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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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
  • 양명수 이화여대·신학
  • 승인 2023.10.0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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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양명수 지음, 세창출판사, 360쪽, 2023.09)

 

필자는 70년 대 초에 대학에 들어갔다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서 학창 시절의 공백을 겪고 80년 대 초에 졸업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당시에 필자를 환대해 준 교회의 영향으로 대학졸업과 동시에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독교를 알기 위해 시작한 신학공부를 통해 필자는 서양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필자 뿐 아니라 대학생들의 최고 관심사가 민주주의와 인권에 있었는데, 그 모델로 서구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기독교는 서구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인 신앙의 여부를 떠나서, 기독교라는 종교에 들어 있는 인간관과 세계관이 서구의 문화와 제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구 기독교의 대표적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다. 그의 삶과 작품은 기독교 신앙이 사상이 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신화적 종교를 벗어나 이성에 대한 자신감에 바탕을 둔 인문주의 철학이 BC 5세기에 동서양에서 출현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의 합리성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종교적 영성으로 이성의 교만을 극복하고 깊이를 더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활동 시기가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라고 생각하면 아득히 먼 인물로 느껴진다. 그러나 서양 사회에서 그는 그리 먼 인물이 아니다. 중세와 근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불문하고 그의 영향력은 곳곳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후에 서구 철학의 새로운 것은 모두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프랑스 철학자 장 기통(Jean Guitton)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중세의 학자들은 물론이고, 스피노자와 칸트와 헤겔 그리고 키르케고어와 하이데거 및 후설에 이르기까지 근대와 현대의 독창적인 사상가들이 모두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와 리오타르의 만년의 작품도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읽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분석해서 그의 사상을 정리한 책이다. 크지 않은 책이지만, 인식론부터 인간의 자기이해와 해석학의 문제, 악의 문제 그리고 정치철학과 정의로운 전쟁론, 역사철학 및 현상학적 시간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었다. 필자로서는 은퇴 후에 내는 첫 번째 책인데,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던 지난 세월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작품이다. 또한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국인으로서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사상가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사유의 보편성을 접하게 되고, 그것이 현재의 나와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한두 가지 예를 들자면, 기독교의 인간관을 잘 보여주는 원죄론을 분석하면서 필자는 모든 형태의 인간숭배와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를 원죄론의 핵심으로 보았다. 인간을 누구나 죄인으로 보는 원죄론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최고 권력자를 보통사람으로 만들었다. 원죄론은 개인의 죄보다는 세상의 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세상의 죄란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관습과 제도 속에 들어 있는 폭력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원죄론은 구조 악을 고발한 것이다.

오늘날 하버마스 같은 학자가 주장하듯이, 서구에서 등장한 다양한 사회비판 사상의 기원은 기독교의 원죄론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유학시절에 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공부하면서, 원죄론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인간은 희생양을 만들어 피를 봐야 잠시나마 평화를 찾는다고 보는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기독교의 원죄론의 시각에서 인간사회를 관찰하고 미래의 불행을 막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한편, 국가와 정치의 본질과 한계를 다루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철학은 청년 시절의 필자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는 국가와 정치를 죄의 산물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의 악을 막고 질서를 유지할 필요 때문에 국가의 공권력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만연하는 국가라는 정치공동체는 본래 하나님이 원하던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이지만,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정치적 현실주의는 국가주의나 정치 메시아니즘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공권력 비판의 기원을 이루면서 고대 인문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서양의 정치철학자들은 17~8 세기의 사회계약론이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데,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홉스와 로크와 칸트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종교개혁자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입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대 문명은 근대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서 파생된 문제 때문에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쉽게 그 근본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이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구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평가되지만, 그의 사상은 인간의 탐심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풀어 놓은 현대의 세속화된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와는 다르다. 

결국 참된 종교적 영성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조화롭게 만들기 어려운 것을 자연스럽게 통일시키는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정의와 사랑,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과 세상을 바꾸는 일,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서로 모순되는 두 축의 어느 한쪽도 경시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분열되지 않고 통일되는 길. 그 길을 찾는 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은 인류의 고전으로서 끝없는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가르침을 준다.

 

양명수 이화여대·신학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 서울대 법대(학사), 감신대 대학원(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신학부(박사)에서 공부했다. 기독교의 고전과 신학을 인류사상사의 관점에서 소개해 왔다. 자유, 평등, 정의, 인간의 존엄성 같은 보편가치의 발전과 기독교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퇴계 사상의 신학적 이해』, 『성명에서 생명으로: 서구의 기독교적 인문주의와 동아시아의 자연주의적 인문주의』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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