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사상의 최종 정점, ‘정치 판단론’
상태바
한나 아렌트 사상의 최종 정점, ‘정치 판단론’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9.03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칸트의 정치철학 | 한나 아렌트 지음 |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320쪽

 

이 책은 칸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여는 동시에 아렌트 사상의 최종 정점인 ‘정치 판단론’을 담은 13회에 걸친 아렌트의 대학원 강의록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자 아렌트의 강의 주제이기도 한 ‘칸트의 정치철학’은 사실 엄밀히 따져보았을 때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는 살아생전 정치철학에 관한 저술을 남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 점을 염두에 두며 강의 내내 신중한 칸트 해석을 이어가면서도 그것이 칸트를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분명히 다른 철학자들은 칸트가 하지 않은 일을 했지요. 다시 말해 정치철학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게 그 철학자들이 정치에 대한 더 높은 식견을 가졌다거나, 정치적 관심이 그들의 철학에서 더욱더 중심적이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74쪽)

‘칸트의 정치철학’을 말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과제는 ‘정치’를 규명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미 『인간의 조건』에서부터 자신의 정치 개념을 명료히 해왔다. 인간의 복수성(plurality)에서 비롯한 각기 다른 인간의 개별성·상대성·현실성이 아렌트가 말한 정치의 본질이다.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관심을 가졌던 칸트는 이를 사유하는 정신의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서부터 칸트의 비판적 작업이 시작된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성의 이론적 능력을 탐구하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지성적 존재로서의 이성의 쓰임을 탐구한다. 이 두 작업은 모두 철저히 논리적인 관점에서의 보편성을 띠지만 실제 인간 세계와는 당연히 괴리될 수밖에 없다.

칸트의 마지막 비판서 『판단력 비판』은 미적 인간을 탐구한다. 개별자들 속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앞선 두 비판서에서 다루었던 지성적·인지적·도덕적 존재가 아니다. 철저히 현실적인 조건 아래 사유하는 인간 존재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아렌트는 칸트의 정치철학을 발견해낸다.

“미에 대한 사랑”이 “정치적 판단” 안에 포섭될 수 있는 이유는 이것들이 공적인 출현이라는 근본적인 요구 조건을 공유하기 때문, 즉 이것들은 공적 세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208쪽)

아렌트 사상의 흐름은 철학에서 정치로, 다시 정치에서 철학으로, 그리고 마침내 정치와 철학의 결합으로 이어진다. 그 마지막 종합적 저술로 기획된 것이 『정신의 삶』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정신의 삶』 1부와 2부인 ‘사유’와 ‘의지’ 이후에 나올 마지막 3부인 ‘판단’을 끝내지 못한 채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기획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아렌트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이 ‘판단’을 가장 근접하게 엿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칸트의 정치철학』이다.

아렌트는 1970년 뉴욕 맨해튼의 뉴스쿨대학원 철학과 과정에서 열린 두 강좌, ‘칸트 정치철학 강의’와 ‘칸트의 『판단력 비판』 세미나’를 통해 자신의 정치 판단론의 핵심 개념과 사상의 개요를 제시했다. 정치 판단론이 아렌트 사상의 최종 정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최초의 주저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인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 이론을 통해 가장 결정적인 형태로 응답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렌트 저술의 흐름 속에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의 문제의식은 『인간의 조건』(1958)에서 정치 개념으로 구체화되었고, 『혁명론』(1961)과 『공화국의 위기』(1970)에서는 이러한 정치 개념이 현실 속에 적용되었다.

이 같은 과정 중에 아렌트는 『뉴요커』 특파원으로 1961년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이후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내며 정치 영역의 파괴를 전제하는 전체주의에 대한 통찰로서 ‘무사유’를 지적한다. 이 통찰에서부터 아렌트는 철학의 핵심 경험인 사유를 다시금 주목해 인간 정신에 관한 연구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더불어 아렌트의 또 다른 책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도 정치 개념과 철학적 문제의식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아이히만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아렌트는 정치와 철학을 결합시키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최후의 저술 『정신의 삶』(1978, 사후 출간)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사유의 과정 끝에 담긴 결론의 씨앗이 이 책 『칸트의 정치철학』에 담겨 있다.

“그는 판단을 자신의 특별한 강점으로 여겼으며, 의지에 대한 성찰로 인해 그가 만나게 된 난점에 대한진정한 의미에서 바라던 해결책으로 여겼다. 『판단력 비판』이 칸트에게 이전의 비판서들에서 봉착한 이율배반 가운데 몇 개에 대해 돌파구를 찾아준 것처럼, 아렌트도 판단을 위한 우리 능력의 본질을 연구함으로써 사유와 의지가 가진 난제들의 해결을 희망했었다.” (186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