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정의論語正義의 가치와 번역이 갖는 의미
상태바
논어정의論語正義의 가치와 번역이 갖는 의미
  • 함현찬 성균관 한림원·유학
  • 승인 2023.10.01 1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책을 말하다_ 『논어정의 二』 (유보남 지음, 함현찬 옮김, 세창출판사, 352쪽, 2023.08)

 

『논어정의論語正義』는 청대淸代의 고증학자考證學者인 유보남劉寶楠이 『논어論語』의 경문과, 하안何晏(193?~249)의 『집해集解』를 함께 해설하는 소疏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논어』 주석서이다. ‘소’의 형식으로 작성된 주석은 기존 주석의 성과를 폭넓게 흡수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유보남이 지은 『논어정의』는 한대漢代의 구설舊說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의 새로운 해석과 관점, 그리고 고증자료를 대량으로 수록하고 있어 그 어떤 주석서보다 훈고⋅고증이 가장 자세하다. 따라서 유보남의 『논어정의』는 청대 『논어』 연구의 집대성이며, 경학經學 저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권17까지는 유보남이 직접 찬술하였고, 뒤의 7권은 유보남이 작성한 장편長編을 기초로 아들 유공면劉恭冕이 찬술하였다.

유보남은 1791년 강소성 보응현에서 아버지 유이순劉履恂(1738~1795)과 어머니 교씨喬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자는 적구迪九이고, 건륭乾隆 51년(1786)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국자감 전부國子監典簿를 지냈으며, 저서에는 『추사찰기秋槎札記』가 있다. 

유보남은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교씨의 가르침 속에 성장하였다. 애초에 유보남은 종부從父 유태공劉台拱의 한학漢學이 깊고 정밀하였으므로 유태공에게 전수받기를 청하여 학행으로 향리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제생諸生이 되었을 때 의징儀徵의 유문기劉文淇와 명성을 나란히 하여 사람들이 “양주이류揚州二劉”라고 칭송하였다. 도광道光 20년(1840) 진사進士가 되어 직례성直隷省(하북성河北星의 옛이름) 문안현文安縣의 지현知縣을 제수 받았다.

유보남은 경전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씨毛氏의 『시경詩經』과 정씨鄭氏의 『예禮』를 정밀하게 연구하였고, 뒤에 유문기 및 강도江都의 매식지梅植之(1794~1843), 경현涇縣의 포신언包愼言(?~?), 단도丹徒의 유흥은柳興恩(1795~1880), 구용句容의 진립陳立(1809~1869)과 함께 각각 하나의 경전을 전공할 것을 약속했다. 유보남은 과장에서 문제를 내어 고시를 보일 때 『논어』를 얻었는데, 황간皇侃과 형병邢昺의 『논어論語』 소疏가 거칠고 견문이 좁고 적음을 병통으로 여겨 이에 한유漢儒의 구설舊說을 모으고, 게다가 송나라 시대 사람들의 의론 및 근세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보태어 초순焦循(1763~1820)이 『맹자정의孟子正義』를 저술한 체제를 따라 먼저 장편長編을 만들고, 그런 다음 바로 모으고 절충하여 『논어정의』 24권을 저술하였다. 하지만 관직의 일이 많아서 일을 마치지 못하고 아들 유공면劉恭冕(1824~1883)에게 명하여 이어서 완성하게 하였다. 함풍 5년(1855)에 죽으니, 향년 65세이다. 유보남의 주요저작으로는 『보응도경寶應圖經』 6권, 『승조순양록勝朝殉揚錄』 3권, 『문안제공록文安隄工錄』 6권이 있고, 이 외에 『석곡釋穀』 4권이 있는데, 대부분 정요전程瑤田(1725~1814)의 『구곡고九穀考』의 설을 보정한 것이고, 『한석례漢石例』 6권은 비지碑志의 체제와 격식에 대한 고증이 자세하고 넓다.

유공면은 광서光緖 5년(1879)에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가학家學을 지켜 경훈經訓에 통달했고, 경학을 공부하며 거처하는 당堂의 이름을 광경당廣經堂이라 했다. 안휘성安徽星의 학정學政 주란朱蘭(1800~1873)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이이덕李貽德(1783~1832)의 『춘추좌씨전가복주집술春秋左氏傳賈服注輯述』을 교정하여 백 수십 가지의 일을 옮겨서 보충하였다. 후에 호북湖北의 경심서원經心書院에서 주강主講이 되었는데, 돈독한 품행과 신중한 행실로 질박한 학문을 숭상하였다.

