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의 우로보로스 상징,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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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의 우로보로스 상징, 여성
  • 권석우 서울시립대·영문학
  • 승인 2023.08.27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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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메두사와 팜므 파탈: 지혜와 생명의 여성 - 꼬리 먹는 뱀 우로보로스 사유와 서양 문명 비판 2』 (권석우 지음, 청송재, 414쪽, 2023.07)

 

필자는 총 3권으로 기획된 “우로보로스 사유와 서양문명 비판”의 제1권 『선악과와 처녀잉태』(2023.2)에서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여성을 죽음으로 보는 사유, 그리고 근자에 출판된 제3권 『전쟁과 평화, 사랑과 죽음』(2023.7)에서 여성을 전쟁과 죽음의 화신으로 보았던 서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논의를 했다. 1권을 표어식으로 간단하게 정리하면 선악과는 인류가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별의 좋은 과실이었고, 예수님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처녀이신 어머님에게서 출생했다는 것이며, 3권은 전쟁과 평화, 그리고 사랑과 죽음이 교차배어(交差配語, chiasmus)식으로 우로보로스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 핵전쟁의 소멸의 시학 앞에서는 그 형성력을 잃어버려 인류는 세기말을 거쳐 유대인대학살, 베트남전쟁, 그리고 핵이라는 미증유의 현상을 목도하면서 안티 우로보로스의 암울한 세대를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소개할 2권 『메두사와 팜므 파탈』은 선악과와 뱀, 처녀와 창녀, 전쟁과 죽음과 평화 등의 우회로를 택하지 않고 존재와 삶, 지혜의 여성 자체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어 1권과 3권에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뼈대를 제공해 주는 징검다리격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죽음의 여성에서 삶의 여성으로의 전환에 관한 사유에 대한 점검일 것이다. 

 

삶과 죽음의 여성, 그리고 이것을 체현하고 있는 달과 이와 연관된 우로보로스 상징인 뱀, 그리고 이것들이 표상하고 있는 시간과 죽음은 지나간 3~4천 년 서양의 상상력을 석권해왔고, 삶에서 죽음이 기인하는 현상에 대한 관찰과 죽음에 대한 인류의 알아차림은 윤회와 영생, 그리고 부활에 대한 사유를 형성해왔다. 과분하게도 이미 대학지성에서 2권에 관한 내용요약을 행하여 서평으로 실어주었으니 여기서는 간단하게 그 요지를 축약적으로 말하기로 한다. 

제2권의 첫 장인 5장은 1권에서 논의한 여성성과 이와 연관된 생명·죽음과의 상관성을 여성의 근원이자 에센스로 여겨지는 여성 성기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논구하는 부분이다. 출산이 이루어지는 여성의 성기를 결국에는 죽음의 원초적 기관으로 보게 되는 습속을 추적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필자는, 여성의 성기를 부활과 재생을 또다시 준비하는 기관으로 보는 사유의 한 가닥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달의 “이움과 참”(wane and wax)이 여성의 임신과 월경(月經, menses)으로 체현되는 과정을 추찰하면서 인류는 죽음을 넘어 삶을 다시 기약하고 있었으니, 예수를 잉태한 “신성한 원천으로서의 흠 없는 자궁” 또한 여성의 생물학적 자궁임이 분명하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fleur du mal)은 동시에 생명의 꽃이 됨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인류는 수많은 인류학적 고찰이 확인해주고 있듯이 여성 성기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 사유를 견지해 왔고 이와 같은 경향은 문학도 그러하지만 특히 회화 분야에서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의 원인을 삶이 배태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고 우리들의 지난한 삶은 소박하게 증거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등가성”(Bachelard 『대지, 휴식의 몽상』, 199) 내지는 가역성을 필자는 계속해서 말하고 싶었지만, 영원과 지속을 말하는 형이상학적 견지에서 삶은 죽음이며 죽음은 삶으로 해석될 뿐, 죽음이라는 절망과 삶이라는 고단함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어 삶과 죽음을 분리하고 있다. 

이어지는 다음 부분들에서는 여성 성기를 지시하는 우로보로스의 신물인 뱀과 그것의 상상적 변형인 메두사에 대한 분석으로 채워졌다. 필자는 우선 6장에서 프로이트가 분석한 메두사와 거세에 관한 이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후, 그의 메두사에 관한 상념이 그 자신도 필요하다고 상정하는 “메두사의 기원에 대한 [신화적] 연구”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체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지는 7장에서는 메두사에 대한 양가적인 판단, 즉 추함과 거세로서의 메두사에 대한 인상적 논의와 더불어 그녀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에 대한 표현과 예찬이 함께 있어 왔음을 이와 관련된 시문학과 회화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드러낸다. 역사의 파국을 몰고 온 파멸의 사이렌들이 오히려 남성들이었다는 식수(Hélène Cixous)의 메두사에 대한 재평가는, 3기 페미니즘을 훌쩍 지나 포스트 페미니즘이 운위되고 있는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젠더 역차별이라는 문제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식수의 메두사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웃음을 선사하여 메마른 대지에 다시 풍요와 평화를 선사하는 니체의 여성 성기에 대한 비유인 바우보(Baubo)와 닮아있다. 

