우 축과 결합해 좌파와 우파라는 부채꼴로 나타나며 ‘인민 직접 정치’-(중첩)-‘엘리트 대의 정치’ 축의 세 영역에 모두 걸친다.

좌와 우는 각각 사회 경제주의와 시장 경제주의를 지향하는 이념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회 경제주의는 사회주의(계획 경제)와 케인스주의(복지 국가)를 포괄하는 개념이고, 시장 경제주의는 자유 시장 경제를 최고 가치로 하는 이념을 뜻한다. 그림에서 좌-우 진영은 극좌파, 좌파, 온건 좌파, 온건 우파, 우파, 극우파로 세분되어 여섯 개의 부채꼴로 나타난다. 이때 좌파와 우파는 다른 세력에 비해 두 배의 면적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온건과 극단을 다시 좌파와 우파로 나누었기 때문일 뿐이며, 면적의 크기가 세력의 크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민 직접 정치는 엘리트 대의 정치와 대립하지만 중간에 중첩되는 영역이 존재한다. 포퓰리즘은 인민 직접 정치를 기본 이념으로 하지만 대의 정치도 수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역이 바로 중첩의 영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엘리트 대의 정치만 추구하는 영역으로서 빗금이 없는 부분은 포퓰리즘 영역이 아니다.

‘단순’의 영역(‘좌파’와 ‘우파’)을 제외하면, 인민의 일반 의지에 근거를 두는 집단주의는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전일적 엘리트 대의 정치와 결합하기 어렵다. 반대로 인민의 전체 의지에 기반을 두고 다양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는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하고 단일한 인민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전일적 인민 직접 정치와 결합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집단주의에서 전일적 엘리트 대의 정치(두 가지: 온건 좌파 엘리트 대의 정치, 온건 우파 엘리트 대의 정치), 그리고 개인주의에서 전일적 인민 직접 정치(두 가지: 극좌파 인민 직접 정치, 극우파 인민 직접 정치)는 제외된다. 반면 집단주의에서 ‘좌파’가 엘리트 대의 정치와 결합하고 개인주의에서 ‘우파’가 인민 직접 정치와 결합해 경우의 수에 다시 포함된다.

따라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에서 경우의 수는 각각 2×3×2-2+1=11이며,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를 합한 전체 경우의 수는 22다. 태극 문양은 이 4차원 모형을 2차원 공간에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이 글의 최소 정의에 비추어볼 때, 선이 그려지지 않은 아랫부분은 포퓰리즘에 속하지 않으며, 중간 부분과 윗부분에 선이 그려진 17곳만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포퓰리즘은 네 가지 축에 모두 걸쳐 있으며, 그 양상에 따라 세 가지 현대 포퓰리즘 유형의 개별적 속성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우파 포퓰리즘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극단과 온건 및 단순, 인민 직접 정치와 엘리트 대의 정치 및 중첩 중 어디에도 속할 수 있으나, 정치 경제적 이데올로기상으로는 시장 경제주의를 고수한다. 반대로 좌파 포퓰리즘도 여러 차원 중 사회 경제주의만을 고수한다.

<그림 1>에서 구포퓰리즘은 윗부분 가로선으로 표시된 영역이어서 전일적 인민 직접 정치를 추구하는 집단주의 경향을 띠고, 신포퓰리즘은 중간 부분에 세로선으로 표시된 영역이므로 엘리트 대의 정치를 일부 수용하는 집단주의 경향을 의미한다. 포스트포퓰리즘은 윗부분과 중간 부분에 엇격자 무늬가 있는 영역이어서 집단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에 속하며, 전일적 인민 직접 정치를 추구하는 경향과 일부 엘리트 대의 정치를 수용하는 경향이 공존한다.

 

4. 대의 민주주의의 변화와 포퓰리즘의 대응

포퓰리즘은 사회 운동으로 출발하더라도 대부분 정당 정치로 귀결된다. 정당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가 가능한 경쟁적 정당 체제가 존재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경쟁 정당 체제는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의회에 진입한 기성 정당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의 의회 진입을 가로막고 자신들만의 카르텔 구조를 수립해 대의 정치를 왜곡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구체적 과정은 계급 정당의 국민 정당화, 포괄 정당화와 선거 전문가 정당화다.

신포퓰리즘 등장 이후 포퓰리즘 변화와 관련해 중요한 시기는 세 시기로 나뉜다. ① 제2차 대전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의 사회 민주주의 동의 구조 시기, ② 1970년대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의 신자유 민주주의 동의 구조 시기, ③ 2000년대 이후 포퓰리스트 민주주의가 신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시기다.

