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볼가 강의 역사를 AI와 함께 작업하다 - 재닛 하틀리, 『볼가 강의 역사(The Volga: A History of Russia's Greatest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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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볼가 강의 역사를 AI와 함께 작업하다 - 재닛 하틀리, 『볼가 강의 역사(The Volga: A History of Russia's Greatest River)』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3.08.20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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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일리야 레핀의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 1870~1873년, 캔버스에 유채, 131.5x281cm, 러시아 미술관 / 이미지 출처=wikimedia commons

올 초부터 AI 열풍이 거셌다. 번역이 업인 나는 당장 번역부터 시켜보았는데 ChatGPT보다 DeepL 번역이 조금 나았다. 내친 김에 7월 말까지 마감해야 했던 역사책 영한 번역을 일단 DeepL로 돌려 보았다. 파일 번역 기능이 있어 두꺼운 책 전체의 1차 번역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걸 바탕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DeepL의 가장 큰 유용성은 단어나 문장 누락, 숫자 오류를 피하게 해준다는 점이었다. 원문을 아무리 열심히 살피면서 작업해도 무언가 빠뜨리거나 잘못 보고 옮기는 실수는 인간인 탓에 늘 발생하곤 한다. 물론 DeepL이 빼먹는 구문이나 문장도 있었다. 특히 페이지가 바뀌면서 문장이 나뉘는 경우에 그랬다. DeepL이 만들어준 문장을 그대로 채택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도 없었는데 그건 일단 문장 종결이 ‘~습니다’ 체로 나오기 때문이었고 수식이 복잡한 영어 문장은 한국어로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며 고유명사 처리에서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civil war로 표현된 러시아 내전을 예외 없이 (미국) ‘남북전쟁’으로 바꿔주는 DeepL의 ‘귀여운’ 오류를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AI와 협력 번역을 해본 소감은 이렇다. 초벌 번역문 텍스트를 마련해 주어 타이핑을 줄인다는 면에서 총 작업 시간의 10% 정도 절약되는 것 같다. 원문과 씨름하며 고민하는 시간은 거의 줄여주지 못한다. 한국어로 문장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하나의 안을 제시해 줌으로써 설사 그 안이 그대로 채택되지 않는다 해도 참고가 된다. DeepL이 나 같은 인간 번역가를 밀어낼 것이라는 말이 무성한데 아직은 간단한 수정보완만 해서 그대로 사용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게 결론이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으로 내린 결론이다. (그런데... 이번에 마감한 책 이후 예약된 번역 일정이 없다. 번역가로 살아온 25년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상황이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원서와 저자 (Janet Hartley explores the river's roles, myths and meanings.)<br>
                             원서와 저자 (Janet Hartley explores the river's roles, myths and meanings.)

책 얘기로 가보자. 『볼가 강의 역사』는 무척 흥미롭고 많이 배울 수 있는 책이었다. 처음 접할 때 든 생각은 ‘볼가 강을 중심으로 러시아 역사를 풀어내다니, 신기한 걸. 근데 굳이 필요한 작업이었을까?’였다. 끝내고 보니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음을 알겠다. 지금까지 내가 접해온 러시아 역사는 철저히 러시아인 중심,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민족 국가 러시아의 모습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었다. 볼가 강 지역은 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처음으로 만난 이민족 지역이었고 통치하려는 정부와 저항하는 이민족의 갈등이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지속되는 곳이다. 

번역하면서 새로 알게 된 것이 많다. 그 중 하나는 강제이주라는 것이 러시아에서 자주 활용되던 정책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스탈린 치하였던 1930년대에 연해주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사건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국 러시아 등장 이전의 초기 러시아 정부 때부터 강제이주는 빈번한 정책이었다. 새로 얻은 서쪽 영토에 주민이 정착하도록 해야 했으므로 중부 지역의 농민들을 이주시켰고 (그 결과 서쪽 영토를 목초지로 삼고 있던 유목민족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소요 가능성이 있는 집단은 멀리 보내버렸다. 제국 러시아의 대지주 귀족들도 영지 농노나 농민들을 타 지역에 새로 얻은 영지나 노동력이 필요한 공장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전통이 소련까지 이어졌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국민들은 국가의 뜻대로 옮겨지는 존재였던 것이다. 

기근이 그렇게 자주,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찾아와 러시아를 휩쓸었다는 점도 몰랐다. 소련 시절의 인재(人災)였던 우크라이나 대기근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먹여 살리던 곡창지대 볼가 강 유역은 흉년에도 종자까지 다 쓸어가는 수탈로 인해 정작 농민들이 꼼짝 없이 굶어죽는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고 한다. 기근 사태를 목격한 외국인 여행자들의 기록, 고향의 친척들에게 기근 상황을 알리는 정착민의 편지, 사태 파악을 위해 파견된 관리들의 보고서 등 실제 자료를 근거로 삼고 인용한 책의 구성 덕분에 당시의 참상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런던정치경제대학교의 국제역사 전공 명예교수인 저자가 풀어내는 볼가 강 역사는 이렇게 온갖 자료를 수집해 연결함으로써 재현해낸 과거, 황제나 귀족이 아닌 민초들의 삶 이야기다. 7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볼가 강 지역 삶의 흐름을 읽고 옮기면서 나도 오늘날의 러시아에 대해, 나아가 인간이 만들어온 세상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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