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대항적 공존 톺아보기 … 국제개발을 거꾸로 읽기 위한 사회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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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대항적 공존 톺아보기 … 국제개발을 거꾸로 읽기 위한 사회학적 상상력
  • 김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 승인 2023.09.2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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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 『반둥 이후: 글로벌 사우스의 국제정치사회학』 (김태균 지음, 진인진, 372쪽, 2023.07)

 

 

제3세계론에서 글로벌 사우스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인류문명의 역사는 실제로 글로벌 노스(Global North)로 분류되는 강대국들이 세계를 지배해 온 역사와 그 유산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로벌 노스의 물리적 지배와 함께 문화적 지배가 장기화되어 이른바 ‘제3세계(Third World)’ 국가들은 북반구의 지배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사회화 과정에의 자발적 동참 정도에 따라 사실상 같은 문명권에 소속되는 일종의 서구 문명의 ‘상상공동체’를 공유하게 된다. 특히,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일본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이후 미국發 자본주의와 동맹에 힘입어 글로벌 노스의 정치적 생리에 신속하게 적응하고 이른바 ‘발전국가론(developmental state)’을 선도하는 근대화의 성공사례로 부상하였다. 반면, 서구식 발전론에 대항하거나 적극적으로 동화하지 못하여 자본주의 발전국가 대열에서 낙오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경우 글로벌 노스의 중심부(core) 국가들에 끊임없이 종속되어가는 주변부(periphery)의 저발전국가로 남게 되었다.

과거 근대화이론으로 대표되었던 서구식 발전경로와 종속이론 중심의 제3세계 저항경로 간에 형성된 이념적 간극은 적극적인 절충의 노력 없이 갈등의 평행선을 이어나갔다. 발전을 바라보는 근대화 對 저발전의 이분법적 사고가 지금까지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의 대항적 관계성을 이해하는 인식론적 프레임으로 남아 있다. 1955년 반둥 회의를 전후로 비동맹주의의 국제연대로 구축된 제3세계 프로젝트는 1980년대에 들어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현상으로 인하여 글로벌 노스에 대한 경제적 종속성이 커지면서, 대항이론으로서 종속이론은 사망신고 진단을 받게 되고 제3세계는 글로벌 노스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이 가속화되는 공세적 세계화의 악순환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글로벌 사우스를 대표하는 제3세계론이 이론적 가치와 적실성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성급한 발상이다. 실제로, 제3세계론은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라, 대항이론의 정치적 세를 복원하기 위하여 실용적인 전략을 모색하며 대항보다는 글로벌 노스와의 공존에 무게중심을 옮김으로써 지속적으로 진화와 적응을 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남반구 역내 개발도상국들 간의 개발협력을 강화하는 ‘남남협력’ 방식이 제3세계론의 전략적 대안으로 국제사회에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남남협력은 제3세계론이 고수해 온 기존의 비동맹주의를 승계하고 사우스 국가들 간의 상생과 연대를 강조한다. 반면, 남남협력이 글로벌 남반구 국가들의 현실적인 협력 수단이자 전통적인 남북협력을 보완하는 전략적 선택으로 전락하게 되어 기존의 제3세계론과 같이 거시적 수준에서 사우스의 식민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집합정체성을 형성하는 제3세계의 생존 프로젝트와는 결을 달리한다. 우리는 냉전 이후 제3세계 프로젝트가 더 이상 대항이론을 대표하는 상징권력을 보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제3세계의 개념을 대신해서 글로벌 노스에 대한 도전과 협력이 교차하는 포괄적인 글로벌 사우스가 대안적인 제3세계의 명맥을 계승·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반둥회의_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 · 아프리카 회의'. 제3세계가 정식으로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꾸로 읽는 국제개발: 글로벌 사우스의 질곡과 도전

국제개발의 본원은 글로벌 사우스에 속하는 협력국의 근대화 발전경로의 질곡을 이해하고 자국 발전을 위해 도전하는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것이다. 공여국인 한국의 발전경험을 일방적으로 이식하고 전달하는 개발협력이 아니라, 협력국의 경제사회개발계획 및 현지 주민이 원하는 개발프로젝트를 상호 공유하고 지원함으로써 협력국의 발전과 역량개발이 진작되고 결국 공여국의 발전과 연계되어 상생할 수 있는 토대를 확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공여국은 자국의 입장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사우스의 입장과 시각에서 본 근대화 과정에 대한 역사적 경로를 해석할 준비와 자세를 포용해야한다. 우리는 글로벌 사우스의 발전경로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시대부터 현재의 인도·태평양시대까지 사우스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노력, 즉 기존의 접근방식을 뒤집는 ‘거꾸로 읽는 국제개발’의 비판적 프레임이 필요하다. 사우스의 시각과 철학은 노스 공여집단의 역사적 배경과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차이가 실제로 국제개발과 국제관계에 다른 방식으로 개입하고 도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글로벌 사우스만이 고수하는 비동맹주의, 남남협력 등의 개발협력 방식이 존재하며, 이러한 사우스 중심의 역사적 기록과 집합적 경험은 북반구에 위치한 구 제국주의 공여국과의 치열한 관계 속에서 좌절되기도 하고 지속되기도 한다.     

