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과 원효, 향가를 만나 한국 서정시의 새벽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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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과 원효, 향가를 만나 한국 서정시의 새벽을 열다
  • 서철원 서울대·고전문학
  • 승인 2023.09.1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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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한국 불교시의 기원: 의상과 원효 그리고 균여』 (서철원 지음, 에피스테메, 368쪽, 2023.07)

 

1) 향가 연구의 아쉬움

고전시가는 명칭이 ‘시가’라서, 현대시와 달리 노래이면서 시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 자체가 이미 노래인데, 시이면서 노래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처음 공부할 때부터 와닿지 않았습니다. 또 고전시가는 시가이면서 가악(歌樂)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러니 궁중음악이나 민요를 비롯한 국악과의 관계를 통해 고전시가를 공부해야 제대로 된다거나, 예악이니 시경 같은 중국의 문예이론도 익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를 반감이 싹텄습니다. 고전시가도 엄연한 시라면, 마땅히 시로서 그 시어의 서정성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따져보는 게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지도교수께서 다행히 공감해 주셔서 힘이 되었습니다.

제가 전공하려던 향가는 마침(?) 악보가 남지 않아 음악적 성격을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그 서정성의 기원이 의상(625~702)의 불교시, <법성게>에서 유래했으리라 추정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실 텐데요. 의상은 방대한 『화엄경』의 내용을 <법성게> 210자로 간추렸습니다. 『화엄경』은 원래 10만 편의 시로 이루어졌다 할 만큼 방대한데, 이렇게 과감하게 줄이려면 고도의 압축이 필요했지요. 무슨 원리에서 그런 압축이 가능한지, 일상어와 다른 시어가 무엇일지 등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의상은 한국 문학사상사에서 시어의 본질에 처음 주목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소박한 민요나 궁중음악, 집단적 주술 가요와 멀지 않았던 향가가 본격적인 서정시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의상의 <법성게> 창작에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일상어와 다른 시어의 발견이 비로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의상과 동반자였던 원효(617~686)가 향가 <원왕생가>의 배경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의상을 계승했던 균여(923~973)가 11수나 되는 향가를 짓기도 했지요. 의상과 그 친구, 후예들이 향가에 이래저래 이바지했는데, 그저 향가만 바라보면 눈에 잘 띄지 않았습니다. 박사논문에서 그런 점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제 준비와 소질이 부족해서 역시 향가만 다루고 말아 아쉬웠습니다.


2) 의상과 화엄의 시학 이론

그래도 한국 서정시의 기원은 향가와 불교시의 만남에 있다고 꾸준히 믿었습니다. 10만 개가 넘는 문장을 210자로 줄였던 의상의 시어가, 결국 향가에 천 년을 넘는 생명력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의상과 원효, 그리고 균여를 다시 마주보기까지는 15년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사이 『삼국유사』를 번역하고, 불교 조각과 건축의 자취를 짚어가며 여러 가지를 상상했습니다. 일본에만 남았다는 『화엄경문답』을 통해 의상의 언어관과 비로소 만나게 된 것도 소득이었습니다. 관련된 논문도 드문드문 썼지만, 고작 A4 10~15매 남짓 제한된 분량으로는 생각의 전모를 밝히기 힘겨웠습니다. 책이 나온 지금은 그것도 다 그냥 추억이겠습니다.

보통은 원효를 의상보다 먼저 다룹니다. 나이도 더 많고, 대중불교에 끼친 영향력이 더 광범위하다고 판단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위에 밝혔듯 시의 언어가 지녀야 할 간결함과 압축성, 비유와 상징의 원리 자체에 주목한 분은 의상이었습니다. 원효 역시 1,080자의 장편시 <대승육정참회>를 지었는데, 이 작품은 참회를 통한 실천에 더 유의했습니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이라는 순서상의 대칭을 위해, 이 책은 의상을 원효보다 먼저 앞세웁니다.

의상의 <법성게>는 사각형 안에 작은 사각형을 계속 집어넣어 글자들이 흘러가며 굽이치는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이해되실 듯합니다.

화살표의 ‘법성(法性)’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의 ‘위불(爲佛)’까지 계속 굽이치며 불교의 ‘만(卍)’ 자 비슷한 형상을 이루어갑니다. 그런데 법성이란 곧 부처[佛]이기도 하니까, 끝과 처음이 형식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다시 만나는 회귀적 구성을 띱니다. 그 사이 내용은 참 다채롭게도 뻗어가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상대적으로 다 소중하다는 화엄의 본질을 한결같이 이어갑니다.