계급 정당의 국민 정당화는 정책 측면에서 포괄 정당화로 이어지고 조직과 행태 측면에서 선거 전문가 정당화로 이어졌다. 대변 계급 설정이 사라지고 계급 이데올로기가 약화됨으로써 국민 정당들은 득표율 제고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중도화 추세가 강화되어 주요 정당들이 백화점식 강령으로 중도층을 공략하는 포괄 정당(catch-all party)과 선거 전문가를 중심으로 당과 선거 조직을 꾸려 나가는 선거 전문가 정당으로 변해간 것이다.

정당 체제 변화가 마지막에 이른 지점은 당내 과두제와 연결된 카르텔 정당 체제다. 이미 20세기 초부터 지적되었던 과두제 현상은 ‘유권자에 대한 선출된 자의 지배, 위임자에 대한 수임자의 지배, 파견자에 대한 대표자의 지배’를 의미하는 관료적 권위주의를 의미한다. 현대 정당 체제에서 이 현상이 선거 전문가 정당화와 결합해 기성 정당들 간 제휴 체제를 말하는 카르텔 정당 체제로 귀결된 것이다. . . . . 

카르텔 구조로 귀결된 정당 체제 변화는 정당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초래했다. 정당 혐오증 혹은 정치 혐오증으로 불리는 이 현상은 정당으로 대표되는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주의할 것은 정치ㆍ정당 혐오증이 대의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판단은 투표 참여율과 기성 정당 지지율의 절대치가 아직 높기 때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적어도 직접 민주주의 요소로 대폭 수정되거나 다른 형태의 대의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포퓰리즘과 연결해 거론할 만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치ㆍ정당 혐오증을 배경으로 정당 대의 정치를 비판하며 등장한 대표적 대응 방식인 포퓰리즘이 대의 정치를 수용하면서 그 수정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5. 한국의 사례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

한국은 포퓰리스트 전체의 비중이 낮지 않으며 특히 포스트포퓰리스트의 비중이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치에서는 서구나 남미에 비해 포퓰리스트 정당이나 정치인이 뚜렷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포퓰리즘 투표 행태가 존재하지만, 이 투표를 수용할 만한 정치 행위자가 없다.

대중적 요구와 정치적 반응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에는 구조적 요인도 작용한다. 분단이라는 요인 외에도 지역주의 등 한국 정당 정치사의 고유한 정치 균열 구조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요인들이 상당할 정도로 약해지거나 해소되지 않는다면, 포퓰리즘이든 포스트포퓰리즘이든 주요 정치적 흐름으로 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압축적인 발전도 한 가지 요인이 된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경제가 압축적으로 발전해 계층 상승의 기회는 크게 좁아지거나 대부분 사라져 이른바 ‘안정된’(경직된) 계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압축적 발전 과정을 경험한 대중들은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계층 상승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에 따라 포스트포퓰리즘 성향이 실제 투표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이미 엘리트 대의 정치의 한계와 계층 상승의 환상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불안한 결합에 생겨난 틈이 더욱 커져가는 것이다. 대의 정치의 한계는 단지 대의 민주주의의 엘리트주의화라는 왜곡 현상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그림자라는 캐노반(Margaret Canovan)의 비유는 구세적 민주주의와 실용적 민주주의의 구분을 고려할 때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자유 민주주의자는 포퓰리즘의 도전을 ‘대표의 위기’로 보고 집합적 정치 주체로서 인민의 범주를 성급히 해체하고자 한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 이론가는 이 문제를 의제화하는 데 기여하지만, 미분화된 인민의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해 반민주적 경향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들이 동일하게 범하고 있는 오류는 자유와 평등을 동등한 가치로 내포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포스트포퓰리즘이 개인주의 인민관을 수용해 다원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적어도 신포퓰리즘 등장 이후의 포퓰리즘은 대의 민주주의 범주 안에 존재하는 다른 하나의 민주주의 유형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신포퓰리즘이 자유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면, 개인주의 인민관까지 수용한 포스트포퓰리즘은 다원적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개인주의에 기반한 포스트포퓰리즘도 체제 이데올로기와 결합해 엘리트뿐 아니라 다른 소수자 집단까지 배제하는 배타적 포퓰리즘으로 발전할 수 있다. 포퓰리즘이 상정하는 대립 구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측면이라기보다 대의제의 모순과 관련된 구체적 측면으로서 현상적(現象的) 측면의 하나다. 포퓰리즘 현상을 경시해서도 안 되지만 근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으로 착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를 해소하려 하기보다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그 구도가 온존하는 가운데 엘리트에 대항해 인민을 대변한다는 이념이다. 엘리트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제대로 대변하는 엘리트를 선택한다는 자가당착적 논리를 배태한 것이다. 포퓰리즘의 이데올로기성이 약한 것은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에 대한 근본적 탐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대립 구도가 사라진 사회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집단의 대립이 갖는 근본 성격을 규명하고 그 대립 구도가 궁극적으로 사라진 자치 질서를 상정하는 이데올로기와 결합할 때 포퓰리즘은 유용할 수 있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포퓰리즘의 등장과 확산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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