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직접 쓴 일제강점기 조선(한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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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직접 쓴 일제강점기 조선(한국) 이야기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9.0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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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치의 회고와 비판: 일본인이 쓴 『역(逆) 징비록』 | 이노우에 등 90인 지음 | 신한준·김슬옹 옮김 | 가온누리 | 360쪽

 

이 책은 조선총독부가 조선(한국) 통치 25주년을 맞이하여 1934년 무렵 조선신문에 90명이 쓴 90편의 글을 모아 1936년에 출판한 책이다. 학술적이지 않은 에세이 형식이라 편찬 의도도 분명하다. 두루두루 많이 읽게 하려고 만든 책이다. 

책 일러두기에서 “이 책을 6호 활자체(8pt)로 인쇄한 이유는, 수록된 자료가 조선 통치에 관한 문헌으로서 귀중하므로 풍부한 내용을, 될 수 있는 대로 가격을 높이지 않고 보편적으로 소개하려 고심한 끝에 준비한 때문이다.”라고 스스로 그런 점을 밝히고 있다. ‘조선통치 25주년’의 의미를 강조하고 홍보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피지배 한국으로서는 피가 솟는 얘기들이지만 저들의 글에는 일본 우월주의에 의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넘쳐난다. 회고만 있고 당연히 식민 지배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없다. 비판이 있다면 통치 방식과 결과에 대한 일본 내부에서의 비판일 뿐이다. 결국 비판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통치 찬양이요 자화자찬의 연장이다.

이 책은 1995년에 복간판이라는 이름으로 영인본이 출판됐다. 한일병합사 총서 1권이다. 복간본 책임자인 히사 겐타로는 후기에서 ‘한일병합’은 불법 수탈과 침략의 역사임을 지적한 일본의 양심 지식인들의 논조를 지지하고 있다. 곧 조선총독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어 ‘소천황’이라 불리기까지 하는 존재였다. 또 경찰기구를 근간으로 하는 무단정치는 결코 ‘선의의 나쁜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탈과 전횡의 정치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수록된 글들이 “직책의 쟁쟁한 직함으로 글을 쓰고 있으나, 그 대부분 의 내용은 반성과 참회가 부족하다고 해야 한다.(さらに本篇に及んで役職の錚?たる肩書で文章を書いているが、その殆どの?容は反省と懺悔に欠けるものといわなければならない。)”라고 했다. 여기서 양심 일본인의 한계가 드러난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반성과 참회는 거의 없다. 그러나 히사 겐타로는 이 책의 역사적 가치만은 정확히 짚고 있다.

이 책 전체가 근대사의 반면교사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후세에 대한 자료로 버려서는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집필자의 전부라고 해도 좋은 사람이 당시 정계, 경제계, 관계 혹은 재야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증언력의 중요성은 상상된다. 즉, 수탈하는 측의 논리가 정리 되어 있는 것이 본서의 특질이다. 특히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전형적 관료인 사카타니 요시로, ‘만코 내각’의 기요우라 게이고, 외교관 하야시 곤스케 등의 회고는 소위 통치하는 측의 논리로 가득 차 있고, 경찰 문제에 지면을 할애한 총독부 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의 글에는 3·1 독립 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는 등 불가해한 논조가 너무 많다. 그중 권두의 우익 우치다 료헤이(흑룡회 회장)의 글에 600여개를 할애하여 한일의 ‘합방’ 전후와 25년 후의 정치적 정황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어, 오늘날의 조선사 연구에도 충분히 참고가 된다.

바로 반면교사와 미시사로서의 가치다. ‘반면교사’의 의미는 명확하다. 일본은 이런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한국은 그런 피해를 더 입지 않기 위한, 우리에게는 또 다른 징비록인 셈이다. 미시사로서의 가치는 매우 섬세하고 자세한 이야기나 역사적 사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는 점이다. 한국 역사 교과서는 상당 부분 거시사 위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1909년 12월 22일에 이재명 의사와 그 동지들이 이완용을 습격하여 “이완용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라고만 배운다. 그런데 이때 이완용의 목숨을 구한 일본의 명의의 회고담이 자세히 나온다. 열여덟 번째 글인 ‘위생 사상의 보급’이라는 모리야스 렌키치(森安連吉)의 회고담이다. 그는 전 조선총독부 의원, 내과부장, 의학박사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이재명 독립투사는 사형당했지만, 이완용은 악착같이 살아 무려 16년을 더 살다가 1926년에 죽었다. 의사에게 아군과 적군의 구별은 필요 없지만, 그의 의사로서의 책무와 실력이 매국노를 살려 한국민에게는 또 다른 고통을 주었으니 그는 결국 일본인 의사였을 뿐인가? 이런 회고담이 주는 역사적 의미는 독자 각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을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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