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라는 환상이 당신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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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라는 환상이 당신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7.2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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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과 진보: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 대런 애쓰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736쪽

 

저자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이 책에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구를 토대로, 정치적·사회적 권력이 어떻게 기술 발전의 방향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를 치밀한 논증과 함께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저자들은 지배적인 계층(권력자와 엘리트)에 의해 설정되는 비전에 도전하고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취한 풍요를 모두가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권력 기반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이 발전하면 모든 이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게 기존의 경제 상식이었다.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더 나은 기계의 도입은 거의 자동적으로 노동자들의 더 높은 임금으로 이어진다’고 봤으며,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로 여겨지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 또한 ‘상업의 법칙은 자연법칙이자 신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기술의 진보가 직접적으로 자본이나 노동의 생산성을, 혹은 둘 다를 높인다고 가정해 왔다.

물론 많은 이들이 기술 발전이 혜택을 가져다주는 만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병폐도 어느 정도는 불가피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테크노-낙관주의’에 눈이 먼 이들은 “인류는 자신의 지식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현명하며, 놀라운 혁신을 이루는 데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면 해법은 한층 더 유용한 것들을 발명하는 데 있으리라”고 믿는다. 미래에 가치가 있을 만한 것에 우선 투자하고 밀어붙이고 발전을 향해 나아가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소한’ ‘부차적인’ 문제들은 추후 또 다른 과학 기술이 해결해 주리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 발전의 방향을 정하는 집단은 소수의 엘리트층 및 권력가이고, 진보로 인한 풍요는 그들의 주머니를 불린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비전을 설정해 왔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의 이익이라는 대의를 앞세워 수많은 이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희생시켰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들에게는 대다수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끔 설득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종종 대놓고 일어났으며, 행여 나중에 그 비전이 엄청나게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나더라도 이와 같은 패착이 권력자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는 못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뿌리 깊은 통념에 전면으로 반박하며, 기술 진보로 일궈낸 번영이 결코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었으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거침없이 질주하는 기술 발전의 경로를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할 수 있는지 대담한 통찰을 제공한다.

더 늦기 전에 기술의 발전이 궁극적으로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챗gpt, 인공지능이 우리 모두에게 번영을 가져다줄 것인가? 소셜미디어는 가짜 정보를 퍼 나르고 극단주의자들의 혐오 선동이 판치는 온상이 되었다. 중국 정부는 감시를 위한 AI 기술에 막대하게 투자하고 있다. 심지어 감시와 억압용으로 개발된 AI 도구들은 신장 지역을 넘어 비민주주의 국가들에 수출되고 있다. ‘아마존’과 같은 거대 기업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업무 일정을 엄격하게 관리하며, 작업하는 노동자들의 휴식 시간까지 모니터링한다. 

위와 같은 사례들 모두에서, 거대 기업과 강력한 정부의 ‘선택’으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영향을 받을 시민들의 의견은 수렴되지 않았다. 이러한 디지털 기술 개발을 통해 기업은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고, 중국 등 비민주적인 국가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감시·통제할 수 있었다. 이 디지털 도구들은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고 수익을 늘리며 기업들이 노동자를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기관 및 정부에게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독점하는 기술이 권력을 집중시키고 시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데 더없는 도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후생을 낮추고 민주주의를 쇠퇴시켰다. 그럼에도 ‘기술의 발전은 곧 진보’라고 여전히 확언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들은 지난 1,000년의 역사를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살펴보며, 기술 발전이 공유된 번영과는 거리가 먼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온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다. 개선되고 체계화된 농업 기술은 당시 인구의 90퍼센트에 가까운 농민들에게는 부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중세 말 바닷길이 열리고 대서양 교역을 통해 유럽의 일부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이면에는 그 배로 운송된 수백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 산업혁명 시기 혁신적인 기계의 발명은 공장의 생산량을 크게 늘려주었으나 노동자들은 오히려 더 착취당하고 억압적인 환경으로 내몰렸다. 기술의 발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멋진 신세계’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결정된다.

저자들은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발전할 때 그것이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해당 기술이 기존에 인간이 하던 업무를 보조하여 인간의 역량을 강화시켜 주고, 새로운 업무를 창출해 내어 노동자를 대체하는 것을 상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얻은 번영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곳에 놓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포용적인 ‘비전’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자본 소유자나 사업가들의 반대편에 놓인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저항할 수 있는 길항 권력을 가질 때에 ‘공유된 번영’이 더 실현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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