거꾸로 읽는 글로벌 사우스 시각의 국제개발이 조우하는 역사적 분기점은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 반둥회의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독립국들의 반둥회의는 제3세계의 집단적 정체성을 비동맹주의로 환치한 제3세계 최초의 역사적 대륙 간 회의였으며, 반둥회의 이후 제3세계가 연대와 협력을 통해 기존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대안적 질서를 추진하는 다양한 플랫폼이 구현될 수 있는 역사적 계기로 작동하였다. 2010년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한 한국이 반둥회의의 유산과 영향력을 재해석하는 노력이 아직도 필요할 정도로 반둥회의의 파급력은 대단하며, 반둥회의는 지금까지 한국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던 글로벌 사우스가 그 거대한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역사적 무대를 제공하였다. 한국의 개발외교는 미국 중심의 현실주의적 양자외교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글로벌 사우스의 다양성과 독자성을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우스의 저개발국가를 한국의 진정한 파트너로 인지하기보다 한국의 단기적 국익을 확장하는 데 필요한 도구적 대상으로만 간주하게 된다.


대항적 공존: 반둥 이후 지연된 혁명주의

반둥 이후 제3세계 신생독립국들이 추구한 비동맹주의 국제연대의 집합적 정체성은 글로벌 노스의 신식민주의에 대한 저항과 제3세계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을 위한 도전으로 수렴되었다. 1960년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와 G77의 출범, 비동맹정상회의(NAM Summit)의 정례화, 그리고 1970년대 신국제경제질서(NIEO) 주창 등 반둥의 거대한 유산은 영국학파의 와이트(Martin Wight)가 제시한 혁명주의에 걸맞을 정도로 제3세계를 대항의 아이콘으로 각인시켰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적 국제경제질서에 노출된 제3세계의 대항적 혁명주의는 서구식 발전론과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기존의 전면적 대항보다는 순화된 ‘대항적 공존’의 생존방식으로 변화하게 되고, 대항적 공존의 수위는 글로벌 사우스의 저개발국가가 얼마나 기존 국제질서와 구조적 제약에 저항하고 대안적 질서를 주창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즉, 이는 저개발국가의 저항력이 대항적 공존의 가장 핵심적인 독립변수로 작동하는 것을 의미하며, 구조가 지속적으로 강제하는 제도적 권력에 행위자의 적응력에 주목하고 심지어는 행위자가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까지 포함하는 행위자 대응방식의 스펙트럼에 따라 ‘대항’과 ‘공존’이 동시에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냉전이 종료된 후 글로벌 사우스는 역내의 독자적인 영역을 대항의 산물로 고수하는 것보다 글로벌 노스와의 상호의존성을 인정하고 이분법적인 대결구도가 아닌 개발파트너로서 북반구의 공여국과 공존하는 현실적인 선택이 사우스 국가들 사이에서 확장되어 반둥체제의 혁명주의는 ‘제한된’ 혁명주의로 전환되게 된다. 그러나 대항적 공존이라는 사회구성체에서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수동적인 공존에 지나친 무게를 실어 사우스 행위자가 조직하는 능동적인 대항에 대한 관심이 축소되는 문제이다. 사우스 행위자의 대항과 저항이 있어야만 대항적 공존이 성립되고 제3세계론의 역사적 진화과정의 변증법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항은 대항적 공존의 전제조건이자 필요조건인 셈이다. 공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과 동시에 글로벌 노스가 설정한 구조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대항의 요소가 결국 제3세계론의 연속성을 재조명하는 핵심이 될 것이다. 작금의 국제정세가 미·중의 전략경쟁, 러·우전쟁, 그리고 인도·태평양 전략 등 글로벌 사우스의 전략적 선택이 미국과 G7에게 중요한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사우스의 대항적 공존이 미치는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또한, 중국과 인도 간의 사우스 역내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전략적 경합과 갈등이 글로벌 사우스의 패권경쟁과도 연계되어 실제로 대항적 공존의 전략적 도구는 글로벌 노스를 상대할 경우뿐만 아니라 사우스 내에서도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국제정치사회학적 상상력

