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만능주의와 무기력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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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만능주의와 무기력한 사회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3.08.0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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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택 칼럼]

진보와 보수를 참칭한 양대 정당은 물론이고, 세상사를 통달한 듯이 SNS에서 시사진단을 빙자한 트래시 톡(trash talk)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평론가의 정쟁을 바라다보면 이제 국가 만능주의가 일상화된 듯하다. “이게 나라냐”라는 탄핵구호로 집권한 민주당은 집권 내내 국가의 정상화를 외쳤고, 이를 정치적으로 미러링하여 집권한 국민의 힘은 이제 자유와 상식을 앞세워 다른 방식의 국가통치를 주장한다. 어느 쪽이든 국가를 사회질서 정상화의 선결 조건으로 이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정당은 국가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라 치더라도 어느덧 사회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시민사회도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정치적으로 의미 있다 싶은 사건과 문제만 터지만 모든 해결은 법원과 국가의 결정에 맡기는 못된 습관이 생겨났다. 거듭 반복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사법화가 중단되지 않는 이유는 사회가 자율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상실하여 어느덧 법과 국가의 통치에 우리의 삶과 운명을 맡기는 관행에 익숙해진 탓이다. 

물론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 경제부터 일터에서 노동하는 시민의 보호와 안전, 평화와 안보까지 현대 사회에서 국가가 시민의 삶 상당 부분에 책임져야 할 일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이는 민주국가의 의무이자 국가의 존립 근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무와 책임이 제대로 지켜지면 국가이성(Raison d'État)은 시민사회의 존중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도전을 받게 된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의 현대사가 이를 증명한다. 국가의 과잉은 오래전에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지역과 집단의 불평등 구조를 만들어냈으며,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관료주의와 소수 엘리트 집단의 통치를 합리화하고, 경쟁하는 개인을 파편화하면서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켰다. 

이는 어쩌면 민주화의 역설이다. 시민사회가 절대권력을 끌어내리지 못하고, 의회주의 테두리 내에서 어정쩡한 타협의 산물로 ‘87년 체제’를 만들어내면서 다수의 시민은 근대의 탄생에 내재한 사회와 국가 간의 길항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선한 의지’가 ‘정상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대단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더 큰 비극은 선한 의지가 정치적으로 응집된 시민의식도 아니라는 것이다. 양대 정당을 지지하는 87년 체제의 기득권 세력과 미디어 정치가 결합하여 어느 순간 대통령 후보는 ‘괜찮은 정치인’으로 물신화되어 대선만 되면 정책은 실종되고, 예의 ‘인물정치’로 전환된다. 대통령 후보가 왕도, 전지전능한 신도 아닌데, 이제 그는 이전 정부와 차별화된 신세계를 이끌 역사적 주인공이 될 운명의 화신이고, 양대 정당의 지지자는 거의 무비판적으로 후보자를 신격화하고, 상대 진영을 마치 물리적으로라도 파쇄할 기세로 공격한다. 무기력한 사회가 이 아사리판에 끼어들 틈이 없다. 언젠가부터 모처럼 명절에 식구가 모여 정치 이야기를 하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정도라니 이 정도면 정치 공화국의 끝판인 셈이다. 

정치가 시민의 일상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모든 시민의 일상적 행위가 정치로 소환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규범은 철저하게 지배계급의 문법을 따르고 있으므로 이를 바꾸려면 정치가 아니라 사회가 익숙한 문법과 규범을 바꾸어야 한다. 위험사회로 잘 알려진 작고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전통적 합리화 모델이 사라지고, ‘개별화’ 경향이 강해진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그가 마치 사회통합모델을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논란이 된 바 있지만, 실상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사회모델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공통의 경험보다 개별화된 경험의 조각을 모아 성찰적 사회의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은 사회가 조직화되는 방식이 개인의 수준에서 더 많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이를 성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제 국가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를 관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일례로 세월호 사건, 4대강 사업이 국가의 총체적 부실이라면서 지난 정부는 집권기간 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을 보여주었다. 세월호 사건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니 현 정부에서 ‘이태원 참사’는 개인의 운명 탓이 되었고, 4대강 사업에 대한 평가가 흐지부지해진 틈을 타 원전사업은 덤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그뿐이랴? 지난 정부 내내 공정을 앞세운 청년 문제를 국가가 책임질 것처럼 떠들었지만, 그 힘든 청년들은 이제 전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일부는 조현병 환자가 되어 공공장소에서 칼을 들고 설치고 있다. 반면에 청년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국가정책에 몸담았던 학계나 유사 정치 인사들은 청년들도 모르는 청년 쉼터를 도시마다 여러 개 만들어 놓거나 정치적 야심이 있는 일부 엘리트 청년들을 모아놓고 강의 몇 번 하고 표창장도 받고, 일부는 높은 신분의 ‘어공’도 되었다, 이러니 사회의 기층에 있는 청년들이 이 엘리트 인사들을 반길 수가 있을까? 국가 만능주의는 포용보다 배제에 더 재빠르다. 불과 얼마 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열광하던 시민은 장애인과 심신 미약자의 우발적 폭력에 화들짝 놀라 무장경찰이라도 소환할 심사이다. 사회가 이 문제를 들여다볼 여유와 관심보다는 다시 만능해결사 국가를 소환하는 게 빠르기 때문이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다시 정치의 재구성을 떠드는데 온통 국가를 다시 정상화하겠단다. 신당을 만들겠다는 사람들도 어떤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비전은 안 들리고 그냥 기존 정당으로는 안 되니 낡은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는 이야기뿐이다. 그중에는 불과 몇 년 전 진보정당의 미래로 거론되다가 그 정당이 구직 터가 된 영키즈들도 있고, 거대 정당에서 바른 소리 하다가 집나간 인물들도 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이 헤쳤다 모이면 달라질까? 별로 그런 기대를 하기가 어렵다. 사회가 국가를 재조직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없으면 국가는 이들의 몇몇 이슈를 빠르게 흡수하는 공룡이 될 뿐이다. 

아쉽게도 시민사회에서 가장 잘 조직화된 노조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모두 총선 전략을 통해 국가권력에 영향을 행사하겠단다. 국가정책이 노동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노조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상대는 자본이 아니었던가? 일부 열악한 사업장을 제외하면 그와는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지 오래되었다. 

물론 사회의 권력을 바꾸고, 재조직화하는 시도는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87년 체제가 만들어 놓은 해괴한 유산, 오로지 국가를 통한 개혁은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다. 노동, 교육, 청년, 안보 등 모든 사회 영역에서 기존에 당연시되던 규범과 문법을 바꾸고 새롭게 디자인하려는 시도와 그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없다면 정치는 이제 평범한 시민에게 질곡이 될 듯싶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한국이론사회학회 회장, 비판사회학회 편집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하였고,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은 바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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