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년 … 진실·책임·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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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년 … 진실·책임·기억’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09.0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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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대지진 100년, 4개 역사기관 공동 국제학술회의 개최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8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에서 '관동(간토)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년 : 진실·책임·기억'을 주제로 국제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br>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8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에서 '관동(간토)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년 : 진실·책임·기억'을 주제로 국제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이하여 8월 30일(수) 4개 역사기관 공동으로 서울글로벌센터(종로) 국제회의장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년: 진실·책임·기억”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1923년 9월 1일에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등 관동지방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군과 경찰,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현재의 과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기획됐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關東)지방에 진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르고 이재민은 340만 명에 달한 초대형 재난이었다. 재난으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라거나 ‘방화한다’ '폭동을 일으킨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살해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은 1923년 12월 5일 자 신문에서 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로 인한 피해자가 6천661명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간토대지진·대학살 100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국가적 사죄와 배상은커녕 진상규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 책임과 사죄, 추도, 교육 등의 문제가 남아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보수우익세력이 추도식을 방해하거나 외국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가 계속 되고, 재일 한국인에 대한 증오 범죄도 발생하고 있다. 이들 일본의 보수우익과 역사수정주의 세력이 활동 범위를 넓혀 구미 사회에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이들의 주장이 역사부정론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학술회의는 한국과 일본, 중국, 미국에서 참석한 9명의 연구자들이 주제 발표를 하고 현재적 문제와 과제 등을 토론하는 자리로서 세션은 진실, 책임, 기억 3부로 나누어 진행됐다. 

 

1부 '진실' 세션에서는 은폐된 역사적 진실 규명을 위한 한국과 중국의 심화된 연구 현황이 발표됐다. 

성주현 청암대 교수가 조선인 희생자 명부 현황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성주현 청암대 연구교수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희생자 명부에 대한 현황’에서 "올해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이기도 하지만, 학살된 6천여 명의 조선인 명단을 제대로 발굴하지 못하고 지낸 지도 100주년을 맞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는 일제 강점으로 인한 식민지 상황이었기에 진상 규명과 명부 파악은 불가능했지만, 해방 후에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부끄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성 교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당시 국내에서 발간된 신문과 간토대지진 관련 자료집, 일본 현지 추모비 등을 분석해 확인한 희생자 명단 일부도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재일 사학자 고(故) 강덕상 씨와 금병동 씨가 1963년 펴낸 '현대사자료'에서 조선인 희생자 32명이 확인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서는 21명의 명단을 파악할 수 있다. 성 교수는 "문헌, 증언, 추도비 등에서 확인한 조선인 희생자는 중복된 사례를 모두 포함해 316명"이라며 "기존 자료와 새로 발굴된 자료 등을 통해 꾸준히 연구가 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러징 중국 원저우대 교수는 ‘학살·수용·송환: 관동대지진 일본의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 및 배척 사건’이라는 주제의 발표를 통해 간토대지진 당시 중국인 노동자 학살 사건의 실태를 밝히고, 일본 정부가 중국인 노동자를 구금하고 송환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그는 1922년 일본 경제 위기 발발과 실업률 상승 뒤 중국인 노동자가 대지진 발생 때 분풀이 대상이 됐다고 봤다.

 

간토학살100주기추도사업추진위원회 관계자 등이 지난 8월 23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간토학살 국가책임 인정하라’ 간토학살 100주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br>
간토학살100주기추도사업추진위원회 관계자 등이 지난 8월 23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간토학살 국가책임 인정하라’ 간토학살 100주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부 ‘책임’ 세션에서는 관동대지진 당시의 학살을 식민지 제노사이드, 난징학살과 연계시킴으로써 범죄에 대한 국가 책임의 문제를 논의했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수많은 희생을 불러온 학살 사건의 국가적 책임을 논했다. 그는 간토대학살을 '식민지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라고 칭하고 "일본 정부의 국가 책임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짚었다.

이 교수는 "일본의 군대와 경찰은 적극적으로 조선인을 학살했고, 자경단 활동을 지원하고, 심지어 외부 탈출을 막고 구출한다는 미명 아래 수용소로 나포해 살해하거나 자경단에게 배정해 학살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발적 자연적 재난 앞에서 발생했지만, 일본 근대사에서 축적된 조선인에 대한 혐오 감정이 조선인을 상대로 폭력적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학살의 원인을 분석했다.

