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현대음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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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현대음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박영욱 숙명여대·철학
  • 승인 2023.09.2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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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 『철학으로 현대음악 읽기: 바흐에서 전자음악까지』 (박영욱 지음, 바다출판사, 332쪽, 2023.08)

 

클래식 공연에 관심이 있거나 방송을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현대음악은 들을 수 없는 거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알고 있다. 현대음악은 사람들이 편하게 들을 만한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연이나 방송의 곡목은 거의 대부분 우리가 잘 아는 음악가들이나 듣기 편한 음악가들에게 제한된다. 음악이 편하다는 말은 칸트의 용어를 빌자면 감적으로 ‘쾌적한’(angenehm)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예술에서 쾌적함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겠지만 이를 예술의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칸트가 부정적으로 사용한 말이다. 쾌적함의 기준은 시대나 문화마다 다르다. 예술은 시대를 넘어선 보편적 언어라는 말은 허구다.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인상주의 미술도 당시에는 배척당했으며, 모나리자의 그림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세종대왕이 대했다면 아름답고 쾌적하다고 느낄 수 있을는지도 의문스럽다. 더군다나 원시시대 예술이나 현대예술은 쾌적함 자체를 목적으로 생산되지도 않고 쾌적하게 감상되지도 않는다. 유독 예술에서 쾌적함을 추구하는 시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근대 예술의 시기이며, 서양의 근대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아름다움과 추를 구분하는 데서 미학이라는 학문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근대 서양음악의 미학적 원천은 화음의 특정한 전개형식이며, 이는 근대 음악을 끌어당기는 중력이었다. 화음중심의 음악적 중력이 동시에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음악적 쾌적함을 끌어당기는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중력의 힘을 절대화함으로써 모든 운동의 방향을 한 곳으로 소급한다는 데 있다. 현실적으로 중력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어느 하나의 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지구의 중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지만 태양의 중력을 무시할 수 없으며 심지어 달의 중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마치 모든 색의 파장이 섞인 빛이 투명하듯이, 우주 전체는 무수한 중력이 작용하는 투명한 중력의 공간, 즉 무중력의 장일 것이다. 무중력의 상태는 미리 정해진 방향이 없다는 뜻에서 잠재적으로 무한한 방향을 갖는 상태다. 이 책은 화음 중심의 중력으로부터 탈피하고자하는 음악적 무중력의 시도의 방향에서 현대음악의 사례들을 검토한다.

이 책이 현대음악가가 아닌 바흐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바흐의 음악은 이후 근대음악의 정체성을 확정짓는 고전주의 음악과 구분되어야 한다. 음악학자 캐럴 버거(Karol Burger)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화살(직선운동)에, 그리고 바흐의 음악을 원(순환운동)에 비유하였다. 고전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모차르트 음악은 처음부터 정해진 목표를 향하여 달려 나가며 우리는 음악적 서사를 통하여 이를 확인한다. 마치 재미있는 희곡이나 소설과도 같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은 항상 일어나고 있지만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 일상처럼 순환적이고 반복적이다. 바흐의 음악이 주는 평온함은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는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과 같은 후대의 음악이 주는 드라마가 없기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에는 드라마가 없다는 점에서 바흐의 음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바흐의 음악에서 현재는 정해진 미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정지된 순간으로 비유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정지를 무중력으로 비유한다. 실제로 매 순간은 흐르며 정지하지 않는다. 정지된 순간이란 방향성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이며, 무한의 중력이 작용하는 무중력의 상태처럼 무한한 방향성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바흐에 대한 이 책의 관심은 화음 중심의 중력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음악적 구조에 있다. 바흐가 속한 바로크 음악의 숫자저음과 폴리포니의 구조는 화음으로 정착되는 발전론적 관점이 아닌 하나의 독자적인 음악적 세계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독일 바로크 비애극(Trauerspiel)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이나 바로크 미술과 건축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에 상응하는 현대음악과 바로크 음악을 연결짓는 데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하는 바흐 음악의 구조적 특성은 적잖이 발견되는 화음에 ‘패턴’의 우위다. 가령 “도, 미, 솔”, “레, 파, 라”, “미, 솔, 시”처럼 다 장조라는 조성의 일관성을 유지하기보다는 “도, 미, 솔”, “레, 파#, 라”,“미, 솔#, 시”처럼 음의 간격이라는 일정한 패턴(수학적 패턴)이 선호되는 경우다. 조성과의 이러한 충돌은 동시에 화음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다. 바흐 음악의 무중력적 특성은 전근대적이 아닌 비근대적인 음악적 구조들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효과다. 이러한 비근대적 특성은 현대음악과 상통한다.