역대 제가의 이설異說을 참고하고 비교하여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논어정의』를 완성하고, 『면양주지沔陽州志』와 『황주부지黃州府志』, 『한양부지漢陽府志』, 『황강현지黃岡縣志』를 편찬했다. 향년 60세이다. 유공면의 주요저작은 『논어정의보論語正義補』, 『하휴논어주훈술何休論語注訓述』, 『광경실문초(廣經室文鈔』 등이 있다.

유보남은 『논어정의』를 도광道光 8년(1828년)에 처음 쓰기 시작하였는데, 함풍咸豊 5년(1855)에 거의 완성되려 할 때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 유공면이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동치 4년(1865)에 전서가 완성되었다. 『논어정의』의 완성은 전후 38년이 소요되었으며, 동치 5년에 최초 판각본이 간행되었다. 이후 이 초간본에 의거해 번각 혹은 활자화된 『황청경해속편皇淸經解續編』본, 『사부비요四部備要』본, 『만유문고萬有文庫』본, 『제자집성諸子集成』본, 『국학기본총서國學基本叢書』본, 고유수高流水의 교감과 표점 작업을 거친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십삼경청인주소十三經淸人注疏』본이 있다.

유보남의 『논어』 연구는 가학家學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의 『논어정의』는 그가 38세에 뜻을 두고 착수하여 평생을 바친 저작으로, 청대 『논어』 연구의 결정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유보남의 『논어정의』는 흔히 한유漢儒의 구주舊注를 망라한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 위魏⋅량梁 제가諸家의 관점을 광범하게 수집하고 있는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 주희朱熹의 『논어집주論語集註』와 더불어 『논어』 주소注疏의 사거서四巨書로 손꼽힌다.

사실 청대의 고증학 중심의 『논어』 연구는 청나라 중기를 거치면서 유태공劉台拱의 『논어병지論語騈枝』, 초순의 『논어하씨집해보소論語何氏集解補疏』, 송상봉宋翔鳳의 『논어정주論語程注』에 오게 되면 한위漢魏 경사經師의 『논어』 연구와 구주舊注의 분석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연구 성과와 초순의 『논어통석論語通釋』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제창은 경서에 대한 신주소新注疏가 생겨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는데, 그 위에서 성립된 것이 바로 유보남의 『논어정의』였다.

유보남은 『논어』를 연구함에 정현鄭玄의 주석을 높이 받아들였으며, 하안의 『논어집해』에 대해 “위인魏人의 『집해』는 정현의 주에 비해 산일刪佚한 것이 많아, 위공僞孔ㆍ왕숙王肅의 설이 도리어 그것을 바탕으로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잘못이다.[魏人集解於鄭注多所刪佚 而僞孔王肅之說 反藉以存 此其失也]”라고 하였고, 『논어의소』와 『논어주소論語注疏』에 대해서는 “양粱의 황간皇侃은 『논어집해』에 의지해서 소疏를 달았는데, 거기에 실려 있는 위魏와 진晉의 제유들의 강의講義는 청담과 현묘를 섭렵함이 많아 궁실과 의복 등 여러 예에 대하여 빼놓고 말하지 않았다.[粱皇侃依集解爲疏 所載魏晉諸儒講義 多涉淸玄 於宮室衣服諸禮厥而不言]”라고 하였으며, “송宋의 형병邢昺은 또 황씨皇氏를 근거로 별도의 소를 달았는데, 글자에 의지해 뜻을 부풀려 놓았으니 더더욱 족히 취할 만한 것이 없다.[宋邢昺又本皇氏 別爲之疏 依文衍義 益無足取]”라고 하였다. 더욱이 송유宋儒의 『논어』학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유보남은 자신의 이해를 시대적인 토양과 결합시킴으로써 한송겸채漢宋兼采의 『논어』학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논어정의』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논어정의』는 기본적으로 『논어』를 20편으로 분류하되, <팔일八佾>, <향당鄕黨>이 예악제도를 많이 말하였으므로 자세하게 주석하여, <팔일>을 2권(권3,4)으로 나누고 <향당>을 25절 3권(권11,12,13)으로 나누었으며, 권24에는 하안의 <논어서論語序>를 수록하였고, 부록으로 <정현논어서일문鄭玄論語序逸文>을 붙이고 유공면의 <후서後序>를 더하여 모두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에서 권17까지는 권의 제목 아래 “보응유보남학寶應劉寶楠學”이라고 되어있고, 권18에서부터 권24까지는 “공면술恭冕述”이라고 되어 있어 앞의 17권은 유보남이 저술한 것이고, 그 이하는 아들 유공면이 완성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논어정의』는 범례 상에 있어서 경문經文과 주석의 글은 모두 송나라 형병邢昺의 「소疏」본을 따랐고, 한과 당의 석경石經, 『논어의소』 및 『경전석문經傳釋文』의 각본의 이문異文을 「소」 가운데 열거하였다. 또 경문은 『십삼경주소』의 형소본邢疏本을 저본으로 하고, 주문注文은 하안의 『논어집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유보남이 경문의 문자 교감校勘에서 중시하고 있는 것은 당송이래의 판본이다. 한·당·송의 석경은 물론이고, 황간의 「소」, 육덕명의 『경전석문』에 실려 있는 명본名本을 형소본 문자와 비교하여 자신의 새로운 「소」 안에 반영하고 있지만, 명·청 시기에 새로 출현한 문자의 차이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논하지 않는다. 이 또한 『논어정의』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유보남은 황간의 소에 실려 있는 하안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전적의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보고 대신 형병의 소에 실려 있는 하안의 주석을 사용한다.