이 교수는 대학살 이후 최근까지 반복된 ‘패턴’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처음부터 조선인을 잠재적인 폭동범죄자로 만들고, 그들에 대한 선제적 살해를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피살자를 매장하여 은폐하고, 피해자 규모를 축소하고, 진실에 드러날 즈음에는 국가의 관여를 부인하고, 일부 민간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솜방망이 처벌로 정의를 희롱하고, 진실의 외부유출과 진실보도를 극도로 통제하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러한 학살이 없었다고 부인한다.”

이 교수는 계엄을 선포하고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유포한 공직자들, 유언비어로 학살을 부추긴 언론인들, 현장에서 조선인을 제압하고 학살에 가담한 군인, 경찰, 자경단원들을 “제노사이드 범죄의 기획과 실행”에 관여한 이들 즉 형사 책임을 물을 대상으로 봤다. “군대나 경찰, 관료조직과 같은 국가기관이나 그에 소속된 개인의 행위는 국가의 행위로 간주되고 민사적인 국가책임이 발생한다. 국가기관이 아니더라도 정부의 공권력을 행사할 권한을 부여받는 단체나 개인의 행위도 국제법상 국가의 행위로 간주된다”고 밝혔다.

관동(關東·간토) 대지진 당시 학살 당한 조선인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사진제공=e영상역사관]<br>
관동(關東·간토) 대지진 당시 학살 당한 조선인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사진제공=e영상역사관]

사이토 가즈하루 일본복지대학 교수는 ‘남경사건과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중국인 학살을 연결시켜 생각하다’를 발표했다. 그는 제국주의 시기 전쟁과 식민지 시기의 두 폭력 사건의 공통점을 논하고, 범죄에 대한 책임과 처벌에 대해서 검토했다. 

대지진 때 700여명의 중국인이 살해됐다. 주로 중국인 노동자였다. 사이토 교수는 난징대학살 이후 일본인 당사자들을 처벌한 일이 없는 사실을 예로 들며 “책임 소재가 불명확해져, 세대를 초월하여 사실(史實)에 ‘뚜껑’을 덮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국민의 기억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은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토 게이키 히토츠바시대 교수는 ‘식민지 지배 책임과 조선인 학살-일본인의 역사 인식의 과제’에서 역사 부정론을 다룬다. 그는 "현재 일본 사회는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 역사를 정당화하고 피해자를 멸시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조선인 학살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라는 비판적 역사인식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토 교수는 일본인이 조선인 학살의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근본 문제가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며, 중대한 국가범죄라는 인식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의 근원을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 등이 체결되면서 형성된 ‘65년 체제’로 본다. 북한,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는 한미일 체제다. 그는 “이 체제를 유지·안정화하기 위해 역사문제의 분출이 억제된 것”이라고 했다.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 2002년의 한일 월드컵, 2003년 이래 ‘한류 붐’과 ‘한일우호’ 속에 “전쟁 책임·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는 은폐되었다. 일본인 다수는 역사문제를 망각하고, 표면적인 ‘한일우호’만 계속되면 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어 버렸다”고 분석했다.

2019년 3·1 운동 100주년에 일본 외무성이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3·1운동 100주년 관련 집회·데모에 대한 주의 환기를 발령한 것을 두고 “정치가와 매스컴은 ‘반일’인 한국인은 ‘위험’하다는 정보를 확산시켰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 대부분은 이상과 같은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받고 있다. 역사부정론 주장을 믿는 사람도 적지 않으며, 식민지 지배의 가해 실태를 인정하는 사람도 ‘이미 해결된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는 한국’이라는 언설을 믿고 있다. (… ) ‘나쁜 것은 한국’ 등과 같이 피해자 측과 가해자 측을 전도시키는 인식마저 확산되고 있다. 일본의 가해 역사를 비판하는 사람은 ‘반일’이며, ‘극좌’라고 매도당한다.”

조선에 대한 경제 침략을 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2024년부터 1만 엔권 지폐의 초상이 되는 점을 두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것들은 침략전쟁·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긍정하는 것이며 차별”이라고 말했다.

 

30일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년:진실·책임·기억'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참가자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3부 ‘기억’세션에서는 미국과 일본, 한국의 연구자가 발표했다. 

이진희 이스턴 일리노이대학 교수는 글로벌 포퓰리즘 시대의 관동대지진 학살에 대한 역사 왜곡과 역사부정론에 대해서 살펴보고, 역사부정론이 어떻게 발생하고 확산되었으며 이에 대한 대응책에 대해서 논했다. 