나아가 이 책은 화음에 대한 패턴의 우위가 현대음악을 여는 무조음악의 근본 전제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의 선입견이나 귀로 확인되는 바와 달리 무조음악은 무질서한 음악이 아닌 매우 정교하고 질서 있는 음악이다. 쇤베르크 무조음악의 열쇠는 화음이 아닌 자신이 ‘응집력’(coherence)이라고 부르는 음의 결집 방식, 이 책에서 ‘패턴’이라고 규정하는 방식이다. 그의 음악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음고류집합이론’(pitch class theory)이라는 치밀한 수학적 분석방법을 소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독자들이 이 부분을 무시해도 책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다만 수학적 패턴이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분명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쇤베르크 이후에 현대음악에서 수학적 패턴이 강조되는 것은 수학에 대한 음악의 우위를 나타내거나 혹은 자본주의의 계량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현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아도르노야말로 반면교사다. 그는 새로운 혁명가로 칭한 쇤베르크 음악의 수학적 경향을 수학을 위한 음악의 포기와 자본주의적 계량화의 음악적 시도, 즉 음악의 ‘물신주의’로 규정한다. 여기에는 지나친 사회구성적 환원론이 깔려있다. 아도르노의 생각과 달리 음악적 형식이 사회적 차원과 결코 무관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설명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 과학학자 라투르(Bruno Latour)가 과학적 실험은 사회적 차원의 개입이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차원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사회구성적 입장을 명백히 거부하는 맥락과 비슷하다. 아도르노의 사회구성주의적 태도는 신음악이 지닌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을 오로지 물신주의라는 서사로 환원시키고 만다. 수학적 방법을 확장한 베베른이나 쇤베르크의 비일관성을 비판하고 수학적 방법을 극단화한 불레즈 혹은 슈톡하우젠의 전자음악적 시도는 그에게 물신주의에 빠진 속류 부르주아지 음악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회구성주의적 서사는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에게 음렬주의나 전자음악은 대중음악의 등장으로 대중에서 밀려난 음악가들이 과학자나 수학자를 흉내냄으로서 부르주아지 사회에서 기득권층의 한켠에 자리잡고자하는 열망을 반영할 뿐이다.

음악적 전문가를 자처하는 아도르노나 사회학적인 방법론에 의해서 거시적으로 음악의 흐름을 꿰고 있는 듯 행세하는 아탈리가 아닌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으로 여겨지는 들뢰즈나 루만의 통찰이 현대음악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현대음악은 들뢰즈가 말하는 음의 ‘배치’(agencement)의 다양한 시도들로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구축하는 노력이다. 주지하다시피 새로운 배치는 편집증에 가까운 기존의 절대적인 중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가능하다. 물론 어떠한 음악적 배치도 그것이 음악적 시도로 통용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 20세기 이후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로 통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 즉 예술체계의 범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포함한다는 루만의 생각은 현대음악에도 관철된다. 자연법칙과도 같은 화성의 법칙을 따랐던 근대음악과 달리 현대음악에서 그러한 절대적인 중력의 법칙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음악적 시도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뤄지는 모든 현대 음악적 시도는 바로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2018년에 처음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다. 개정판에는 그리스 출신의 전자음악가 크세나키스의 음악적 시도를 다루는 장을 추가하였다. 이는 단순한 추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기존의 판본에도 이미 컴퓨터 전자음악을 다루고 있지만, 크세나키스의 컴퓨터 음악은 그동안 나에게 난제와도 같았다. 그의 추계학적(stochastic, 통계학의 한 분야) 방법론은 단순한 수학적 패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인공지능의 등장 덕분이다. 최근 등장한 ChatGPT의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은 그의 추계학적 방법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에 기반이 되는 ‘어텐션’(attention)의 원리는 확률의 원리에 기초하여 단어를 연결 짓는 매커니즘이다. 놀랍게도 확률적 관계에 기초한 단어의 연결은 의미가 배제된 수학적 원리에 의한 것이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인공지능은커녕 컴퓨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20세기 중반 크세나키스의 추계학적 시도를 현재 인공지능의 원리를 통해서야 깨닫게 된 필자의 경험은 개인적으로 소름 돋는 사건이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인공지능 원리의 선구라는 의미로 한정되지 않으며,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박영욱 숙명여대·철학

숙명여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칸트 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관심은 예술과 문화로 이어졌는데, 특히 현대음악과 현대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했다. 홍익대 대학원 미술학과와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등에서 매체미술 비평, 공간디자인, 건축비평이론 등을 강의했다. 한양대학교 대학원 작곡과에서 현대음악과 관련한 강의를 했으며, 지금은 한예종 음악원에 출강 중이다. 저서로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데리다와 들뢰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매체, 매체예술 그리고 철학》 《미디어아트는 X예술이다》 《필로아키텍처: 현대건축과 공간 그리고 철학적 담론》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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