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시작하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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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시작하는 민주주의
  • 최태현 서울대학교·행정/정책학
  • 승인 2023.10.0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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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최태현 지음, 창비, 416쪽, 2023.09)

 

혁신과 진보라는 만트라로 작동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절망을 이야기하는 일은 고대 유다의 저항적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소리처럼 당혹스러울지 모른다. 희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색으로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를 이 시대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낙관주의자들에게는 시대착오적 염세론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는 문자 그대로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는 이들, 현실적으로든 관념적으로든 철저히 절망하는 이들, 땀 흘려 일구어낸 사회적 변화가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심장을 부여잡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삶이 언론과 공적 담론의 장에서 마치 별세계에서 온 이들인 양 다루어지고, 이들이 스스로 내는 목소리가 주류 세계의 교란을 안타까워하는 더 큰 목소리에 묻힐 때, 우리의 인식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할 따름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적절히 지적했듯이, 한 사회가 문명적임을 보이기 위해 탁자 아래로 ‘감추어둔 세계’가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공존하되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2022년 한국 사회의 핵심적 이슈 중 하나였던 장애인들의 지하철 탑승 투쟁은 그 감추어진 세계의 존재들이 ‘드러난 세계’로 침입해 들어온 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우선 절망을 이야기한다. 특히 우리가 절망에 대해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계가 역설로 직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역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저 문제가 드러나고, 의도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아, 어떤 행위에도 근본적 한계를 드리우는 이 세계의 조건(31쪽)”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모순, 아이러니, 딜레마 등의 개념들도 함께 가리킨다. 인간은 복잡한 세계를 단순화하는 능력과 도구를 가지고 있다. 직선적 세계관과 진화적 세계관이 결합하여 한계 없는 진보를 상상해왔던 근대 이성주의적 테마파크의 설계자들은 인간의 조건으로서 역설을 의도적으로 무시해왔다. 그래서 이 책은 역설을 인정하는 행위가 윤리적 행위임을 강조한다. 역설이란 사회 문제의 정의와 해결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단순화를 ‘범하지’ 않는 윤리적 사고를 요청하는 개념이다. 역설로 가득한 세계에서 직선적 진보는 가장 위험한 형태의 개입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세계의 한 측면만을 부각시킴으로써 다른 한 측면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무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절망에 대해 사유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에 기반해 모색한다는 데 있다. 특히 이 책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 그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의 주요한 제도적 기반인 대표, 정부, 조직, 그리고 리더를 중심으로 그것들의 역설과 한계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대표는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무언가를 어떤 의미에서 있게 하는 행위(56쪽)”로 정의된다. 여기에는 대표되는 이들의 선호의 불명확성과 이질성, 국민주권 개념에 연원하는 ‘민’의 단순하고 자의적인 정의, 시민 특히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대표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대의민주주의와의 갈등과 정치심리적 저항들로 인한 다양한 역설들이 내재되어 있다. 나아가 대표자들의 위임을 다시 한번 받은 정부는 이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해결하고 싶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취사선택하고, 민주주의의 실천자이기보다는 수호자를 자처하며 스스로 예외주의에 빠져 민주적 원리들을 부정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감춰진 세계의 목소리가 정책으로 만들어질 때, 그들의 아이디어는 ‘야생성’을 상실하고 관료제의 언어를 통해 관료제의 작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길들여져야만(domesticated) 한다. 