마지막으로, 서구식 국제개발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보기 위해서 본 연구서는 이른바 ‘국제정치사회학’적 상상력을 동원한다. 국제정치사회학(international political sociology)은 사회학적 상상력과 비판적 성찰을 결합하기 위하여 역사사회학과 정치사회학을 총체적으로 결합하는 대안적인 인식론이자 다양한 해석의 틀을 통합하는 방법론적 다원성을 지향한다. 글로벌 사우스의 도전과 좌절을 사우스 시각에서 해석하고 이를 다시 글로벌 노스의 현실주의적 국제정치와 연결하는 이해사회학적 접근법인 국제정치사회학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가 투영된 성찰적 대안이론으로 장기지속의 역사사회학의 거시적 경로추적과 정치사회학의 정치갈등의 맥락대조를 통합하는 새로운 사회학적 상상력을 동원한다. 이러한 대안적 상상력을 통해 글로벌 사우스가 두 세기 남짓 기존 강대국의 국제질서에 도전해 온 역사적 사건들을 관통하는 변증법적 공통분모로서 ‘대항적 공존’을 개념화한다. 사우스의 대항과 도전은 궁극적으로 글로벌 노스를 소멸시키거나 제로섬 게임을 기획한 것이 아니라, 사우스의 생존을 위해 노스와의 ‘공존’을 선택하였고 역설적이게도 이를 위한 ‘대항’이라는 전략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고 부족하나마 그 문제의식에 답을 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실제, 한국에서의 글로벌 사우스 및 제3세계 연구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인기 연구 주제에서 배제되어왔고 현재에도 주류 학문이 아니라는 해석에 어느 누구도 이견을 달기 어려울 것이다. 1980년 중반 이후 한국의 민주화 물결 속에 제3세계의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국제관계의 주요 사조로 제3세계론을 압도하면서 점차 한국 학계에서 글로벌 사우스 연구의 자취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는 단지 학계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이 장기간에 걸쳐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동맹체제에서 통용되는 사고와 정책에 동화되고 의존하는 경향에 수렴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의 입장에서는 글로벌 사우스가 처한 다양한 발전의 문제에 눈과 귀를 막고 최소한의 수동적인 개입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제한된 관계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즉,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구조적 폭력과 경제 착취로 점철된 글로벌 사우스의 종속과 저발전 문제가 한국에게는 긴급하게 대응할만한 이슈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냉전과 탈냉전, 그리고 작금의 새로운 인도·태평양 시대에도 미국의 핵심 동맹 중 하나인 한국에서 이러한 제한된 인식론은 지속되어 왔다.

한국의 학계가 축적해 온 제3세계 연구의 지식은 다양한 성과를 이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론의 태동 단계인 제국주의 시대와 양차 대전 시기에 대한 연구와 냉전 이후 글로벌 사우스가 이론적인 연대주의에서 현실적인 역내 패권경쟁에 이르기까지 다원적으로 분화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미비한 상태이다. 반면, 제국주의의 구 식민지가 1950년대부터 독립하면서 국제질서에서 자국의 위치권력을 이동시킴에 따라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등 비판이론과 제3세계의 대안적 국제관계 형성에 관한 연구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맞물려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었던 바 있다. 다만, 1990년대 신자유주의의 확장과 냉전체제의 붕괴 및 미국의 단극주의 부상 등의 국제질서의 변화과정에서 한국에서는 제3세계의 종말론까지 거론되면서 빠르게 글로벌 남반구 연구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등 경제개발과 자본주의 정치경제 연구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게 된다. 따라서 본 연구서에서는 글로벌 사우스 입장에서 국제개발 레짐과 국제관계 질서를 해석하고 거꾸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제3세계의 태동기부터 현재 단계까지 역사적인 구조사를 추적하는 장기지속(longue durée)의 방법론을 취한다. 더 나아가 이 책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가 진행되어오면서 한국이 스스로 제3세계에 대한 전략적 관계성을 도모하기 위하여 중장기적으로 체계화된 외교정책을 기획한 경험이 있는가에 대한 성찰적 질문을 제기한다.

 

김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및 글로벌사회공헌단 단장과 아시아-아프리카센터 센터장으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교 국제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SAIS)에서 각각 사회정책학,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국제개발학, 평화학, 국제정치사회학, 글로벌 거버넌스이다. 최근 저서인 『대항적 공존: 글로벌 책무성의 아시아적 재생산』과 『한국비판국제개발론: 국제開發의 發展적 성찰』이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바 있으며, 공저로 The Korean State and Social Policy: How South Korea Lifted Itself from Poverty and Dictatorship to Affluence and Democracy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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