한때는 모두를 하나로 모은다는 뜻이 화엄사상이므로 전제왕권에 이바지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의상의 화엄 사상 연구가 깊어지면서, 모든 것들을 한결같이 소중하게 대하는 평등과 조화가 오히려 그 핵심이었음이 다행히 밝혀졌습니다. ‘화엄불국사’가 원래 이름이었던 불국사 역시 바둑판 모양 배치와 서로 비슷한 크기의 불상들을 통해, 평등과 조화라는 주제를 건축 미학을 통해 보입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불국사가 눈으로 보는 화엄의 세계였다면, 의상의 시는 그것을 시적 상상력을 통해 무한으로 확장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3) 원효와 참회의 실천

의상의 화엄 시학에서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도자로서 평생을 경건하게 살았던 인물이나, 세속적 욕망에 따라 방탕하게 살았던 인물이나 똑같이 소중한 존재일까요? 후자가 전자와 동등하게 소중한 존재, 깨달은 존재가 되려면 참회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 참회라는 실천을 이루어갈지, 원효는 장편시 <대승육정참회>를 통해 자세히 알려줍니다.

결론적으로 꿈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조신의 꿈 이야기 같은 설화나 <구운몽>의 꿈 등을 떠올려보면 이런 문학사적 전통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나 싶습니다. 원효 자신 역시 꿈에서 귀신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효는 향가 <원왕생가>의 설화 후반부에서 엄장이란 사람에게 쉬운 수행법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죽은 친구의 아내에게 욕망을 품고, 수행을 게을리했던 사람조차 깨닫도록 일깨워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만 이렇게 봉사했던 게 아니라, 사람마다 수준이 다르므로 수행법도 다양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원효는 다수의 수행법을 여러 저술에서 개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의상의 이론과 원효의 실천은 균여의 향가 <보현십원가>에서 다시 만납니다. 그들이 여지를 남겼던 쟁점 역시 균여를 통해 해소되기도 합니다. 사상사에서 평등과 참회를 중시한 게 꼭 이들만은 아니겠지만, 문학사에서 이 주제에 주목한 건 이들이 처음이었습니다. 이 주제를 시어로 표현하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려 했던 과정에서 향가의 시어와 서정성 확립을 도왔습니다. 한편 그 성과가 개인적 관음 신앙에까지 파급되고, 화엄의 세상이 조선 시대 자연관의 무정설법으로 재현되었던 확장성을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서 제시했습니다.


4) 마음의 끝을 좇는 인문학

마무리 삼아 향가 한 구절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본격적인 불교시는 아니지만, 향가 <찬기파랑가> 7~8행에 “지니던 마음의 끝을 좇으리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기파랑처럼 훌륭한 분의 뒤를 따르리라는 평범한 뜻인데요. 그냥 마음을 따른다고 쓰지 않고 마음의 끝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의 끝을 따라 하늘의 달부터 물가 저편, 잣나무 가지 위까지 다니며 시선을 옮기는 게 <찬기파랑가>의 내용 전체입니다.

여기서 끝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가 무엇일지 내내 궁금했습니다. 희미해지는 그분의 마음 끝자락이라도 잡고 싶다는 안간힘일지, 혹은 그분의 마음이 너무나 대단해서 나는 다 이어받지 못하고 고작 끄트머리 일부만 겨우 흉내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겸손함일지, 도리어 그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이어받겠다는 결연한 의지일지, 이도 저도 아닌 다른 무엇일까? 아니면 이걸 다 포함한 것일까? 생각할수록 끝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뚜렷이 지정할 수 없었으니, 제게는 기파랑의 마음의 끝을 좇을 자격이 없습니다.

인문학이란 그렇게 밝힐 수 없는 일에 안간힘을 쓰며, 겸손함과 결연한 의지 사이에 줄타기하는 게 아닐까도 싶습니다. 한 글자 한 구절에 집착하는 게 탁상공론처럼 비치기도 하겠지만, 각각의 작은 하나가 지닌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의상과 원효가 추구했던 화엄의 세상이기도 하겠지요. 인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이나 무시하는 분들 모두 이 작은 하나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서철원 서울대·고전문학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경남대와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향가와 삼국유사, 불교시 등 고대 한국의 서정, 서사, 사상을 두루 연구해 왔으며, 한국 시가의 이론과 고전의 현대적 소통에 관심을 지니고 있다. 그간 지은 책으로 『고전시가 수업』, 『삼국유사 속 시공과 세상』, 『향가의 유산과 고려시가의 단서』, 『향가의 역사와 문화사』, 『한국 고전문학의 방법론적 탐색과 소묘』 등이 있으며, 『삼국유사』를 번역, 해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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