 

아름다운 메두사에 대한 본격적인 고찰은 8장에 이르러 신화 속에 나타난 메두사를 역사적으로 복원하는 작업 속에서 이루어졌다. 메두사는 아테나 여신의 전신으로서 나일 강 유역에서는 “존재”를 의미하는 네이트(Neith) 여신으로도 불렸는데, 그녀가 최소한 희랍의 메티스(Metis) 여신과 같은 품위를 지니면서 아름다운 처녀이자 통치자, 여왕으로 군림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추악한 메두사에 대한 관념을 바꾸기에 충분한 것으로 판명된다. 메두사가 프로이트의 말대로 여성의 성기, 그것도 어머니의 성기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면 그것은 이제 아름답고 생명을 창출하는 기관에 대한 상징으로 재해석될 뿐, 그동안 서양의 주류 정신분석학이 행해왔던 거세와 상실과 부재, 그리고 죽음에 대한 해석으로 머물 수는 없다고 필자는 역설하고 있다. 서양 정신을 대표하는 학문 중의 하나인 정신분석학이 파악하는 대로 무(無)는 부재와 없음이 아니며 생물학적 의미이건 비유적 의미이건 여성 또한 거세되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필자는 有를 포함하는 무(無, mē on → das Nichts)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무(无, ouk on), 혹은 허무를 구별한다.

2권의 후반부는 여성을 죽음과 동일화하는 부정적 관념이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는 현상을 낳게 했던 유럽을 위시한 서양의 19세기 말에 관한 연구이다. 이론적으로는 이 책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는 9장에서 필자는 세기말의 회화와 문학에 관한 단편적인 성찰을 통하여 여성을 파멸과 죽음의 에이전트로 보는 현상이 세기말에 극점을 이루어진 현상을 고찰하는 가운데, 뱀이라는 심상을 넘어 이제는 강-바다인 물과 달과 죽음, 그리고 모성과 여성과의 어원학적 상관관계뿐만 아니라 말(馬)로도 표현되는 시간의 속성과 여성에 관한 젠더 관련성을 니체와 하이데거, 바슐라르 등 다양한 이론가들의 입장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추적한다. 

10장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가능케 한 유럽의 시대상에 대한 분석을 행한다. 세기말, 데카당스, 신여성, 팜므 파탈의 어원과 기원에 대한 추적뿐만 아니라 팜므 파탈의 세기말적 징후의 하나이기도 한 창녀의 창궐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필자는, 니체적 의미의 “여성적 삶” 또는 “삶이라는 여성”(vita femina)에 일견 함축되어 있는 여성비하의 의미를 넘어서, 팜므 파탈의 원래의 의미인 ‘생명의 여성,’ 즉 팜므 비탈(femme vitale)의 복원 가능성과 그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 여성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다시 복원하는 작업은 물론 여성과 죽음을 동일화하는 서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비판적 되돌아보기이기도 하면서, 19세기 말~20세기 초 한 많은 삶을 살다간 조선의 팜므 파탈들에 대한 필자 나름의 진혼(鎭魂)의 상념이기도 하다. 팜므 파탈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원래 혹은 이면에 함의하고 있었던 팜므 비탈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중첩과 동일함이라는 우로보로스 원형을 그려내고 있다.

3권에서도 논의가 일부 진행되고 있지만, 전쟁이 여성적 삶과 지혜(아테나는 전쟁의 여신이자 지혜의 여신이었다)라는 속성을 유실한 뒤안길에는 여성을 죽음으로 보는 서양의 습속이 작동하고 있는데, 필자는 2권에서도 이에 대한 반향으로 죽음의 여성에서 벗어나 삶의 여성을 복원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메두사(←메티스)가 길게 보면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과 수메르-바빌로니아의 인안나(이슈타르), 그리고 지중해권의 존재와 지혜, 전쟁의 여신 아테나(비단 그리스의 아테나 여신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존재했던 여신)와 같은 줄기의 신임을 논하는 가운데, 우리가 무심코 상용하는 팜므 파탈은 남성들을 유혹하여 폐해를 끼치는 치명적 여성, 즉 죽음의 여성이 아니라 삶의 여성임을 어원학적, 문헌학적, 문화사적인 분석을 통하여 밝혀내었다.