그가 발표한 ‘하버드발 관동학살 역사왜곡과 학살부정론에의 대응’은 미국 하버드대학 미쓰비시 일본 법학 교수인 마크 램지어의 주장 등을 대상으로 했다. 램지어는 2019년 6월 발표한 ‘경찰 민영화: 일본의 경찰, 조선인 학살 그리고 민간 경비 회사’라는 논문에서 일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은 경찰 민영화의 한 사례이자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는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부정론 비판’에서 일본 내 학살 부정론의 왜곡과 허구, 그 악영향을 분석했다. 그는 조선인 학살 왜곡과 부정론을 확산하는 논픽션 작가 구도 미요코의 주장 근거가 되는 자료를 검토함으로써 일본에서의 조선인 학살 부정론자들의 주장에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비학문적이라고 논박했다. 

구도 미요코의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의 진실>(산케이신문출판, 2009)은 학살 부정론의 주 근거로 쓰이며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책이다. 구도는 책에서 “국가의 자위권 행사라고 하는 것이 옳다” “테러리스트를 ‘학살당했다’라고 하지 않는 것이 계엄령하의 국제 상식” 같은 주장을 한다. 정영환  교수는 책 핵심을 두고 “본서의 핵심은 ‘조선인을 죽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학살 부정론이 아니라, ‘죽였지만 정당한 살인이었다’라는 학살의 정당화론”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의 학살 부정론과 ‘역사수정’은 출간 이후 최근까지 일본 정관계와 시민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정 교수는 “관헌조차 믿지 않았던 신문기사에 나타난 조선인 폭동의 기사”를 근거로 하는 “구도의 견해는 극도로 무리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지적한 역사학자 야마다 소지 등 견해를 소개한다. 구도는 “인용 사료의 자의적인 절취”를 하고, “원전에 없는 것을 ‘참조’”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역사학자 피에르 비달나케의 “진리에 대한 공통의 경의”를 인용하며 “그런 전제가 결여된 역사수정주의자와의 ‘대화’는 성립될 리가 없으며, 그런 주장을 ‘학설’인 것처럼 인정하는 것은 그런 대화의 토대 그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도쿄도 스미다구 아라카와 인근에 있는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 순난자 추도비.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가 2009년 세웠다. 연합뉴스<br>
일본 도쿄도 스미다구 아라카와 인근에 있는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 순난자 추도비.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가 2009년 세웠다. 연합뉴스

이소훈 고려대 교수는 ‘혐오와 인종주의: 이슬람 혐오를 중심으로’에서 한국인의 인종주의 문제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우리를 향했을 때엔 거부하기 쉬운 인종주의의 시각을, 반대로 타 집단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자주 사용한다”며 한국 사회에 유포되고 있는 이슬람 혐오를 예로 들었다.

이 교수는 인종주의의 관념적 영향이 한국 사회의 깊숙한 곳에 침투해 있어 완전히 떨쳐버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봤다. “(하지만) 한국인과 같은 동질집단이 인종차별을 당했다거나 하면, 분노와 함께 강렬하게 (인종주의를) 거부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인이 ‘백인보다 한국인이 더 우월하다’라고 외치기보다 ‘한국도 여느 서구 선진국들에 뒤지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 익숙하게 느끼는 것을 두고 “그만큼 백인의 우수성에 관한 강한 신념이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했다.

이은정 경희대 교수는 ‘2000년 이후 한국 현대예술에서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소고’에서 한국 현대예술에서 역사가 다루어지는 방식을 세 명의 작가와 작품을 통해서 발표했다.

이 교수는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자료를 찾기 어렵고 제한된 구술과 증언 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들”과 100년 전의 학살이 점차 “어렴풋한 기억으로” 사라져가는 점을 지적했다. 임흥순의 <비념>, 제인 진 카이젠의 <이별의 공동체>, 송상희의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 <세상이 이렇게 종말을 맞이한다 쿵 소리 한번 없이 흐느낌으로> 같은 학살 문제 등을 다룬 영상 작품과 기억의 문제를 환기한다.

“아우슈비츠에 간다고 해서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는 건 아니잖아”는 타냐 슐츠의 문장은 “과거 세대의 범죄를 기억해야 한다는 필요성과 당위성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거리감과 무기력” “기억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등을 보여준다. 이은정은 “그 틈새를 비집고 역사 수정주의나 역사부인론이 유럽을 비롯한 일본과 한국에서 높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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