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의 업적은 곧 조선 경제사의 업적…대동법과 동전 통용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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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의 업적은 곧 조선 경제사의 업적…대동법과 동전 통용책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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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김육 평전: 대동법을 완성한 조선 최고의 개혁가 | 이헌창 지음 | 민음사 | 692쪽
 

대동법, 동전 통용책 등으로 17~18세기 조선 최대의 정책 업적을 이룩한 인물, 김육의 평전이 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에서 가장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경제 정책을 시행한 김육에 대한 평가와 함께 조선 경제사 또한 개괄한다.

일찍이 12세 때부터 경세제민의 뜻을 품었던 김육은 70대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며 그의 오랜 소신을 관철시켰다. 무수한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책 이념을 정립했던 김육은 말년까지 자신의 이상을 소신껏 추진하여 조선 후기의 경제와 사회 발전에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부국강병의 실패, 정책 구현 역량의 부족, 구조적 부정부패 등 제도개혁이 절실했던 시대의 부름을 받아 자신의 인생을 바쳐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대동법은 조세 제도를 공평하고 효율적으로 만든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이는 토지 결수에 따라 정량의 쌀로 조세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기존에 공물을 납부하던 방식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했다. 지방 관부의 불법적인 징세, 방납인과 관리에 의한 중간 수탈 등을 해결했다. 농지 소득에 따른 조세 기준을 확립함에 따라 조세 징수가 공평해졌고, 납세자들의 부담 또한 덜해졌으며, 조세 부과 기준이 명확해지고, 재정은 충실해졌다. 대동법은 민생 안정, 재정 충실화, 그리고 시장 발달을 통해 왕조의 부흥에 이바지한 최대 사업이었다고 할 만하다.

또한 대동법은 토산물의 수탈을 막아 생산을 촉진했다. 물품 화폐, 금속 화폐로 납부된 대동세로 공물을 조달하게 되면서 시장 또한 성장했다. 김육이 끊임없이 건의하고 추진했던 동전 통용책은 대동법의 확대 시행과 맞물려 조선 후기의 경제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조선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김육의 공로는 빼놓을 수 없다.

김육은 “평생 경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고 출세한 사람은 거의가 경세제민을 임무를 삼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평생 경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라고 『조선왕조실록』에서 평가받은 인물이 드문 점에서, 국가를 잘 다스려 인민을 구제하려는 김육의 사명감 내지 책임 의식은 각별했다. 그래서 김육은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대동법 등 소신의 정책 수행에 정치 생명을 걸었다.

김육은 여러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하면서 당파의 이해가 아닌 본인의 소신과 철학을 따랐다. 오로지 민생 안정이라는 큰 뜻을 가지고 이를 위한 제도 개혁에만 온 힘을 쏟은 것이다. 김육은 강직한 성품으로 정파를 초월해 정치력을 발휘했다. 공방을 거치며 대립했던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다른 당색을 가진 관료 간의 협력을 이루기도 했다. 뚝심 있는 소신과 정파를 초월한 정치력은 김육을 조선 왕조 최대의 정책 업적을 이룩한 인물로 만들었다.

김육의 생애는 ‘10대에 임진왜란으로 부모를 잃고, 30대에 벼슬의 뜻을 꺾었던 김육, 70대에 정승에 올라 뜻을 펼치다’로 요약할 수 있다. 많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김육은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구체화했다. 젊은 시절의 경험은 오히려 그가 펼친 소신과 업적의 토대가 되었다. 김육은 전란을 겪고, 은거하며 농사를 짓고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을 위한 정책 실현을 소명으로 삼았다. 김육이 이러한 소명을 위대한 업적으로 이뤄 낼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부지런함과 정신력이 동력이었다. 잠곡에 은거하던 10년 동안에도 학문에 정진하며 경륜을 쌓았고, 지방관으로서 일하면서도 풍부한 저술과 출판 활동을 하며 자신의 사상을 공고히 했다. 김육이 후대에 남긴 정책 업적은 이렇듯 꾸준한 노력이 맺은 결실로 평가된다.

김육은 다양한 학문에 개방적인 자세로 접근하여 조선 후기의 과학 기술 발달에도 이바지했다. 명분과 의리에 매달렸던 주자학자들과 달리 박학(博學)을 추구했으며 ‘오랑캐’로 간주되었던 청나라의 문물뿐 아니라 서양의 문물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 선진 기술과 과학을 도입하고, 전문성을 갖춘 기술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힘썼다. 시헌력의 도입은 대표적인 성과였고, 중국의 수차, 수레, 직기의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김육이 공헌한 대동법은 근세적 조세 국가의 성립에 이바지했고, 동전 통용책을 비롯한 화폐 제도는 시장의 발전을 일구었다. 또한 승지로 있을 때 주장한 서울 하천의 정비 사업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 간접 자본의 구축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왕조가 경제 성장을 위한 사회 간접 자본의 구축에 유능하지 못했던 것에 비추어 보면 김육의 존재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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