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헌법의 역사를 바꾼 총, 선, 펜
상태바
성문 헌법의 역사를 바꾼 총, 선, 펜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8.27 03: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총, 선, 펜: 전쟁과 헌법, 그리고 근대 세계의 형성 | 린다 콜리 지음 |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616쪽

 

이 책은 1750년대부터 20세기까지 세계 차원의 성문 헌법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기존의 내러티브를 수정하고 헌법 제정과 전쟁 수행 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파헤친다. 이 과정에서 유명 헌법들을 재평가하고, 그동안 하찮게 여겨졌지만 근대 세계의 부상에 핵심 역할을 담당한 헌법들을 되살려낸다.

성문 헌법은 개별 국가들과 관련해 검토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저자는 헌법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1918년경 6개 대륙으로 퍼져나갔으며, 국가뿐 아니라 제국의 부상을 도왔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더불어 성문 헌법이 어떻게 법과 정치는 물론 그보다 더 넓은 문화사, 인쇄술과의 관련성, 문학적 창의성, 소설의 부상 등에서 나름의 소임을 다했는지 조망한다.

성문 헌법은 특정한 법적 제도라는 렌즈를 통해, 그리고 애국심에 비추어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보통 개별 국가와 관련해서만 분석된다. 특히 성문 헌법의 부상은 미국 독립 혁명을 비롯해 프랑스 혁명, 아이티 혁명,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불거진 여러 봉기 등 대규모 혁명이 영향을 미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이 같은 새로운 헌법의 주요 원동력에 대해서는 흔히 선택적 방식의 설명이 이루어지곤 한다. 성문 헌법의 출범과 그에 대한 인기가 증가한 것은 공화주의의 부상 및 군주제의 쇠퇴와 궤를 나란히 하는 현상으로 간주되며, 세계 전역에 걸친 기세등등한 민족 국가의 성장 및 거침없는 민주주의의 진보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주요 혁명, 공화주의, 국가 형성 및 민주주의와 연관된 현상으로 접근하면 논의가 지나치게 협소해지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이 책은 세계 전역의 국가·정치 행위자·평범한 남녀가 반응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리고 그들의 신뢰를 표명하는 방식의 이례적 변화를 도해화하는 데 관심이 있다. 저자는 여러 지리적 공간에 걸쳐 단일 문서인 성문 헌법이 눈부시게 발전한 현상을 설명할 때 순차적으로 휩쓸고 간 대규모 전쟁과 침략이 맡은 역할을 강조한다. 이런 유의 텍스트가 급증한 현상은 흔히 민주주의의 부상과 특정한(주로 서구적인) 입헌주의 개념의 매력에 비추어서만 설명되어왔다. 그러나 거듭된 무력적 폭력 사건들의 기여에 초점을 맞추면 좀더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견해를 제공하고, 훨씬 폭넓은 지형과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다. 헌법은 늘 서로 다른 형태를 띠었고, 다양한 목적에 기여했으며, 이게 바로 그것들이 성공하고 지속될 수 있던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혁명이 전쟁보다 더 매력적이고 건설적인 현상이라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대대적인 인간 폭력의 두 가지 표현 양식, 즉 혁명과 전쟁 간 이분법은 본디 불안정하며, 1750년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도, 그에 뒤이은 아이티와 남아메리카에서의 혁명도 하나같이 대륙 간 전쟁이 전개되면서 촉발하고 부채질한 결과였다. 또한 그것들은 훨씬 더 많은 전쟁의 발발에 힘입어 아이디어, 규모, 결과와 관련해 더욱더 큰 변혁을 이루었다. 전쟁은 그 자체로 혁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서 이전에조차 전쟁과 헌법의 창조는 더욱 생생하고도 가시적으로 얽히게 되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차적이며 지속적인 원인은 국경을 넘나드는 폭력과 전쟁의 수요 및 강도, 지리적 범위, 빈도가 증가한 데 있다. 1700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전쟁의 발발과 관련해서 규칙성이 현저히 증가했는데, 이러한 패턴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줄곧 이어졌다. 이 같은 전쟁 패턴의 변화가 헌법 제정에 미친 영향은 구조적이었다. 전쟁이 촉발한 위기로부터 등장한 새로운 정권들은 성문 헌법을 정부 질서를 재정비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경계를 표시하고 주장하며,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그들의 위상을 선전하고 피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분쟁과 공격 수위의 확대로 야기된 위험과 파괴 그리고 그에 상당하는 부담은 정치 엘리트들이 점점 더 새로운 헌법으로 마음이 기울도록 만들었으며,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동요하게끔 이끌고, 때로 그들을 적극적으로 떨쳐 일어서도록 내몰았다. 권력과 권위의 구조에 대해 좀더 비판적으로 논의하고 그것을 감시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것은 다시 새로운, 혹은 바뀐 헌법에 강화된 권리를 반영하라는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촉발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같은 이유로 서방 제국의 힘에 노출되어 위태로워진 서방 이외 국가들은 그 자체의 방어적이면서도 독특한 헌법을 실험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서방의 정치적·법적 사상이나 대책을 고스란히 본뜬 형태도 아니었다. 서방 강대국의 부상에 압박받는 서방 세계 밖의 몇몇 정치 체제와 토착 민족은 성문 헌법을 채택해 현실에 맞게 수정함으로써 그네들의 정부 체제와 국방 체제가 강화되길 희망했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든지 생존 가능하며 근대화했다는 것, 따라서 제국의 정복 대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문서상으로 천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1750년 이후 성문 헌법의 전 지구적 확산은 “수많은 서로 다른 행위 주체가 함께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이 행위 주체들은 대체로 “지정학과 불균등한 권력 분배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사상과 행동에 자양분이 되어준 것은 “원대한 희망과 유토피아적 약속”이었다. 하지만 헌법의 옹호자와 저술가들은 거의 언제나 “위협과 폭력”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