조선말의 파탈에 대한 분석은 덤이다. 파탈은 죽음 또는 파멸의 여성이라는 뜻이 아니라 “말하다”는 동사에서 연원하여 하늘의 명을 전하는 여사제를 의미하였으니, 니체가 피상적으로 말하는 삶과 진리의 여성과는 괴리가 있어 보인다. 한국의 대중음악에 나오는 “아모르 파티”는 파티를 즐기고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고^^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을 뜻하는 니체의 상투어라고 알고 있지만,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에 항거해야 할 때는 분연히 일어서는, 즉 자연에 거슬리지 않는 초인의 평정한 마음을 표현하는 글귀이다. 

총 3권을 관통하고 있는 필자의 원래 주제는 생사의 우로보로스를 삶과 죽음을 동시에 체현하고 있는 여성을 통하여 밝혀내는 것이었다. 1권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서양의 지성이 도달한 최고의 결론인 듯 보이는 변증과 역설의 수사학, 그리고 이를 종교철학적으로 풀어내었던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의 ‘상반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와 융(Carl Jung 1875-1961)의 ‘대극의 합일’ 또는 ‘융합의 신비’(coniunctio oppositorum, Aion 31; mysterium coniunctionis, Mysterium Coniunctionis 365) 등은 세상의 이원성 혹은 사물의 양면성과 이로부터 촉발되는 “하나로의 지향” 혹은 움직임을 표상하고 있는 필자의 우로보로스 수사(修辭)에 적합한 관념틀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사상가들의 사유뿐만 아니라 인구에 회자되는 변증법은 물론이지만 심지어 동일성과 차이와 모순, 즉 같음과 다름에 관한 온갖 입론들은 필자에게 우로보로스라는 표상을 정초하게 했고, 이로부터 나아가 필자는 시대를 달리하여 세기말과 유대인학살과 베트남전쟁을 염두에 두며 안티-우로보로스와 탈(脫)우로보로스를 추찰해낸다. 탈우로보로스의 사유에서는 여성을 매개로 뱀과 달이 표상하고 있는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의 등가성내지는 순환성이 성립하지 않아,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라는 토톨로기가 된다. 

말하자면, A와 B의 동일성과 유사성, 그리고 차이를 분별해내는 은유로부터, 인류는 진화하여 A를 A로 볼 수 있는 동어반복의 혜안을 갖추게 되었으니 순간이 영원이라는 테제에 대한 포기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삶과 부활이라는 미명으로 벗어나게 해 준다. 얘기인즉슨 삶과 죽음을 또 죽음과 삶을 같은 것으로 보는 사유에서 벗어나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라는 사유로의 전환을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여성을 삶이라 해놓고 다시 죽음으로 여겨 평가절하 하다가 다시 부활과 영생이라는 틀을 덧대어 삶으로 다시 보는 인류의 헛된 작업을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인류는 이제 여성을 매개로 하여 그녀에게 죽음을 덧씌우고 덮어씌우는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 “음흉하게도” 여성을 삶과 진리로 보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작업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여성을 죽음과 거짓으로 보는 작업과 다를 바 없으니, 우리는 이제 여성은 여성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를 “은유에서 토톨로기로의 전환”이라 명명한다. 서양인들의 이러한 작업들은 소위 죽음지향적 문명을 이루어내고 있었으니, 이는 비단 철학자 러셀이나 문화사학자 토인비만이 지적한 사안만은 아니다. 

필자는 1권과 3권의 서론과 결론에서 이와 같은 사유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21세기적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설파하고 있으나, 이는 물론 죽음이 삶과 부활로 여겨지는 사유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필자가 3권의 결론에서 제시하는 있는 장자(莊子)에 관한 분석은 그러므로 우로보로스와 탈우로보스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자가 제시하는 탈우로보로스의 순간학은 위안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에는 삶도 필요하고 죽음도 필요한 소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의 현상학은 따라서 원의 해석학과 순간학을 정초하고 있으며, 죽음학 혹은 사생학의 견지에서 보자면 이는 “흔쾌히 잘 죽자”의 사유와 이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불러들이고 있으니, 인류는 이제 죽는 것을 미사여구로 치장하지 말고 그냥 죽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이러한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2권은 그러나 여성과 삶, 죽음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한 우로보로스와 탈우로보로스라는 무게로부터 조금 자유로울 수 있어 신화와 음악, 회화 등 대중적인 소재들에 대한 분석을 행한 바, 교양서로, 또 학부생들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전공도서로 그 효용을 조금이라도 수행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다.  


권석우 서울시립대·영문학

서울시립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뉴욕시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제언어인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서울시립대학교에서 미국문학, 학살과 전쟁과 평화, 죽음학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우암논문상(2006)을 수상했다. 《영문학자가 읽은 장자의 사생관》이 2023년 하반기 출간 예정이며, 《번역이 바꾼 세계사》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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