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극적인 세계관의 일원화로 이룩해 낸 천문학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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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극적인 세계관의 일원화로 이룩해 낸 천문학의 개혁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7.2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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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 3: 세계의 일원화와 천문학의 개혁 |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 박철은 옮김 | 동아시아 | 616쪽

 

이 책은 15세기 중기부터 17세기까지, 북방의 인문주의 운동과 종교개혁을 배경으로 하여 중부 유럽을 무대로 한 세기 반에 걸쳐 전개된 천문학과 지리학, 즉 ‘세계 인식의 부활과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16세기 문화혁명과 나란히 진행됐던 천문학 개혁의 전말을 추적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즉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세계관이 이행해 간 시기의 천문학의 개혁 및 세계관 변화의 역사를 논의하며, 이후 갈릴레오 갈릴레이, 보일, 뉴턴으로 이어질 시기의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15세기 중기 포이어바흐와 레기오몬타누스에서 시작하여 16세기 코페르니쿠스와 튀코 브라헤로 계승된 천문학의 발전은, 케플러에 이르러 동력인에 기반한 수학적 논의로 설명되는 한편, 관측으로 검증되는 수리물리학으로서의 천문학, 즉 천체역학이라는 새로운 독립적인 학문의 가능성을 밝혔다. 이것이 새로운 세계관을 열었고, 중세 스콜라학에서 상위에 있던 논증적이고 철학적·자연학적 우주론과 하위에 있던 실용을 위한 수학적·기술적 천문학이라는 학문의 위계는 파괴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혜성은 달 아래 최상부에 있는 ‘건조하고 뜨거운 증발물’이라는 기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혜성을 천체로 간주했던 기원후 1세기 세네카의 이론 등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이 세계관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15세기에는 포이어바흐가 혜성을 관측하면서 혜성에 고유한 운동 개념을 부여했고 혜성까지의 거리를 추정했으며, 레기오몬타누스는 보다 정밀한 측정 방법을 논했다. 1531년에 핼리 혜성이 지구에 접근하자 요하네스 쇠너 등이 이를 관측한 기록을 남겼으며 특히 아피아누스는 혜성의 꼬리가 항상 태양의 반대 방향을 향한다는 점을 파악했다. 이후 지롤라모 카르다노는 기존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발물설을 부정하면서 세네카의 이론과 맥을 같이했고, 묻혀 있던 세네카의 이론이 조금씩 부활했다. 또한 파라켈수스는 천상세계를 영겁 불변하지 않고 물체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보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궤를 달리했다. 이러한 논의들은 1570년대에 지구에 접근한 신성과 혜성을 둘러싼 논의에서 고대 이래의 세계상을 해체하도록 촉진시켰다.

헤센 방백 빌헬름 IV세는 1572년 지구에 접근한 신성의 정확한 관측을 위해 정밀한 관측 장치 사용에 공을 들였고, 이를 통해 일류 관측자가 되었으며 과학 교류에 넓은 통신망을 형성했다. 튀코 브라헤는 이 신성을 가장 인상적으로 관측하여 신성의 이름이 튀코 브라헤 신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1577년에 나타난 혜성은 1572년에 나타난 신성이 불러일으킨 의심을 검증할 기회가 되었는데, 벤(Hven)섬에 건설한 천체관측기지에서 천체 관측에 전념한 튀코는 혜성을 달 아래의 현상으로 보던 기존 관점을 재검토하여 에테르 영역의 존재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던 미하엘 메슈틀린도 혜성의 궤도를 고찰하고 튀코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으며, 달을 관찰하면서 지구가 반사하는 태양빛에 달이 비춰진다는 사실을 공표하여 이론을 더욱 단단히 했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상극적 세계관은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튀코 브라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관을 부정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화된 수학적 천문학 이론에 상당 부분 동의했으나, 지구의 정지를 확신하고 천동설의 입장을 취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거부했다. 현실주의자였던 튀코는 우주론도 정밀한 관측과 엄밀한 수학에 기반하는 근대 과학으로 변환시키고자 했다. 그에게 그 출발점은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 각자의 결함을 제거하고 통합하는 것이었다. 튀코는 태양과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주회하고 그 태양 주변에서 다섯 행성이 주회하는 ‘지구태양중심체계’를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이 이론은 오늘날 우주론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계로 발전하기까지의 과도기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메슈틀린의 제자였던 케플러는, 행성운동 법칙을 제창하여 해석할 때 그것이 물리학적 · 동력학적 원인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분열되었던 천문학과 자연학을 통합했다. 그는 행성운동의 동력인을 태양에서 찾아 행성 궤도는 태양을 포함한 부동의 평면상에 있다는 명제를 발견했고, 지구 궤도와 태양중심이론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17세기 초 케플러의 법칙이 정립되고 1627년에 『루돌프 표』가 완성됨으로써, 행성운동(궤도와 주어진 시각에서 갖는 위치)을 예측하고 확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고대 이래의 천문학은 일단 완성되었으며, 유럽에서 이러한 세계관이 점차 수용되어 갔다. 케플러의 법칙은 엄밀한 수학적 개념으로 표현되고 정밀한 관측으로 검증되며 역학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첫 근대물리학 법칙이었던바, 이 책의 부록에서 케플러의 법칙을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16세기는 소위 ‘14~15세기의 르네상스’와 ‘17세기의 과학혁명’에 끼인 골짜기처럼 여겨지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문화혁명’이라고 불러야 할 지식 세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대학의 아카데미즘과 거리가 멀고 문자문화의 세계에서 소외되었던 직인(職人)과 기술자, 예술가나 외과의, 상인이나 뱃사람들이 생산 · 유통이나 각종 직업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습득하고 축적한 경험 지식이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효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까지 대학에서 가르치던 중세 스콜라학에 대치하는 것이었으며, 고대 문예의 부활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을 추구했던 후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운동마저도 뛰어넘는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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