청나라 때의 관료이자 학자인 장백행張伯行(1652~1725)의 『청사열전淸史列傳』에서는 『논어정의』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예를 들면 『논어』 「학이」의 제12장인 ‘유자언체지용有子言體之用’ 장을 『중용』의 설이라고 밝힌 것과, ‘50세에 천명을 알았다.’는 것을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음을 알았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 자유와 자하가 효를 물은 것에 대한 해석에서 ‘선비의 효’라고 말한 것,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겠다.’고 한 것을 지금의 고려(한국)를 가리킨다고 해석한 것 등인데, 이 모두는 2천여 년 동안이나 드러나지 않았던 옛 성현의 뜻을 비로소 밝힌 것이며, 특히 「팔일」, 「향당」 두 편에서 밝힌 예제禮制는 상세하고도 정확하다고 평하고 있다.

이 외에도 『논어정의』의 가치를 정리해보면, 문자훈고文字訓詁나 선진사사先秦史事, 고대의 전적을 박람博覽하면서도 요령이 있다. 광범하게 인용하고 좋은 것을 골라서 따랐으며, 책 속에서 충분히 앞사람이 『논어』를 연구한 성과를 흡수하였다. 청인淸人이 집록한 정현의 남아있는 주석을 모두 소 안에 수록하고 『집해』를 사용하여 한漢·위魏의 옛 모습을 간직했다. 경의 해석은 주를 근거로 하고 있으며, 또 경에 의거해 소를 보충하였고, 소에 잘못이 있으면 경의 뜻에 근거해 변론하였다. 또한 『논어정의』에서는 청대의 고증학을 드러내고 문자훈고와 사실의 고정考訂에 주의하였으며, 전장典章, 명물名物, 인명, 지명, 역사적 사건에 대해 모두 하나하나 주석하고 고증하여 자세하게 갖추었으면서도 대의가 남김없이 모두 개괄되었다. 또한 내용이 박흡博洽하고 고석考釋이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며 정밀하다.

또한 『논어정의』는 가장 최후에 나온 저술답게 이전의 여러 주석서의 장점을 고루 흡수하였다. 한·위의 고주古注를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이런 고주에 대해 상세하게 소해疏解하였고, 그 결과 주석내용을 풍부하게 했으며, 고거考據와 의리義理를 아울러 중시하였고 간혹 송유宋儒의 학설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금문학파金文學派에 대한 이해도 있으며 건륭乾隆·가경嘉慶 고증학 황금시대의 다음 시대 저술로서 제가諸家의 설을 집대성한 것이 이 책의 제일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함현찬 성균관 한림원·유학

성균관 한림원 교수이자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과 및 대학원 초빙교수 겸 인문학 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성균관 한림원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저서로는 『장재: 송대 기철학의 완성자』, 『주돈이: 성리학의 비조』, 『(교수용 지도서) 사자소학』, 『(교수용 지도서) 추구·계몽편』, 『(교수용 지도서) 격몽요결』 등이 있고, 함께 번역한 책으로는 『논어징』 전 3권, 『성리논변』, 『증보 동유학안』 전 6권, 『주자대전』 전 13권, 『주자대전차의집보』 전 4권, 『역주 예기집설대전 2』, 『왕부지 중용을 논하다』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