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상태바
모두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3.09.04 02: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유경 칼럼]

지난 1년간 연구년을 보내고 복귀한 첫날 2학기 입학식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 온 학생 한 명이 ‘교수님, 100분 토론에서 뵈었어요’라는 인사말을 건넸다. 이는 필경 ‘TV스타’를 실물로 만나니 더 반갑다는 뜻을 담은 고마운 제스처였을 것이다. ‘아 저는 거기 나간 적이 없는데요’라고 약간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순간 학생의 얼굴에 실망하는 표정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잡을 필요성이 분명히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대학교수라고 하면 방송에 출연하여 ‘폼’ 잡고, 무슨 장관입네 무슨 당 국회의원입네 하며 공직에 나가 ‘광’ 내는 사람쯤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교수들에게는 으레 ‘폴리페서’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찍힌 사회적 낙인이 오히려 ‘스타’ 교수라는 정반대의 인증 효과를 내는 듯하다. 심지어 공중파 방송을 비롯하여 종합편성 채널, 유튜브 등 각종 뉴미디어가 난립하는 현재 상황에서는 이들 미디어의 단골 교수들이 ‘석학’으로 둔갑하고 조용히 연구실 지키며 책 쓰고 논문 쓰며 학생 챙기는 교수들은 별 볼 일 없는 ‘서생’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 존재감 없는 서생들이 안 팔리는 학술 책 작업을 그만두고 성실히 학생 지도하는 일을 포기하는 순간 대학의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왜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띤 사람들이 미디어 ‘석학들’과 끊임없이 비교되면서 자괴감을 느껴야만 하는가. 말이 난 김에 마저 하자면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교수들은 대부분 제 공부하고 학생 지도해야 할 시간에 ‘00토론’ 같은 공방전에 참여해 진땀을 빼며 진영논리에 맞게 ‘썰’을 푼다. 일종의 ‘스핀닥터’(spin doctor)인 그들을 오랜 기간 특정 주제의 연구를 숙성시킨 ‘석학’과 어찌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를 좀먹는 고질병은 이 같은 ‘본말전도’(本末顚倒) 관행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근본을 흔들어대는 까닭에 무엇이 ‘본’이고 ‘말’인지 무엇이 ‘먼저’고 ‘나중’인지를 가릴 명백한 기준들이 혼탁해진다. 그리고 기준을 특정할 수 없어 그때그때 대충 넘어가는 임기응변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목소리 큰 사람, ‘윤핵관’처럼 권력에 줄 대고 있는 사람, 또는 줏대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그러한 상황의 최대 수혜자가 되기 때문이다. (처음 두 부류는 자신에게 유리한 새 기준을 설정해 이득을 취할 수 있고, 마지막 부류는 이득이 보이는 쪽에 숟가락을 얹기가 수월하다.) 

이러한 어지러운 행태가 용인되면 안 되는 곳이 바로 교육 현장이다.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교육의 핵심은 모름지기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릴 수 있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명시화하고 내재화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들에서 그러한 기준 설정의 임무가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선생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까닭이다. 얼마 전 서이초교 교사의 죽음이 방증하듯 교권을 지키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니 다들 몸을 사리고 말을 조심한다. 교육자의 꼿꼿함이나 스승에 대한 존경심도 이제 다 옛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학교 교육의 근본 기능은 먼저 배운 자(‘선생’)가 나중에 배우는 자(‘학생’)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전수해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챗GPT, 바드, 하이퍼클로바X 같은 생성형 AI 지식 생산 및 검색 기능이 고도로 세련화함에 따라 지식의 상대적 우월성이라는 교육자의 권위 토대가 심각히 잠식되고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학생의 학력 평가는 지금껏 선생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잘 유지돼 온 영역이었다. 그러나 조만간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은 답안지, 과제물, 서평, 시, 그림, PPT 발표문 등이 피평가자들 간의 차이를 크게 줄이거나 아예 사라지게 할 것이며 그 결과 선생의 고유한 평가 기능마저 심각히 축소될 것이다. 

사실 이처럼 교육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그리고 장차 더욱 떨어지게 될) 학교 현장에서 무슨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마 챗GPT나 유사 인공지능의 사용을 금지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서이초교 교사의 죽음 이후 교육부가 교권 보호 명목으로 대대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보호책들이 기대만큼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요 며칠 사이 서울과 지방의 초등학교 교사 둘이 또다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는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해법이 요구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대학』에 이르기를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며,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워진다’(物有本末 事由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고 했다. 이 고래(古來)의 문장에서 지혜를 구하자면, 선생이 선생답게 학생이 학생답게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바 본분에 충실할 때 무너진 교육 현장의 질서가 바로 서게 될 것이다. 같은 논리로 국가수반인 대통령이 대통령답게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가 명실상부한 공당의 대표답게 국정의 ‘본말’과 ‘종시’를 올바로 살필 때 작금의 국정 난맥상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그렇게 할 준비가 전혀 안 된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모두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의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패러다임,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2017), 『한국 민주주의의 새 길: 직접민주주의와 숙의의 제도화』(공저, 2022), 『문화의 이동과 이동하는 권리』(공저, 2022), 역서로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 『책임과 판단』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