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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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
  • 김응종 충남대 명예교수·프랑스사
  • 승인 2023.09.1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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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_ 『프랑스혁명사: 삼신분회에서 열월 9일까지』 (프랑수아 퓌레·드니 리셰 지음, 김응종 옮김,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437쪽, 2023.08)

 

이 책은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 1927-1997)와 드니 리셰(Denis Richet, 1927-1989)가 공동 집필한 『프랑스혁명사』 (La Révolution française)의 제1부 “삼신분회에서 열월 9일까지”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아셰트 출판사에서 1965년에 처음 출판된 후 1973년에 보급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이것을 번역 대본으로 사용했다. 

퓌레와 리셰는 둘 다 1927년생으로 소위 ‘행복한 세대’에 속하는 프랑스 역사가이다. 이들이 역사가로 입문할 무렵 프랑스의 역사학은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 그리고 페르낭 브로델이 주도하는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에 힘입어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全)세계적으로도 역사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역사가는 1947년에 창설된 고등학문연구원 제6국(1975년에 사회과학고등연구원으로 개편됨)에서 주로 활동한 아날리스트였다. 퓌레는 1977년에서 1985년까지 이 연구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이 책의 번역은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1990년에 일월서각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역자는 프랑스혁명사를 번역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번역을 맡았고, 결과적으로 오역과 미숙함이 적지 않은 번역판을 내고 말았다. 게다가 이 번역판이 절판되는 바람에 수정보완의 기회를 잃어 프랑스혁명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었는데, 다행히 새로운 번역을 통해서 오류를 바로잡고 역주를 많이 붙여 이해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다시 번역하게 된 것은 비단 번역상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함만이 아니라 이 책이 프랑스혁명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책이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사 해석은 크게 ‘정통해석’(마르크스주의 해석, 자코뱅해석, 고전해석으로도 불린다)과 수정해석(자유주의해석, 정치적 해석으로도 불린다)으로 나뉘는데, 이 책은 수정해석의 고전이다. 이 책이 타깃으로 삼은 책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혁명사』인데, 본서와 비교해 읽으면 프랑스혁명사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역자가 쓴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푸른역사, 2022)도 함께 읽으면 프랑스혁명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제시한 수정해석은 퓌레의 『프랑스혁명 해석』(1978) (국내 번역은 정경희 옮김, 『프랑스혁명의 해부』, 법문사, 1987)에서 심화되었다. 여기에서 퓌레는 『프랑스혁명사』에서 제기한 ‘탈선론’을 뛰어넘어, 혁명을 탈선시킨 광적인 폭력은 민중의 개입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혁명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고 본다. 폭력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는데 전쟁은 혁명에서 비롯되었으니 결국 혁명 그 자체에 책임이 있다는 논리이다. 

퓌레가 정통해석의 사회경제적인 관점을 버리고 취한 관점은 정치적인 관점으로,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혁명기에 발생한 ‘폭력’이다. 프랑스혁명의 아킬레스건인 폭력을 설명하는 논리로는 ‘상황론’이 대표적이다. 외국과의 전쟁과 국내의 반혁명 전쟁이라는 이중적인 위기에 봉착하여 혁명은 국가를 구하기 위해 공포정치라는 폭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소불은 공포정치야말로 승리의 원동력이었다며 공포정치를 정당화시킨다. 상황론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퓌레 역시 상황적 요인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는 “혁명이 전쟁을 지배한 것 이상으로 전쟁은 혁명을 지배했다”고 마치 상황론자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혁명 초부터 “혁명은 전쟁이었고 평화는 반혁명이었다”며 전쟁이 혁명에 내재되어 있었다고도 말한다. 

퓌레는 『프랑스혁명 해석』을 발표한 후 프랑스혁명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공화주의, 좌파,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등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고, 1995년에 『환상의 과거. 20세기 공산주의 이념 연구』를 발표했다. ‘환상’이란 공산주의를 가리킨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퓌레도 프랑스의 많은 청년 지식인들처럼 공산주의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공산주의 투사로서의 체험과 프랑스혁명에 대한 지식을 융합하여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을 비판한 책이다. 이 책은 유럽에서 유난히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던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자극하여 프랑스에서만 10만 권 이상이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퓌레는 이 책으로 프랑스학술원의 고베르 대상, 독일의 한나 아렌트 상을 수상했고,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퓌레는 앞선 연구들에서도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바 있는데, 볼셰비키들은 러시아혁명 전이나 혁명 중, 혹은 그 후에도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의 친자관계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 여파로 마르크스주의 혁명사가들은 1917년에 관한 자기들의 느낌과 판단을 프랑스혁명 해석에 투사했으며, 첫 번째 혁명의 특징들 가운데 두 번째 혁명의 특징들을 예고하거나 예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조명했다. 실로 러시아혁명은 프랑스혁명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혁명에 관한 관심이 1789년에서 1793년으로 이동했으며, 도시 민중 즉 상퀼로트에 대한 연구를 촉발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혁명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프랑스혁명을 해석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정통해석의 부르주아혁명론이 바로 그것이다. 알베르 마티에는 러시아혁명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공포정치를 이해하고 다시 프랑스혁명을 통해 러시아혁명의 공포정치를 이해하고 수용했지만, 퓌레는 정반대였다. 퓌레는 러시아의 굴락에서 자코뱅의 공포정치를 실감할 수 있었고, 공포정치에 대한 거부는 자코뱅 유산을 이어받은 러시아혁명과 볼셰비즘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퓌레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프랑스혁명과 볼셰비즘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산악파가 1793년 헌법을 만들기 무섭게 전쟁을 구실로 헌법 없는 통치를 선언했듯이 (“임시정부는 평화 시까지 혁명적이다!”), 레닌은 “독재는 힘에 직접 의지하는 것이지 어떠한 법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혁명기에는 합법성보다 정당성이, 법보다 정의가 앞선다. “2월혁명 이후의 10월혁명은 지롱드파 이후의 산악파다”, “볼셰비키가 제헌의회를 해산한 것은 1793년 6월 2일의 국민공회 숙정을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그것은 상황의 강제라기보다는 독트린의 표현이었다.” 스탈린이 자행한 대숙청 역시 프랑스혁명에 그 선례가 있다. “스탈린에 앞서,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내부에 숨어 있는 혁명의 적들을 발본색원해야 했다.”