뿐만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도 문제 해결이라는 욕망에 추동되어 독재적 리더를 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곤혹스러운 역설은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를 위한 제도로 고안되었는데, 오늘날 국가 역할의 확대로 인해 민주주의 체제에 문제 해결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데에 있(35쪽)”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민주주의를 선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시원시원하게 해결할 (아마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철인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강렬하게 상상한다. 한편으로는 시민임을 자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민이 되기를 열망한다. 공정성을 가장한 성마른 능력주의에 젖어 우리는 기술관료들에게 마음으로 굴복하고,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시민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 결과는 자존감을 잃은 시민들로 구성된, 허울만 남은 민주주의이다. 이런 조건에서 리더의 자리를 열망하는 이들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되면서도 결국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더욱 슬픈 것은, 이러한 경로를 따라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보통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리더가 아닌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하는 이들일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역설에 근원한 절망은 극복할 수 없는가? 민감한 독자라면 이 책에서 저자가 그 극복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세계를 이해하기 어렵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절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 역시 역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 위에 이 책에서는 하나의 출발점으로서 마음에 주목한다.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가 말한 “민주주의의 집”으로서 마음에서 출발하여, 유학에서 주목한 충(忠)과 서(恕)를 통해 타자를 향한 너그러움의 가치를 돌아본다. 아울러 근대적 감정으로서 두려움, 그에서 파생된 혐오를 지적하고, 대신 우리의 마음을 채울 공적 감정으로서 사랑, 고통을 매개로 낯선 이들과 강력한 유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슬픔, 그리고 사랑의 실천적이자 정치적 형태로서 위로라는 행동에 대해 논의한다. 우리가 근대적 욕망으로서 타자에 대한 통제가 아닌 공존을 택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시민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에 충실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려움의 극복과 사랑의 시작은 대개 어떤 일을 함께 이루었을 때보다는 서로 공유된 슬픔을 함께 직면할 때임을 이 책은 강조한다. 한국의 시민사회가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산업재해와 빈곤으로 인한 수많은 죽음, 그리고 이태원에서의 참사를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방식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공적 위로의 가치를 알아 가고 그것을 실천해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 책은 우리가 공존하는 삶의 모습으로서 ‘작음’을 제안한다. 근대적 욕망의 본질인 더 많은, 더 큰, 더 강력한 조직, 제도, 기술, 리더가 아니라, “비가 내리는 날 작은 우산을 들고 사람과 차들을 피해 천천히 길을 걷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많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존재, 이 땅의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면서 많은 것을 소비하지 않으며 살아가는(23쪽)” 삶을 지향하는 시민적 태도가 ‘작음’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은 ‘작은 자’이며, 이들이 모인 집단은 ‘작은 공(共)’이다. 작은 공은 “국가 단위가 아닌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사람들이 ‘함께 하지만 그 이름으로 인해 억압되지 않는’ 삶의 단위(304쪽)” 혹은 “구성원들에 대한 억압적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외부의 시민들에게 억압적 지배권을 행사하지도 않는 공동체(의 상태)(306쪽)”를 의미한다. 시민은 작은 공 안에서 해나 아렌트가 말한 복수성(plurality)을 확보하면서도 작은 공에 기반하여 집단 차원에서도 복수성을 확보할 수 있다. 혼자 있을 때는 정치에 참여할 전망이 거의 없다시피 한 장애인들이 정치적 투쟁의 최전선에 서서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작은 공을 통해 주류 정치의 장으로 나아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작음은 정책 처방의 측면에서는 겸손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 책에서는 처방적 권력자, 즉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정의와 해결책의 고안에 있어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이들의 아르키메데스적 예외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세계의 복잡함에 기인한 처방의 역설들 앞에서 “이제 한 조각만 뽑으면 전체가 당장 무너져버릴 것 같은 젠가 게임을 하고 있는 심정으로 정책을 고안(344쪽)”하는 겸손한 마음을 강조한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는 스스로 제시한 길의 한계에 대해서도 돌아본다. 하나는 우리의 마음 역시 역설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도 들어올 수 있고, 혐오도 들어올 수 있다. 우리는 한때 영웅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의 부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는 외부의 악과 싸운다는 명분으로 우리 내면의 악을 깨닫지 못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이다. 다만 이 역설 가운데서도 키르케고르적 단독자로서의 우리가 어디로 나아갈지 결정할 수 있는 힘 역시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이 시대의 실천적인 문제로서 행동의 의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전제하는 경향이 있으나, 역사는 우리에게 늘 진보에는 반동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역사적 반동은 우리의 피땀 어린 노력을 무로 환원시키는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의 진보적 세계관은 개개인의 인위적 노력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은 사회적 법칙에 따라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우리의 선택과 노력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땀과 눈물이 민주주의에 과연 도움이 되기는 할까? 이런 질문이 도구적 합리주의자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졌으나 불가항력적인 자연적·사회적·정치적 변화 앞에서 절망하게 되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무거운 질문이다. 가장 절망스런 세계의 일원이면서도 거기서 희망을 길어올리던 이들이 어느새 물이 끊겨버린 샘 앞에서 느끼게 되는 절망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반짝거리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환영받지 못할 결론을 제시한다. 절망과 희망은 하나임을. 희망은 나이브한 낙관이 아니라 절망의 이면이거나 절망 그 자체임을. 역설로 가득한 이 민주주의의 세계에서 희망이란 절망의 다른 이름임을. 하지만 절망은 그래서 오히려 순수한 희망을 품는 일을 가능하게 함을. 철저한 절망은 오히려 가장 순수한 윤리적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으로 보여준 교훈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역설을 마음에 품고 함께 살아가기로 선택한 이들에게 작은 응원을 보내는 것으로 끝맺음한다. 

 

최태현 서울대학교·행정/정책학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법학과 행정학을 공부하고 미국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정책계획학(공공관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집단의사결정, 거버넌스, 정책결정의 맥락에서 그 배경에 있는 가치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공공성, 행정윤리, 정책서사를 연구하고 있다. 『모두를 위한 사회 연구: 과학, 방법, 민주주의』를 펴냈고, 그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2019년 한국행정학회 학술상(논문 부문), 2023년 서울대학교 학술연구교육상(교육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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