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황주에서 일어난 기묘한 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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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황주에서 일어난 기묘한 치사 사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3.09.1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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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 교수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지게뿔이 항문을 관통하다

정조 연간에 황해도 황주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싸우다가 한 사람이 죽은 폭행치사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사망한 피해자는 너무나 안타깝게도 죽음을 맞이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해자는 황주에 사는 엿장수 신착실(申着實)이었다. 이웃에 사는 박형대(朴亨大)가 신착실에게서 엿 2개를 외상으로 사 먹고 그 값을 치르지 않았다. 사건은 연말에 술에 취한 신착실이 박형대의 집으로 가서 외상값을 독촉하면서 시작되었다. 서로 감정이 상한 두 사람은 서로 다투고 힐난하다가 마침내 발끈 성이 난 신착실이 손으로 박형대를 밀었다. 박형대의 등 뒤에는 지게가 놓여 있었는데, 지게의 뿔이 마침 박형대의 항문에 그대로 적중하여 항문을 뚫고 박형대의 복부를 관통해버렸다. 박형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1872년 황해도 황주목 지도. 그림은 황주의 중심부와 성밖 일부이다. 규장각 소장.

이 사건은 1797년(정조 21) 8월에 옥사가 성립되었는데, 이듬해 관찰사가 있는 해주의 부용당(芙蓉堂)에서 사건을 조사했던 인근 수령들이 모두 모여 사건 처리를 놓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황해도 곡산부사로 근무하던 다산 정약용도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수령들은 이구동성으로 신착실이 겨우 엽전 2닢 외상값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분개했다. 살인범 신착실이 사형을 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약용과 감영의 판관(判官) 정술인(鄭述仁)만은 그렇게 봐서는 곤란하다며 신착실을 두둔하였다. 신착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절묘하게 지게뿔이 항문을 관통하게 하여 박형대를 죽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김홍도가 그린 『단원풍속도첩』의 ‘씨름’에 나오는 엿장수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살인의 유형은?

여기서 잠시 조선에서 사용한 『대명률』 살인죄의 유형과 형량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사람을 죽이는 범죄는 크게 모살(謀殺), 고살(故殺), 투구살(鬪毆殺), 희살(戲殺), 오살(誤殺), 과실살(過失殺)의 여섯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이를 ‘육살(六殺)’이라고 불렀다.

이 중 모살은 모의하여 사람을 살해한 경우에 해당하는데, 한마디로 계획적인 살인을 말한다. 여러 명이 공모하여 죽인 경우 주모자는 참형, 힘을 보탠 자들도 교형으로 다스렸다. 지시를 따랐지만 살해 행위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자는 장일백(杖一百) 유삼천리(流三千里)로 간신히 사형을 피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우발적이지만 고의가 있는 살인은 고살, 싸우다가 사람을 죽게 한 것은 투구살로 간주하였다. 예컨대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사람을 죽였을 경우 죽이려는 마음이 없이 다투다가 때려죽인 경우라면 투구살이고, 다투다가 분노가 치밀어 죽이려는 마음이 일어나 죽였다면 고살이 된다. 두 경우 모두 가해자는 사형을 피할 수 없지만, 고살(참형)보다 투구살(교형)이 그나마 형량이 조금 낮았다.

 

 『대명률』 형률의 인명(人命)편과 투구(鬪毆)편 목차. 살인 유형과 형량은 인명편에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이밖에 희살은 장난치다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오살은 착오로 죽이는 것을 말한다. 과실살은 과실로 사람을 죽인 경우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과실치사에 해당한다. 형량이 어떠한지는 조금 복잡한데, 단순화한다면 희살은 투구살로, 오살은 투구살 또는 고살로 처벌하고, 과실살은 투구살에 준하여 처벌하도록 규정하였다. 

현행 형법 250조에 따르면 사람을 살해한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같은 살인이라도 법원에서 선고하는 형량이 제각각인데, 지금은 사람을 죽였더라도 몇 년간의 징역으로 죗값을 치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최근 소위 묻지마 범죄가 흔해지자 잔혹한 범죄에 대해 형량을 더 높여야 된다는 여론에 기대여 법무부에서 미국의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을 추진하려 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전반적으로 살인에 대한 형량이 사람들의 법감정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대명률』 형량은 앞에서 간략히 언급한 대로 전체적으로 지금에 비해 훨씬 무거웠다고 할 수 있다. 현행 형법과 『대명률』의 세밀한 비교분석은 추후로 넘기기로 하고, 이제 앞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박형대와 싸우다가 밀어 죽게 한 엿장수 신착실의 형은 어떻게 결정되었을까?


정약용, 정상참작을 주장하다

곡산부사를 역임한 다산은 1799년 5월에 형조참의에 제수되어 조정에 복귀하였다. 여기서 그는 지방에서 발생한 처리하기 쉽지 않은 살인사건 수사기록을 재검토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이때 황주 신착실 사건에 대한 황해도 관찰사의 종합적인 수사 결과 보고서도 볼 수 있었다. 다산은 경연(經筵)에서 국왕 정조에서 신착실의 행위에 고의가 없었기 때문에 정상 참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황주 신착실의 옥사는 의논할 것이 없지 않습니다. 실로 지게의 뿔은 본래 곧은 날이 아니고, 항문의 구멍 역시 은밀한 곳에 있어 교묘하게 서로 충돌한 것이지 이는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신착실에게는 비록 상대를 민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를 죽일 마음은 없었습니다.”

 

1900년 3월 강원도 횡성에서 일어난 홍여인 치사사건 검안. 왼쪽은 표지 부분이고, 오른쪽은 흉기로 쓰인 지겟작대기를 그린 부분이다. 신착실 사건과는 다르게 본 사건에서는 가해자가 적극적으로 지겟작대기를 휘둘렀다. 규장각 소장.

다산의 주장이 사건의 정황과 상당 부분 부합한다고 판단한 정조는 결국 신착실을 사형에서 한 등급 아래인 유배 보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정조의 판결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대개 항문 구멍은 지극히 작고 지게뿔은 지극히 뽀족한데, 지극히 작은 구멍이 지극히 뽀족한 뿔에 부딪쳤으니 지극히 교묘한 일이 겹쳤다고 이를 만하다... 신착실이 의도적으로 박형대를 꽁꽁 묶어 지게 위에 앉힌다 하더라도 반드시 뽀족한 지게뿔을 항문 구멍에 교묘히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옥사는 사소한 싸움이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졌다 할 수 있는데,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에게 너무나 불운한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살인의 고의 유무를 잘 살핀 다산의 지적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가해자 신착실에게 감형(減刑) 처분이 내려진 것은 적절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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