『환상의 과거』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이라는 두 ‘환상’의 역사이다. 파시즘이라는 환상은 제2차 대전과 유대인학살로 끝났고 인류의 역사에서 절대악으로 단죄되었다. 공산주의의 환상은 제2차 대전 직후에 유럽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프랑스인들은 공산주의에서 프랑스혁명의 유산을 발견했고 그 때문에도 공산주의에서 국가의 쇠퇴를 잊고 국가적 사명을 되새길 수 있었기에 공산주의에 열광했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퓌레의 환상은 1956년에 후르시초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소련이 헝가리를 침입하면서 깨졌다. 

퓌레는 자코뱅 해석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혁명사 연구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1980년대 초의 주요 문제는 더 이상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되었다. 퓌레의 ‘정치적’ 프랑스혁명사 연구는 1980년대 새로운 세대의 혁명사 연구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정통해석을 고수하는 장 클레망 마르탱은 퓌레의 정치적 연구가 혁명사연구를 혁신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퓌레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치를 우대할 뿐만 아니라 ‘정치’가 역사의 구조라고까지 말했다. 퓌레가 프랑스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을 때 『르 피가로』는 퓌레를 “혁명의 혁명가”라고 불렀으며, “퓌레 학파”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평가했다. 

퓌레의 프랑스혁명사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국내 학자들은 발끈했다. 위대한 시민혁명과 위대한 역사가의 존엄을 모독하는 데 대한 거부요 분노였다. 국내에서는 르페브르와 소불의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사가 지배적이었고 교조적으로 추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퓌레의 정치사적이고 개념사적인 해석이 사회경제적인 해석에 비해 덜 명료하여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도 한 이유였을 것이다. ‘정통’을 숭배하고 ‘수정’을 배척하는 전통문화도 일익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반응은 수용이나 거부 여부를 떠나 프랑스혁명사 논쟁을 학술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감출 수 없다. 

『프랑스혁명사』는 개설서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두 젊은 역사가의 과감한 해석은 혁명사 읽기의 흥미와 긴장감을 높여준다. 독자들이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를 직접 느껴볼 수 있도록 두 구절을 제시한다. 하나는 정통해석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혁명집단”으로 평가하는 상퀼로트(도시 민중)에 대한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주도한 민중혁명의 이면이다. 

 

사회적 이상에 있어서 반동적이었던 구(區)의 상퀼로트들은, 그들의 가장 최근 역사가인 알베르 소불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혁명 집단이었다. “인민주권이라는 단어의 전체적인 의미, 즉 법의 비준권, 통제권, 대표 해임권으로서의 구(區)의 자율성과 상설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직접정부의 실천과 인민민주주의의 수립을 지향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적 선입견을 배제하고, 상퀼로트의 전투적 행동 속에서 20세기 민주주의의 예고편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실망을 맛보게 된다. 전투적 활동가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그들이 구에 강요한 투쟁방식은 의아스럽게도 2세기 전에 파리의 가톨릭신성동맹원들이 사용하던 방법과 유사했다. 그들은 행정 회의를 공개적으로 열었고 구두로 투표했으며 고발을 시민의 의무로 간주하는가 하면 만장일치를 깨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꼈고 항상 폭력에 의존하는 등 매우 오래된 집단의 기층심리를 표출했던 것이다. 소수에 속한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들은 ‘합의’를 확인하는 데 집착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불가능한 설득을 가능한 강제로 바꾸었다. 혁명적 집단심성의 뒤에서, 민중의 ‘소요’가 항상 불사른 두 개의 열정이 분출했으니 평등과 처벌이 그것이다. 단두대, 이 ‘평등의 낫’은 이 두 열정을 만족시킨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모순에 대한 유토피아적 해결책에 불과했다.

1792년 8월 10일 이후 혁명은 전쟁과 파리 군중의 압력에 의해서 18세기의 지식과 부가 그어놓은 궤도 밖으로 탈선했다. 평등주의적 열정이 표면으로 솟아올라, 응축된 굴욕감의 힘과 민중적 비전의 색깔을 빈약한 표현들 위로 드러내주었다. 드러난 것, 그것은 모든 것이 신분이요 특권이었던 구체제 사회가 전도된 모습이었다. 상퀼로트가 요구한 세계는 위계가 없고, 특별함이 없고, 재산이나 재능의 위세가 없는 세계였다. [...] 조레스가 그토록 잘 이해했던 혁명의 저편에 있던 것은 미슐레가 직관적으로 간파한 혁명, 즉 빈곤과 분노의 암울한 힘의 혁명이었다.

 

김응종 충남대 명예교수·프랑스사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후 프랑스 낭트대학교에서 석사, 프랑스 프랑쉬콩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장, 인문대학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아날학파》,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관용의 역사》, 역서로는 《프랑스혁명사》, 《유럽은 어떻게 관용사회가 되었나》,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의 회고록》, 이외 다수의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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