상이한 장소와 시간에 걸쳐 초안이 작성된 다양한 헌법의 조항과 자구 선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게 중요한데, 이것은 오직 그렇게 해야만 그 헌법들에 내포된 수많은 각양각색의 비전과 사상을 알아내고 밝히고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시종일관 본래 여러 상이한 언어로 작성되었으며 6개 대륙의 서로 다른 장소에서 유래한 다채로운 헌법 문서에 크게 의존한다.

미국의 독립 전쟁과 그로부터 출현한 성문 헌법은 많은 사상을 변화시키고 형성하는 데, 그리고 1776년 이전에 일부 유럽 지역에서 부상하던 새로운 정치 기술이 진전을 보이는 데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 헌법은 내용과 상황뿐 아니라 인쇄라는 수단을 통한 전파 덕택에 특히 19세기 내내 미국의 독립선언서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상 물정에 밝은 출판업자들은 1790년대에 이미 이런 추세를 알아차리고는 서로 다른 여러 국가에서 생산된 헌법을 한데 묶어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독자와 장차 헌법을 제정하려는 사람들은 문서상으로 국가를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 경쟁적 모델들을 비교·대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권리와 규칙을 공식화하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었다. 20세기 초에는 실제로 일부 신생 국가 및 정권이 자진해서 이런 유의 각국 헌법 모음집을 출간하는 데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급속히 발달한 인쇄술 덕분에 새로운 헌법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방식으로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시 발췌·전용·비교·선택과 관련한 정책 변화를 낳았다. 새로운 헌법 초안의 작성에 참여한 정치인·법률가·지식인·병사들은 여러 나라가 채택한 헌법의 인쇄물 모음집에 담긴 사상·제도·법률을 연구하고 그 가운데에서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차용하기로 결정한 내용을 그들 자신의 사상, 염원 그리고 법적·정치적 관습과 결합할 수 있었다.

헌법 저술가와 사상가는 우리가 흔히 기대할 법한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 책에 군주, 정치인, 법조인, 정치 이론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육군 장교, 해군 장교, 제국 장교들도 과거의 노예, 은행업자, 성직자, 의사, 지식인, 언론인, 온갖 문화계 인사와 더불어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의 관심은 시간이 가면서, 그리고 지리적 공간에 따라 태도와 전략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추적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식적·성공적 헌법 제정자뿐 아니라, 우려하는 마음에서, 또는 특정한 정치적·지적·사회적 의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희망에서, 또는 그저 글쓰기와 문자 언어에 중독되어 이런 유의 문서를 작성하는 데 뛰어든 숱한 개별 행위자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헌법은 엄밀하게 구획되어 있다. 다시 말해, 헌법은 다른 문학 양식이나 창의성의 산물과는 동떨어져 있고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범주로 여겨진다. 하지만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에서 인도 캘커타의 람모한 로이를 거쳐 베네수엘라와 칠레의 안드레스 베요, 타히티의 포마레 2세와 시에라리온의 제임스 아프리카누스 빌 호턴 등 헌법의 초안 작성자, 사상가,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그 옹호자들은 다른 문학 및 문화 활동에도 일가견이 있는 인물들이다.

헌법은 오류를 면치 못하는 인간종이 창조한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창조물이다. 헌법은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그저 정치인, 법정 그리고 관련 인구가 그에 대해 생각하고 필요할 때면 개정하고, 그것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능력과 의향을 가지는 한도 내에서만 기능한다. 헌법은 천진난만한 장치가 아니며, 지금껏 그랬던 적도 없다. 성문 헌법은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권력을 제한하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권력을 가능케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성문 헌법이 여러 가지 유익한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헌법은 소설처럼, 어느 장소 및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창조하고 들려준다. 이 문서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언제나 그 자체의 의미 이상을 지닐 뿐 아니라 법과 정치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헌법은 재발견 및 재평가되어야 하며, 각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읽힐 필요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